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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 차지한 이슬람 세력이 남긴 흔적들
‘트란스옥시아나’의 패권 차지한 이슬람 세력이 남긴 흔적들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5.12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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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12. 동서 문명 교류의 시발, 탈라스 전투(2)

 

▲ 탈라스 초입 산간에서 만난 야생마 무리. 중국이 탐내던 대완의 천마 혹은 한혈마의 후손들일 것이다. 사진 이정국

탈라스 전투의 결과로 아랍은 2만에 달하는 당나라 연합군 병사를 포로로 잡는다. 이 가운데 종이 만들던 일을 하다가 전장으로 끌려온 사람이 있었고, 이 사람으로 인해 제지 기술이 아랍을 통해 서방으로 전파되기에 이른다. 당시 이슬람의 성전 『코란』 한 권을 적으려면 새끼 양가죽으로 만든 양피지(parchment) 300장이 필요했다고 한다. 부피가 얼마나 될지 쉽게 짐작이 간다.

“말을 아껴야 할 때가 있다. 생각을 쉬어야 할 때가 있다. 禍는 넘치는 말과 생각이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 ―정자

필자가 30년 째 살고 있는 강릉지방 말, 이른바 강릉 사투리에는 재미있는 어휘가 많다. ‘진셍이’라는 말이 그 중 하나다. ‘바보’라는 뜻이지만, 사용상 의미는 ‘바보보다 더한 바보’를 일컫는다. 그래서 “저 진셍이 같은 기(것이)”라고 말하면 그 속에는 상당한 경멸적 의미가 내포돼 있다. 한 마디로 영어의 ‘stupid’처럼 듣는 이가 기분 나빠할 모욕적 언사가 ‘진셍이’다. 우리는 똑똑한 진셍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를 설파했는지도 모른다. 바른 소리 하고서도 수치스러운 宮刑을 당해야 했던 사마천은 각고의 세월 끝에 대 역사서 『사기』를 완성했다. 그 첫 번째 책 「五帝本紀」를 통해 그는 五敎라는 우리 인륜의 평범한 지향점을 제시한다.

 


“五敎가 사방에 있은 즉 아버지는 의롭고 어머니는 자애롭고 형은 우애롭고 동생은 공경하고 자식은 효를 행해 안으로는 평온하고 바깥으로 성취하게 되는 것이라. 옛적 黃帝 鴻氏에게 못난 자식이 있으니 의로움을 어그러뜨리고 나쁜 짓을 즐기며 간특한 짓을 즐겨 행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混沌(即讙兠也)이라 불렀다. 소호씨(少氏, 金天氏帝號)에게도 못난 아들(共工氏)이 있어, 신의를 저버리고 충직함을 싫어하며 못된 말만 즐기고 잘 둘러대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窮라 불렀다. 전욱씨(頊氏)에게도 못난 아들(鯤)이 있어, 제대로 가르치고 훈계하지 못하고 말의 좋고 나쁨을 분간하지 못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도올(檮杌)이라 불렀다.


이 세 족속이 세세손손 걱정거리로 堯 임금에게까지 미쳤은즉, 요는 그를 어쩌지 못했다. 진운씨(縉雲氏)에게도 못난 아들이 있으니 음식을 탐하고 貨賄(재물)를 욕심내는지라 세상 사람들이 이르기를 도철(饕餮)이라 한 바, 천하의 악을 이 三凶에 비길 수 있다.”


위에서 제전욱의 아들 鯤이 왜 ‘도올’이라 불린 것인가. 『神異經』에 이르기를, “서쪽 大荒 중에 야수가 있은 즉 그 모양새가 호랑이 같고 긴 터럭의 길이가 무려 2척이나 된다. 얼굴은 사람이며 발은 호랑이요, 입은 돼지를 닮았고 이빨과 꼬리의 길이가 1장 8척으로 뒤흔들어서 사람을 어지럽게 한다. 대황에 사는 사람들의 말로는 도올이라 한다. 일명 傲(오만하고 패려궂음 혹은 難訓을 의미)이라고도 한다”고 했음에 비춰 곤이 도올이라는 야수의 성정을 닮았음에 세상 사람들이 못난 그의 흉을 보느라 도올이라는 별명으로 부른 것이라 짐작된다.

