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0:20 (토)
현란하기는 했으되 깊이가 없다 … 쿠차의 퇴색한 전통문화 앞에서
현란하기는 했으되 깊이가 없다 … 쿠차의 퇴색한 전통문화 앞에서
  • 연호택 관동대 영어학
  • 승인 2014.08.26 15: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19. 불교왕국 쿠차(4) 세 가지 이야기 ③管絃伎樂特善諸國

▲ 쿠차 북방에 위치한 수바사 불교사원 유허 사진 권오형

“The past is never dead. It's not even past.(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의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Requiem for a Nun)』 중에서

수바시 유적을 보고난 뒤 적잖이 마음이 스산했다. 집 떠난 지 며칠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문득 두고 온 것들이 그리웠다. 때는 어김없이 저녁밥 먹을 시간임을 알렸다. 우리 어머니는 새댁 시절 장독대 옆에 핀 분꽃 잎이 입을 벌리면 그를 보고 저녁밥 지을 때임을 알았다 했는데, 여기 사람들은 시계 없던 시절 시간을 어찌 알았을까.
예정대로 미리 맞춘 식당을 찾았다. 규모가 엄청났다. 땅 넓은 나라답게 통 큰(?) 밥집은 세련되지는 않았어도 나름 최선을 다해 실내장식을 해놓았다. 요리도 가지가지 향미가 제법 그럴싸했다. 밥만 먹자고 여길 찾은 건 아니다. 쿠차를 대표하는 민속공연이 열리기 때문이다. 여기는 관광객을 위한 극장식 식당이었다. 쿠차를 찾은 이상 명성이 자자한 쿠차 음악과 무용을 놓칠 수는 없었다. 예로부터 이곳은 관악, 현악, 기악이 특별히 소문난 ‘管絃伎樂特善諸國’이었다. 이날 큰 아이에게 사고가 생겼다.


한밤중에 배가 뒤틀리고 아프다며 야단이 났다. 전전날 투르판에서 40도를 웃도는 폭염 속을 돌아다니다 그 지방 명물 건포도를 마구 먹은 것이 탈이었는지 모른다. 혹은 며칠간 익숙하지 않은 한족과 위구르족의 기름진 음식을 먹은 탓인지 모른다. 토하고 또 토하고 아이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모두 문을 닫았으므로. 딸 아이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는 애비는 고역이었다. 설탕물을 먹이면 좀 나을까 호텔 야간 당직자에게 설탕을 구했으나 말이 안 통했다. 짧은 여름밤이 무한 길게 지났다.

 
사적인 이야기를 인문학기행에 쓰는 이유는 여행도 건강해야 즐겁고 위기상황은 다양하므로 그 대처법을 경험을 바탕으로 공유하고자 함이다. 고산증에 맵고 뜨거운 국물을 함께 마시는 국산 컵라면이 효험 있다는 게 한 예다. 야속하게도 우리 아이의 속칭 토사곽란은 다음날에도 계속됐고, 이러다 사람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인명은 재천이 맞다. 살 사람은 산다. 고통은 나름의 가치가 있고 사람에게 교훈을 준다. 또한 사람은 홀로 살 수 없음을 일깨워준다. 딸이 기진맥진해 실로 사경을 헤매다 삶으로 돌아온 것은 그 동네의 민간요법 덕분이었다. 콜라에 생강을 넣고 끓여 마시는 것이다. 마치 기적처럼 아이가 나았다. 쿠마라지바의 청동상이 근처에 있고 쿠차의 천불동이 바라보이는 식당에서다.


