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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씩이나 결혼해야 했던 漢의 공주, 그녀는 과연 행복했을까?
세 번씩이나 결혼해야 했던 漢의 공주, 그녀는 과연 행복했을까?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7.1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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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17. 불교왕국 쿠차(2) ― 세 가지 이야기① 공주의 운명

 

▲ 실크로드 천산북로에서 바라본 천산산맥. 사진 권오형

“사람은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운명이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지 사람이 운명을 선택하지는 못한다.”―정자

지금으로부터 2천79년 전인 기원전 65년 弟史라는 이름의 오손 공주가 쿠차왕 絳賓과 혼인을 한다. 이 여인은 누구일까? 과연 그녀는 행복했을까? 이번 글은 그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먼저 塞種이 살고, 그 다음에는 서천한 월지가 선주민 색종을 파미르 이서의 縣度(Sindhu 지방) 너머로 몰아내고 살던 땅을 또 나중에 내습한 오손이 차지한 기원전 2세기. 이미 오손은 주변국을 압도하는 최강국이었다. 부유한 사람은 4~5천 필을 소유할 만큼 이 나라에는 말이 많았다. 곤미(昆靡)라는 칭호로 불리는 초기 왕 昆莫(=곤미) 렵교미(獵驕靡)에게는 10여명의 자식이 있었다. 이 나라의 왕족에게는 독특한 풍속이 있었다. 누이인 공주를 처로 삼아 그를 昆弟라 했다.

 


이와 유사한 습속이 우리나라에서도 고려 초기 태조 왕건 사후 惠宗(맏아들 王武), 定宗( 王堯), 光宗(王昭), 景宗(王胄)으로 이어지는 왕씨 집안에 있었다. 4대 임금 광종은 태조의 넷째 아들로서, 신명순성왕태후 유씨 소생의 셋째 아들이자 요절한 王泰와 정종 왕요의 동생이다. 그의 비는 대목왕후 황보씨인데 그녀는 태조와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의 딸로 광종의 이복누이이며, 후궁인 경화궁부인 임씨는 배다른 형 혜종의 딸로 조카인 셈이다.


대곤미(대왕) 렵교미의 태자가 일찍 죽었다. 왕위는 태자의 유언으로 그의 아들이자 렵교미의 손자인 관호가 잠추인 軍須靡에게로 이어졌다. 화가 난 건 렵교미의 中子 大祿이었다. 때문에 일시 나라 안에 분란이 있었다. 자신을 제쳐두고 형의 아들인 조카를 태자로 삼으려는 아버지의 처사를 못마땅하게 여긴 부자 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권력을 놓고 싸우지 않는 사람이 없음이다.


그럼에도 오손국은 건재했다. 漢나라에서는 공주를 연로한 오손 곤막에게 시집보냄으로써 흉노를 견제하려 했다. 오손은 혼수로 말 1천 필을 보냈다. 대단한 선물이다. 그리하여 漢 元封 중(기원전 110~105년)에 江都王 유건의 딸 세군이 곤막의 왕비로 보내져 右夫人이 됐다. 그러자 질세라 흉노 또한 여인을 보내 곤막의 처가 되게 하니 곤막은 이 여인을 左夫人으로 삼았다. 노인이 복도 많다. 이미 오손출신의 부인이 있었을 것인즉 그에 더해 한과 흉노의 두 부인이 더해진 것이다.