 

▲ 8세기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지도 출처: http://ko.wikipedia.org

 

이런 유래를 알고 나면 그 누구도 도올이 되기를 원치 않을 것이며, 혼돈, 궁기, 도철과 같은 존재 또한 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잘난 척이 금물이라 해놓고 문명의 교류를 논해야 하는 인문학 기행의 글에서 필자는 아는 척해야 하는 모순을 범하게 된다. 독자의 이해가 있기를 바란다.  

 
인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는 단연 『성경』이다. 영어로는 ‘Bible’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오늘날 레바논의 도시 비블로스(Byblos)에서 파생됐다. 이 도시는 고대 페니키아의 영토로서 레반트(the Levant. 시리아·레바논·이스라엘 등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 지중해에 면한 항구도시였다. 당연히 다른 지중해 국가들, 예를 들어 에게해의 섬들 및 헬라스(Hellas, 그리스)는 물론 마그레브(Maghreb) 지역에 속하는 이집트(알렉산드리아), 리비아, 튀니지(카르타고) 등 지중해 연안 국가의 도시들과 활발한 교역활동을 벌였다.
레바논 내륙 산간지역, 칼릴 지브란의 고향 마을 브샤리(Bsharri)에서 가까운 왓디 카디샤 계곡(Ouadi Qadisha: the Holy Valley)에서 벌목돼 비블로스 항구에 당도한 ‘신의 杉木(the Cedars of God)’이라 불리는 레바논 삼나무는 배편으로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지로 운송됐다. 이 삼나무는 솔로몬의 왕궁을 짓는데 사용됐다. 나일강에서 자라는 야생 갈대로 만든 파피루스(papyrus)는 당시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한 수완 좋은 페니키아 상인들에 의해 비블로스를 거쳐 그리스로 보급됐다.


청동기 시대 비블로스는 Gubal 혹은 Gubla라 불리는 가나안 지방의 도시였다. 철기 시대의 페니키아 명칭은 Gebal이며 히브리 성경에는 Geval(Hebre:גבל‎)로 나타난다. 훨씬 후대인 십자군 전쟁 때는 Gibelet로 지칭됐다. 비블로스라는 그리스 이름은 고대부터의 무역항이었던 이 지역을 거쳐 파피루스가 에게해 지역으로 수출된 데 연유한다. 파피루스의 그리스식 명칭이 byblos 혹은 byblinos였던 것이다. 결국 ‘Bible’은 ‘the papyrus book(파피루스로 만든 책)’이다.


우리말 ‘종이’는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 ‘종이’의 한자어인 ‘紙’의 기원은 무엇일까. 영어로는 ‘paper’라고 하는데, 이 또한 어디서 비롯된 말일까. 인간 언어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恣意性이라고 하니 우연히 그렇게 하나의 의미에 대해 다양한 어형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래도 어원을 따져보면 흥미로운 인간 역사가 드러난다.

唐軍 포로, 이슬람에 제지술을 전하다
영어 paper(<Anglo-Norman French papir), 불어 papier는 ‘paper-reed’라는 뜻의 라틴어 papyrus에서 파생됐다.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국어 어휘는 종이<죵희<죵ㅎ ´ㅣ<죠ㅎ ´ㅣ의 변천과정을 거친 것이다. 『훈민정음(해례본)』(1446)의 기록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따라서 어원이 명확치 않다.


한자 ‘紙’는 金文(Bronze Characters)과 甲骨文(Oracle Characters)에는 보이지 않는다. 後漢 때 許愼이 편찬한 중국 최초의 문자학 사전 『說文解字』는 ‘紙’에 대해 ‘絮一也從氏聲’이라는 설명을 달고 있다. 명주실로 만든 비단이 뜻이요, 소리는 氏를 따른다는 것이다.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 고대 중국인들은 비단에 글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木簡과 竹簡이 있었으나 부피가 문제였다.