우리나라 중요무형문화재 제15호는 북청사자놀음이다.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정월 대보름에 사자탈을 쓰고 놀던 邪進慶 목적의 민속 탈놀이에서 기원한 것으로, 사자에게 사악한 것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믿어 두 사람이 사자탈을 쓰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춤을 추고 한바탕 노는데, 이렇게 하면 잡귀가 물러나 재액을 막고 복을 불러들인다고 믿었다. 현재 봉산탈춤, 통영오광대, 수영야류, 하회별신굿탈놀이 등에서 사자춤이 연행되고 있다. 이 춤놀이는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사자는 극동지역에는 없고 서역에 사는 짐승이므로 사자놀음 또한 서역에서 들어온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은 물론 중국에 민속사자무가 있고, 일본에도 민속사자무가 있는 것으로 보아 서역의 사자놀음이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다시 일본으로 전해졌지 싶다. 그렇지만 『삼국사기』에 異斯夫가 우산국을 귀복시킬 때 木偶獅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과연 신라에 사자가 없었다고 단정해 말할 수는 없다.
신라에 新羅五伎라는 다섯 가지 기예가 있었다. 신라 말의 대학자 孤雲 최치원(857년~?) 선생의 시 「鄕樂雜詠五首」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그의 문집 『계원필경』과 『삼국사기』 악지에 수록돼 있다. 내가 둘째 딸의 이름을 고운이라 지은 것은 소금 밀매업자 황소를 나무란 「討黃巢檄文」을 지은 선생의 당당함을 흠모한 때문이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일이란 스스로 자신을 아는 것이 제일이다. ……
너는 듣지 못했느냐? 노자가 도덕경에 이르기를, ‘회오리바람은 하루아침을 가지 못하는 것이요, 소낙비는 하루 동안을 내리지 못한다’했으니, 하늘의 일도 오래 가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람의 일이겠느냐?
또 듣지 못했느냐? 춘추좌전에 이르기를, ‘하늘이 잠깐 나쁜 자를 도와주는 것은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흉악함을 더하게 하여 벌을 내리려는 것이다’했노라.
이제 너는 간사한 것을 감추고 사나운 것을 숨겨서 악이 쌓이고 재앙이 가득한데도, 위험한 것을 스스로 편하게 여기고 미혹하여 뉘우칠 줄을 모르는 구나.

▲ 12세기 일본 헤이안 말기에 만들어진 『信西古樂圖』의 「舞樂圖」에 나오는 신라박이란 사자춤의 모습.

옛말에 ‘제비가 장막 위에다 집을 지어놓으면 곧 허물어지게 되고, 물고기가 솥 속에서 노니면 곧 삶아지게 될 것이다’했다.” 때는 당나라 말기, 선생의 나이 불과 24세 되던 881년 여름의 일이다. 1천130여 년 전 선생의 글솜씨와 기개를 나는 여전히 배우고 싶다.
신라시대에 행해진 다섯 가지 탈춤 등의 樂舞인 신라오기에는 금환(金丸), 월전(月顚), 대면(大面), 속독(束毒), 산예(猊)가 있다. 이 가운데 산예가 다름 아닌 사자춤으로 서역 국가 쿠차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산예’는 사자의 이칭이다. 금환은 금칠을 한 공을 돌리는 곡예, 월전은 우전국의 탈춤, 속독은 속특국(粟特國, 소그드)에서 전래한 씩씩하고 빠른 템포의 춤인 健舞의 일종이다. 대면은 가면무이며 특히 귀신을 쫓는 구나무(驅儺舞)의 일종이라 하는데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길은 멀었어도 사람들은 이렇듯 색다른 것을 수입했다. 그리고 즐겼다. 인도의 유랑집단 돔바가 서양 집시 로마니가 됐듯 처음에는 남사당패처럼 이 동네 저 동네 공연하다 서역인들이 신라까지 왔을 것이다. 고구려에도 갔을 것이다. 금환을 돌리는 곡예를 비롯해 이국적인 문화를 접한 신라인들은 서커스를 처음 본 아이들처럼 놀라고 재미있어 했을 것이다. 사자춤놀이도 무척 흥미로웠을 것이다.
가야 가실왕(嘉悉王 혹은 嘉實王)과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년) 시대의 음악가 우륵이 지었다는 12곡 가운데 8번째로 獅子伎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자춤은 이미 가야에서도 연행됐음을 알 수 있다(『三國史節要』). 가실왕이 우륵에게 이르기를, “중국에는 樂伎가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어찌 하나도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우륵은 그의 뜻을 헤아려 가야금을 만들고 달기, 사물, 물혜, 하기물,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의 12곡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는 하가라도, 둘째는 상가라도, 셋째는 보기, 넷째는 달기, 다섯째는 사물, 여섯째는 물혜, 일곱째는 하기물, 여덟째는 사자기, 아홉째는 거열, 열째는 사팔혜, 열한째는 이사, 열두째는 상기물이었다. 니문이 지은 3곡은 첫째는 까마귀, 둘째는 쥐, 셋째는 메추라기였다.”
산예라는 사자 탈춤을 보고 고운 선생은 아래와 같이 시로 소감을 적었다. 속독에 대해서는 파미르 以西 소그디아나 지역을 다룰 때 따로 소개하려 한다.