초반 글에서 언급한 바지만, 이야기를 좀 더 진전시켜본다. 연로한 곤막은 자신의 부인이 된 한의 공주를 손자에게 하사(?)한다. 당시 유목민의 풍습이나 性 모럴로는 이런 일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손자인 잠추 군수미는 한의 江都公主 세군에게 장가들어 少夫라는 이름의 딸 하나를 낳았다. 세군이 죽자 한 조정에서는 또 다시 楚王 유무의 손녀인 해우를 공주로 봉해 잠추의 처로 보낸다. 잠추와 오손부인 사이의 아들 泥靡가 아직 어린데 잠추가 세상을 뜨니 잠추의 계부인 대록의 아들 翁歸靡가 왕위를 이어받아 肥王이 돼 또 다시 한에서 시집 온 해우를 부인으로 취한다. 그리고 아들 셋과 딸 둘을 낳는다. 장남은 元貴靡요, 차남 萬年은 후일 莎車王 즉 오늘날의 야르칸드(Yarkand, 타림분지 서남부의 오아시스 육로 남도의 종점)의 군주가 되고, 막내아들 大樂은 左大將이 된다. 옹귀미와 해우부인 소생의 두 딸 가운데 장녀가 바로 이번 글의 주인공으로 나중에 쿠차왕 강빈과 결혼하는 제사요, 작은 딸 소광은 若呼라는 이름의 령후(翎候, 葉護와 같은 관직명)의 처가 된다. 장남은 한 대 건너 오손왕인 대곤미가 되고, 차남은 천산산맥 이남 서남방의 나라 사차국을 통치했으니 당시 오손의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 볼만하다.


때가 돼 옹귀미도 세상을 뜬다. 그리고 전통에 따라 옹귀미 사후 오손의 왕위인 대곤미 자리는 貴人(귀족)들의 추대를 받은 잠추의 아들 狂王 니미에게로 돌아간다. 니미는 또 당시 오손의 풍습에 따라 숙부인 옹귀미의 부인이었던 한의 공주 해우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외아들 雉靡를 낳는다. 그리고 지미는 아버지인 니미의 사촌이자 계승자가 되는 옹귀미의 장남 원귀미의 뒤를 이어 후대의 곤미가 된다. 복잡해 보이지만 나름 원칙이 있는 왕위계승이다. 사촌간, 그리고 숙질간의 아름다운 순차적 권력세습. 史書는 니미와 해우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첫 남편 잠추가 죽자 그와 사촌간인 옹귀미의 새 아내가 되고, 그가 죽자 또 다시 계승자인 두번째 남편의 조카(니미)의 아내가 돼야 하는 漢 공주의 입장은 당황스럽다 못해 굴욕적이었을 수 있다. 세 번씩이나 시집을 갈 수는 없다고 완강하게 윤리를 따져 거부할 수도 없고,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풍습을 부득불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낳은 자식들의 촌수를 따지는 일은 이미 생각 밖의 일이 됐을 것이다. 말이 안 통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충격적인(?) 문화적 차이를 억지로 수용해야 하는 여인의 심정은 죽음보다 못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 기원전 1세기 쿠차왕 강빈과 오손공주 제사의 후손일 수도 있는 쿠차의 여인들

이런 때 전 남편 옹귀미와의 사이에 낳은 큰 딸 제사에게 장가들기를 청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기원전 65년의 일로 청혼자는 쿠차왕 강빈이다. 오롯한 漢의 공주 해우부인과 오손의 남자 옹귀미 사이의 혼혈이지만 쿠차왕은 개의치 않았다. 순혈과 혼혈의 구별은 훨씬 후대를 사는 현재의 우리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싶다. 그리고 적어도 오손 왕녀 제사에게는 漢 왕실의 피가 절반은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청혼이 제사가 아름답다고 소문이 자자했거나 당시 강대국 오손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한 정략적 선택일 수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前漢書』 「서역전」 제66 구자국 條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宣帝(재위 기원전 74~49년) 때에 長羅侯 常惠가 오손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임의로 (오손 병사 7천명을 포함) 여러 나라의 병사를 징발해, 모두 5만 명으로써 구자를 공격하고 과거에 교위 뇌단(校尉賴丹)을 살해한 것을 질책했다. 구자왕이 사죄하며 말하기를 ‘이는 저의 선왕 때에 貴人(귀족) 姑翼이 저지른 잘못이고 저는 죄가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고익을 붙잡아 상혜에게 보냈고 상혜는 그를 참수했다.