종이는 나침반, 화약, 인쇄술과 함께 중국의 4대 발명품의 하나로 간주된다. 중국 고사에 따르면 종이는 後漢 시대의 환관이었던 채륜에 의해 발명됐다고 전해진다. 그는 나무껍질, 삼베 조각, 헌 헝겊, 낡은 그물 따위를 사용해 종이를 만들고, 105년에 이것을 和帝에게 바쳤는데, 당시에는 이 종이를 ‘蔡侯紙’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의 고고학 연구 결과로는 적어도 그보다 250년 이상 일찍 종이가 발명돼 기원전 140년경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발명된 종이는 중동을 거쳐 유럽으로 전파됐다. 기록에 따르면 제지술은 751년 경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이 세워진 것을 기점으로 당시 압바시아 이슬람의 新수도 바그다드를 거쳐 카이로, 모로코, 스페인을 차례로 거쳐 서유럽에 퍼졌으며, 14세기에는 서유럽 각지에 종이 공장이 생겨났다. 중세의 중동과 아프리카 북부 및 유럽의 역사는 사라센, 혹은 무어인으로 불리는 아랍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사마르칸트紙로 첫걸음을 뗀 종이는 793년 바그다드 입성을 시작으로 다마스커스(795년), 이집트(900년 경), 모로코(1100년 경), 스페인(1150년), 프랑스(1189년), 독일(1312년)로 전파된다.


종이가 널리 쓰이게 됨에 따라 중세 서유럽에서 기록매체로 사용됐던 양피지는 이후 점차로 자취를 감추게 됐고, 종이는 15세기 이후 발전한 인쇄술과 함께 지식의 대중화 과정을 주도해 종교개혁―로마 가톨릭 교회의 관점에서는 종교분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종이와 인쇄술이 아니었다면 1517년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마르틴 루터의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개혁선언문)은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고, 종교개혁의 성패도 예단할 수 없었을 것이다.

 

▲ 현장이 서역을 여행하던 무렵 고대 탈라스 성(오늘날 카자흐스탄 잠불 지방)의 상상도. 자료 KBS 다큐팀 총괄 EP 장영주 PD

 


이런 일들과 관련해 우리는 751년이 인류 문명 교류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됐음을 안다. 바로 중앙아시아 대평원 탈라스에서 벌어진 세기의 결전, 이른바 탈라스 전투(the Battle of Talas) 때문이다. 이 해 7월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안서절도사라는 직함을 가진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나라군과 동맹 부족 카를룩(qarluq, 葛邏祿, ‘눈[雪]의 주인’이라는 뜻)이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군과 티베트의 연합세력을 상대로 지금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즈스탄에 속하는 탈라스 평원에서 트란스옥시아나(Transoxiana, 중앙아시아의 河中지방)의 패권을 두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이 싸움에서 아랍군이 승리했고 당나라 군대가 패배했다. 그 원인과 전개과정은 차치하고 탈라스 전투의 결과로 아랍은 2만에 달하는 당나라 연합군 병사를 포로로 잡는다. 이 가운데 종이 만들던 일을 하다가 전장으로 끌려온 사람이 있었고, 이 사람으로 인해 제지 기술이 아랍을 통해 서방으로 전파되기에 이른다. 당시 이슬람의 성전 『코란』 한 권을 적으려면 새끼 양가죽으로 만든 양피지(parchment) 300장이 필요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 부피가 얼마나 될지는 쉽게 짐작이 갈 것이고, 보관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도 상상이 갈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覇者가 된 압바스 왕조
앞글에서 보았듯 태종 때(628~649년) 당나라는 중앙아시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 목적은 당과 중동, 지중해 연안을 연결하는 실크로드를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8세기에 이르러 당은 힌두쿠시 산맥 일대까지 장안으로부터 무려 1천610㎞나 떨어진 지역을 정복했다. 그러나 7세기 중반 이슬람으로 무장한 아랍인도 영역 확장의 야망을 성전이라는 미명하에 숨기고 서진 동진 양방향으로 전쟁을 벌였다.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군은 709년 河中의 핵심도시 부하라(安國)를, 712년에는 康居都督府가 있던 사마르칸트(康國)를 점령했다. 당의 입장에서는 얌전히 묵과할 일이 아니었다.