산예(猊) 멀리 유사 건너 만리길 오느라(遠涉流沙萬里來)
털옷 다 해지고 먼지 잔뜩 묻었네.(毛衣破盡着塵埃)
흔드는 머리 휘두르는 꼬리에 어진 덕 배었으니(搖頭掉尾仁德馴 )
온갖 짐승 재주 좋다한들 이 굳센 기상 같으랴.(雄氣寧同百獸才)

산예라는 사자 탈춤이 어떠했을지 짐작되는 자료가 있다. 위의 그림 즉 12세기 일본 헤이안 말기에 만들어진 『信西古樂圖』의 「舞樂圖」에 나오는 신라박(新羅)이란 사자춤이 그것이다. 이름에서 보듯 신라박은 신라에서 유행하던 伎樂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박()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大漢和辭典』 犬部를 보면 “: 與高麗訓同, 音泊. 獸名. 按蓋貊之訛. 貊國名三韓之屬”이라는 해설이 붙어있다. 일본에서 박은 ‘고마’로 읽히고 高麗 즉 高句麗를 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으로 보아 사자와 닮은꼴인 박이라는 명칭이 맥(貊)이라는 짐승의 와전이며, 삼한의 하나인 고구려의 국명으로 사용됐음을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돌궐비문에 등장하는 ‘뵈클리(B¨ok-li)’가 바로 맥국인 고구려를 지칭함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고구려는 맥이라는 짐승을 토템으로 하는 맥인의 나라였던 것이다. 혹시 고대 만주벌, 흥안령 산자락에 사자 비슷한 짐승이 살았던 건 아닐까.


한편 중국인은 박에 대해 좀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說文』 犬部에 “박은 이리와 비슷하며 양을 잘 몬다”라 한즉, 중국 북방 초원의 짐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짐작된다. 더하여 이백이 20세 무렵 지었다는 호방한 시 「대렵부(大獵賦)」의 내용이 흥미롭다. 여기 ‘토박’이 나온다. “……土을 사로잡고, 天狗를 쓰러뜨리며, 소의 뿔을 뽑고 코끼리 이빨을 찾는다.” 이에 대해 청나라 건륭 연간 『李太白全集』을 펴낸 王琦는 『고부변례(古賦辨禮)』를 인용한 注에서 “박은 이리와 흡사한데 뿔이 있다”라고 했다(『辭海』 犬部 참조). 아무래도 박은 사자와는 다른 짐승인 모양이다.


짱아오(藏獒)라 불리는 개 티베탄 마스티프(Tibetan Mastiff)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사자개라 부르는 모양이다. 털갈이 전 이 개는 목 주변의 긴 털이 뭉쳐서 딱딱한 뿔처럼 됐다가 털갈이를 하면서 뿔처럼 보이던 뭉쳐진 털이 떨어져 나간다고 한다. 뿔이 있다는 목양견 이 혹시 이 티베탄 마스티프를 말하는 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털갈이 하기 전 딱딱하게 뭉쳐진 털이 머리 위쪽에 생겼다면 무소의 뿔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예로부터 쿠차는 樂舞가 유명했다. 인도,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민족적 악무의 특징을 지녔다. 쿠차악(龜玆樂)은 高昌樂, 于樂과 더불어 서역 3대 음악의 하나로 손꼽혔다. 수나라의 九部伎나 당나라 때 十部伎에는 龜玆伎 즉 쿠차의 악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차악은 당나라에서 크게 유행했다. 특히 현악기인 류트가 중국으로 들어가 비파로 알려졌다. 당 현종은 쿠차의 타악기인 갈고의 명수였다 전하고, 쿠차의 악기는 고구려와 신라에도 전래됐다 한다.
고려시대에도 서역의 여러 樂伎가 들어와 사용됐다. 安國伎가 그 중 하나다. 고려 의종 때 法駕衛將과 八關衛將이라는 국가 행사를 할 때 수행한 서역의 여러 伎 중 하나였다. 수도 개성에 安國(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과 高昌國(오늘날 중국 신장성 투르판 부근), 천축국 등지에서 온 상인들이 자기네 고향의 기악을 연주했는데 이것들을 각각 안국기, 고창기, 천축기라고 불렀다.


신라까지 들어온 서역국 쿠차의 산예춤. 고대에도 세상은 통했나보다. 누구에 의해서건 문화는 전파됐다. 21세기 쿠차의 위구르인들이 보여주는 악무가 옛 모습을 얼마나 담고 있을지 궁금해 하며 나는 밥 먹는 것보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공연에 관심이 갔다. 현란하기는 했으나 깊이가 없어보였다. 퇴색되거나 변질된 전통문화 앞에서 나는 씁쓸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