당시 오손 공주(초왕의 손녀 해우)가 딸(오손왕 옹귀미와의 사이에 낳은 장녀 제사)을 경사로 보내서 북치고 거문고 뜯는 것을 배우게 했는데, 한나라는 侍郞 악봉으로 하여금 공주의 딸을 호송토록 했고 구자를 지나가게 됐다. 구자는 일찍이 귀족을 오손으로 보내 공주의 딸을 청한 적이 있었다. 그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딸이 구자를 지나가게 되니, 구자왕이 그녀를 머무르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공주에게 사신을 보내 보고하도록 하니 공주가 (혼인을) 허락했다. 후에 공주가 글을 올려 딸을 종실의 사람처럼 간주해 입조케 하기를 원했고, 또한 구자왕 강빈 역시 그 부인을 사랑해 글을 올려 말하기를 ‘한나라의 외손녀를 맞아들였으니 (한나라 황실의) 형제가 된 셈입니다. 원컨대 공주의 딸과 함께 입조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元康 원년(기원전65년) 그는 마침내 입조해 경하를 드렸고, (한나라는) 왕과 그 부인에게 모두 인수를 하사했다.


부인을 ‘공주’라고 호칭하고, 수레와 말, 깃발과 북, 가수와 악사 수십 명, 수 놓인 비단과 여러 종류의 비단 및 귀한 진품 등 수천만을 하사했다. 1년간 머물게 한 뒤 후한 선물을 줘 보냈다. 후에 여러 차례 입조해 경하드렸는데, 한나라 의복과 제도를 즐겼으며, 그 나라에 돌아가서는 궁실을 짓고 주위를 둘러싸는 길을 만들고, 출입할 때에는 서로에게 전달해 부르면서 종과 북을 치니, 한나라 황실의 의례와 같았다. 바깥 나라의 胡人들이 모두 말하기를 ‘나귀인데도 나귀가 아니고 말인데도 말이 아닌 것이, 마치 구자왕과 같으니 (그것이 바로) 노새라고 부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강빈이 죽자 그 아들 丞德이 스스로 한나라의 외손자라고 하면서, 성제와 애제 때에 왕래한 것이 또한 여러 차례이니, 한나라는 그에 대해서도 역시 매우 친밀하게 대우해 줬다. 동쪽으로 650리 가면 尉???와 통한다.”


구자국, 즉 쿠차는 역사가 오랜 나라다. 인문학 기행 초반부에 등장했던 오손만큼이나 오래된 나라다. 지정학적으로 쿠차는 실크로드 천산남로 상의 주요국가로 동쪽으로는 투르판과 가깝고, 북으로는 천산산맥을 사이에 두고 이식쿨 호수, 일리하 일대 및 준가리아 초원을 무대로 한 오손과 접해 있었다. 때문에 흉노가 두려운 한의 입장에서는 전략적으로 지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무제와 장건 등 실크로드와 관련된 중요 인물들이 등장하는 기원전 2세기 경의 일을 기록하고 있는 『전한서』 「서역전」제66 구자국條는 구자국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한이 관장하는 서역도호부 소관의 쿠차국 관직명에 ‘胡’(匈奴)나 ‘車師’(투르판)를 ‘물리치거나’(却) ‘공격’(擊)하는 것을 임무로 하는 직책이 많은 것으로 미뤄 당시 시대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구자국의) 도읍은 延城(현 쿠차현 동쪽 교외의 피랑고성)이고 장안에서 7천480리 떨어져 있다. 호수는 6천970호, 인구는 8만1천317명, 병사는 2만1천76명이다. 대도위승·보국후·안국후·격호후·각호도위·격거사도위·좌우장·좌우도위·좌우기군·좌우역보군 등이 각각 1명씩 있으며, 동서남북 각 부의 千長이 각각 2명씩 있고, 각호군 3명, 역장 4명이 있다. 남쪽으로 정절, 동남쪽으로 차말, 서남쪽으로 우미, 북쪽으로 오손, 서쪽으로 고묵과 접해 있다. 주조와 야금에 능해 납[鉛]이 생산된다. 동쪽으로 350리를 가면 (서역)도호의 치소인 오루성에 도달한다.”

