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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지역문화·서점 역할에 대한 오키나와의 질문
[글로컬 오디세이] 지역문화·서점 역할에 대한 오키나와의 질문
  • 정신혁
  • 승인 2024.03.29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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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정신혁 서울대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

에메랄드빛 바닷가의 풍경·카페·먹거리·전통 예능, 또는 미군 기지. 일본 남서부의 오키나와에 대해 한국에서 흔히 떠올릴 이미지라면 아마도 이런 것들이 있으리라. 그런데 이런 전형적 이미지와는 조금 먼, 다소 의외일지 모를 오키나와의 헌책방 이야기가 2015년 『오키나와에서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 세상에서 제일 작은 서점 울랄라의 나날』이라는 책의 번역·출간 이후 소소한 반향을 얻은 적이 있다. 

저자 우다 도모코는 일본의 대형 서점 준쿠도의 도쿄 이케부쿠로 본점에서 일하다 2009년 오키나와 최대 도시 나하(那覇)에 신설된 나하점으로 자원해 전근했고, 2년간 근무한 후 자신의 헌책방 ‘울랄라(ウララ)’를 운영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이 책에 풀어냈다.

책의 영향도 있고, 서점이 나하에서도 관광객이 많이 방문하는 ‘국제거리(国際通り)’ 근처에 자리하기에 여행객들도 제법 찾는 곳이 됐다. 필자도 몇 해 전 동료 연구자의 추천으로 ‘울랄라'에 들렀는데, 아담한 규모이면서도 수십 년 전 편찬된 지방사와 연구서·사료집 등 다양한 고서를 갖추고 있었다. 한국 여행자들의 목소리도 주위에서 들려왔다.

오키나와 기노완시에 위치한 헌책방 북스지논(BOOKSじのん)에 진열된 각종 고서와 지역 잡지다. 사진=김지영

‘울랄라’ 외에도 오키나와에는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이주한 헌책방 운영자들이 지역 서점 네트워크의 일부로서 지역 문화를 함께 만들어가고, 다른 헌책방들과 고서 관련 행사를 함께 개최하기도 한다. 그 배경에는 연구자 외에도 일반 독자의 지역 관련 도서 수요가 일정 수준 존재하며, 신간 출간과 판매에서 책의 유통이 끝나지 않고 헌책방 등을 통해 순환이 계속된다는 사정이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역 내 헌책방들은 지역사 연구에 필수적인 각종 향토사, 개인 전집류, 지역 잡지 등을 상당수 구비해 열람·판매하는 공간으로 기능하는데, 그 의미는 연구자는 물론 지역 주민 일반에게도 결코 적지 않다. 공공도서관 및 문서관과 함께 지식 유통 및 지역 문화 창출에 기여하는 장이 되는 것이다.
오키나와에서 지역 내 독자층이 두텁게 형성된 이유 중 하나로, 독특한 정체성과 위치를 갖는 오키나와 사회의 역사가 꼽힌다. 15세기 이래 현재의 오키나와에 존재했던 류큐 왕국은 독자적 정치체제와 문화를 향유하며 중개무역으로 번성했으나 1609년 사쓰마번의 침략 이후 일본과의 종속적 관계 아래 놓였고, 1879년에는 공식적으로 일본의 현으로 편입됐다.

이후 1945년부터 1972년까지는 미국의 통치하에 놓였다가 일본으로 ‘반환’된 바 있다. 식민과 동화·억압을 마주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꾸준히 공부하고자 했던 이들이 오키나와 관련 도서의 소비·생산·유통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에 대응해 오키나와 내의 서점들, 특히 준쿠도 나하점의 경우 오키나와 관련 도서, 특히 ‘현산(県産) 책’이라 불리는 지역 출판사들의 도서 장만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다. 오키나와 관련 최신간부터 지역 내에서 발행된 각종 잡지·중고책까지 망라해 한자리에서 일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온 것이다.

또한 준쿠도 나하점에는 소규모 지역 출판사에서 발간한 책들도 상당수 있는데, 온라인 서점망이 잘 갖춰졌다고는 해도 여전히 오키나와 밖에서는 입수하기가 곤란한 경우도 많다. 이런 책들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매개하는 데도 준쿠도 나하점의 역할이 적지 않다.

헌데 일견 대립적일 듯한 대형서점과 지역 고서점들 간의 관계는, 적어도 오키나와에서는 단순히 ‘경쟁관계’로만 보기는 어렵다. 작은 서점들의 몫을 준쿠도 같은 대형 서점이 가져갈지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는 않지만, 도서 전시와 유통 면에서 협력하는 사례도 있다.

예컨대 전 오키나와 고서적상 조합 주최로 매년 초 ‘신춘고서전’이라는 이름의 북페어가 준쿠도 나하점에서 열린다. 올해 제7회를 맞이한 올해 북페어에는, 13개 헌책방이 참여해 약 1만여 권의 책을 출품·전시했다. 전국적 규모의 대형서점이 지역 문화 지속에 이바지하는 플랫폼을 제공한다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다른 한편으로 대형서점 및 다양한 지역 서점들, 그리고 지역 독자층 간의 상호작용에 기반한 지역 출판문화를 모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물론 출판시장의 축소와 기존 서점의 경영난 문제라는 현실은, 오키나와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이러한 가운데 출판 생태계와 지역 문화의 지속을 위해, 서점들 간의 협업은 앞으로도 더욱 절실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지역 문화의 공간과 지식 유통이 갖는 의미는, 오키나와뿐만 아니라 출판업의 미래와 '지방 소멸'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한국에서도 한 번쯤 곱씹어볼 문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혁 서울대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

연세대에서 사학 전공으로 학사와 석사학위를, 캐나다 토론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냉전기 오키나와와 일본 본토에서의 탈식민 논의 및 사회변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남방동포원호회(南方同胞援護会)의 오키나와 반환론: ‘실지(失地)’ 담론의 형성과 그 의미」, 「전후 오키나와의 출입관리정책과 출입수속 거부운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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