750년 안서4진 절도사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이 타시켄트(당시 명칭은 石國)를 정복했다. 9國胡와 突騎施도 무릎을 꿇렸다. 그리고 석국의 왕을 포로로 잡아 수도 장안에 압송했는데, 양귀비에 빠져 도올 같은 존재가 돼버린 당 현종은 투르크 군주를 처형하고 말았다. 이에 타시켄트 왕의 아들은 당나라군을 몰아내기 위해 이슬람군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부응해 747년 우마이야 왕조 세력을 메르브(Merb, 오늘날의 투르크메니스탄 지역)에서 몰아낸 압바스 왕조 이슬람의 호라산 총독 아브 무슬림이 부하인 지야드 이븐 살리흐를 파견했다.


결국 751년 지야드가 이끄는 압바스 왕조의 이슬람군과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은 천산 산맥 서북쪽 기슭의 탈라스 평원에서 운명적으로 격돌했다. 싸움은 불과 5일 만에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카를룩 部衆의 배반과 작전 실패로 고선지의 당연합군이 속절없이 무너진 것이다. 고선지를 비롯한 지휘관 및 소수의 당나라 병사 2천명 정도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전장터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이슬람군의 피해는 미미했다고 전한다. 전투에 참여한 이슬람군의 숫자는 중국 측 기록에는 20만명이라 전하나 근거가 박약하다. 차라리 존 헤이우드가 추산하는 대로 4만명 정도가 맞을 것 같다. 한편 당나라 연합군은 4만 5천명 정도로 이 중 절반이 당나라군이고 나머지는 토번을 비롯한 이민족 군사였다. 아랍 측 기록에는 10만명이라고 돼 있다. 그 중 5만이 죽고 2만을 포로로 잡았다는 것이다.


탈라스 전투의 승리로 압바스 왕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세력의 기반을 굳히게 됐고, 투르크계 유목민족들 사이에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이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쇠퇴해 더 이상의 서역 경영이 어렵게 됐다. 이 무렵 몽골초원과 중앙아시아의 맹주였던 돌궐도 그 힘을 잃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744년). 그리고 그 자리를 위구르가 차지하게 된다.
위구르는 안록산의 난으로 위기에 처한 당나라 조정을 돕기 위해 장안과 낙양까지 원정에 나선다. 이후 당은 위구르의 눈치를 보며 명맥을 유지하다가 소금 밀매업자 黃巢 일당이 일으킨 난으로 치명타를 맞고 국가로서의 명운을 다한다. 역사의 무대에는 늘 이렇게 적당한 때에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한다.


한 세기 뒤 위구르 제국의 북쪽 바이칼 호수 서쪽 예니세이강과 靑山 일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키르기즈족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할 것을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들 종족이라고 영원한 지배자일 수는 없었다. 나름 환난을 겪었다. 오늘날의 땅으로 이주하게 된 사연은 기구하다. 힘 센 타종족의 위세 하에 굴종의 삶을 살았던 이들을 일으켜 세운 영웅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마나스(Manas). 고선지 장군을 만나러 가는 탈라스가 바로 마나스의 고향이라고 키르기즈 사람들은 믿는다.
탈라스 전투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던 고선지 장군은 755년 안사의 난을 진압하던 중 모함을 받아 환관 변령성에 의해 참수당했다. 죽음은 이렇듯 뜻밖에 찾아온다.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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