 

▲ 백양나무 우거진 가로수길을 달구지 타고 달리는 위구르인 모자

이런 나라 구자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신앙을 갖고 어떤 방식으로 생활했을까. 『晉書』 「四夷傳」제67 구자국의 기사가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 전편의 글에서 우리는 구자국이 불교와 관련해 중요한 지역임을 살펴 알았다.
“구자국은 낙양에서 서쪽으로 8천280리 떨어져 있다. 이 나라의 풍속은 성곽을 짓고 산다. 성곽은 삼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가운데 불탑묘가 1천 곳이나 된다. 사람들은 밭농사와 목축을 업으로 하며, 남녀 모두 앞머리는 자르되 뒷목으로 머리를 늘어뜨린다. 왕궁은 웅장하고 화려해 번쩍번쩍 빛나는 것이 마치 신이 사는 것과 같다.”

 


전진왕 부견이 서역정벌을 명하며 장군 여광에게 구마라습을 데려오라 했을 때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쿠차(구자국)는 70만 대군으로 7만의 침략군과 맞섰다. 이만한 군세를 가진 나라가 쿠차였다. 물론 처음부터 강성했을 리는 없다. 前漢代의 구자국은 비교적 세력이 약했고 때문에 한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기원전 65년 구자왕 강빈이 한의 공주와 오손왕 사이에서 태어난 딸 제사와의 혼인을 요청했는지 모른다. 기원후인 後漢代가 돼서야 비로소 구자국은 제도가 안정되고 강성해졌다.
당 태종의 명으로 秘書丞 영호덕분이 편찬한 周代의 역사서 『周書』 「異域傳」 下 제42 구자국 條는 오호십육국 시대 이후의 구자국에 대해 흥미로운 기사를 전한다.


“구자국은 白山(Aq taq)의 남쪽 170리 되는 곳에 있으며, 동쪽으로 장안과는 6천700리 떨어져 있다. 그 왕의 성은 白인데, 후량의 呂光(이전에는 전진왕 부견의 서역정벌군 대장군)이 세운 白震의 후손이다. 치소가 있는 성의 방은 5∼6리다. 그 형법에 의하면 살인한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도적질한 사람은 그 한 팔을 자르고 발도 하나 자른다. 부세는 토지를 기준으로 징세하고, 토지가 없는 사람은 은전을 세금으로 낸다. 혼인, 장례, 풍속, 물산 등은 焉支(焉耆와 동일)와 대략 동일하나, 오로지 기후만 약간 더 따뜻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또한 세전·경피·구수·요사·염록·자황·호분·양마·봉우(야크소) 등이 나온다. 동쪽에는 윤대가 있으니 곧 한나라의 이사장군 이광리가 도륙한 곳이다. 그 남쪽으로 300리 되는 곳에 큰 강이 있어 동류하는데 이름하여 計戍水(kash-su. 玉水의 음차어)라고 하니 즉 ‘황하’다.”


위의 기록에서 보듯 구자국의 왕족은 후량을 건국한 여광이 내세운 백진의 후예라 했으니 姓이 白이다. 그러나 『梁書』 권54 「구자전」에는 ‘帛’으로 나타나고, 『晉書』 권97 「구자전」에는 ‘白’으로 돼 있으나 권122 「呂光載記」에는 ‘帛’으로 표기돼 있다. 문제는 백씨가 왕이 되기 전 구자왕의 가계는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다.
삼장법사 현장의 구법여행기 『대당서역기』 屈支國 즉 구자국 관련 기사에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굴지국왕이 屈支種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나라의 지배집단이 굴지종, 즉 Kush(玉)의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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