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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륭제의 후비로 팔려간 '위그르여인' 香妃, 그 깊은 멜론의 향기여!
건륭제의 후비로 팔려간 '위그르여인' 香妃, 그 깊은 멜론의 향기여!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6.25 11: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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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15. 파미르 고원에 세운 玉의 종족의 도시, 카시가르(2)

▲ 영묘 주변 일반 무슬림들의 묘지군 사진 권오형

“평화로운 시절에는 아들이 아비를 묻지만, 전시에는 아비가 아들을 묻는다.”―헤로도투스

인도로부터 불교가 동방으로 들어오는데 교두보 역할을 한 도시가 카시가르다. 이곳을 거쳐 쿠차로, 언기로, 누란으로, 미란으로, 마침내 중원에까지 불교가 전파된다. 불교를 신봉한 前秦王(337~385년) 부견(?堅)에 의해 파견된 승려 순도(順道)가 고구려에까지 오고(372년), 명확하지는 않으나 투르크계 불승 아도(我道)에 의해 신라에도 불법이 전해진다.

불교는 피안의 종교다. 때문에 처음부터 도시에 사원을 짓지 않았다. 이 풍진세상(風塵世上)을 벗어나 到彼岸의 경지 즉 바라밀(婆羅蜜, 혹은 波羅蜜多. 산스크리트어 p?ramit?의 한자 전사)을 추구하는 것이 불법 수행자의 바람이었다. 그들은 도시를 벗어나 인적이 끊긴 산간으로 숨었다. 벼랑을 파고 석굴을 만들었다. 석굴은 다름 아닌 석굴암자 혹은 석굴사다. ‘리진수행(離塵修行)’의 적지인 석굴은 속세의 탐진치(貪慾, 진에(瞋?: 성냄), 愚癡를 말함) 三毒을 떨치고 명상 수행하기에 알맞았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했다. 틈틈이 부처의 전생담인 자타카(j?taka)와 같은 불교의 고사와 가르침을 벽에 그렸다. 자타카란 석가가 전생에 수행한 일과 공덕을 547가지 이야기로 구성한 경전 『本生經』의 산스크리트어로 한자로는 ‘사다가(?多迦)’로 음역한다. 이들은 또 석가모니 부처와 여러 보살상을 조각했다. 석굴예술은 이렇게 탄생했다.

此岸의 고해를 벗어나 행복과 자유가 기다리는 彼岸에 이르고 싶은 것은 목숨 가진 모든 존재의 열망일 수 있다. 강수연이 삭발 출연해 화제가 됐던 영화 「아제 아제 바라 아제(Come, Come, Come Upward)」를 봤으면 우리는 인생이 얼마나 고단 것인가 안다. 바라밀은 완전한 상태·구극의 상태·최고의 상태를 뜻한다. 교리상으로는 미망과 생로병사 등 八苦로 가득 찬 차안에서 해탈과 열반의 피안에 당도하는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한 실천적 덕목 혹은 수행방법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바라밀은 도피안 내지 度라고 의역된다. 도피안은 열반이라는 이상적인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며, 度는 고해인 이 세상에서 이상적 상태인 피안의 저 세상으로 건너가기 위한 덕목이나 수행법이라는 의미다. 대승불교의 주요 논서 중 하나인 『大智度論』에서의 度가 바로 파라미타(p?ramit?)의 의역어다.

우리는 어떻게 궁극의 경지에 도달할 것인가. 대표적 대승경전 『반야경』은 도피안의 해결책으로 여섯 가지 바라밀을 제시하고 있다. 布施(d?na)와 持戒(s?la), 忍辱(k??nti), 精進,(v?rya), 禪定(dhy?na), 그리고 智慧(praj??) 바라밀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마지막의 지혜바라밀 즉 반야바라밀은 나머지 다른 다섯 바라밀을 성립시키는 근거인 無分別智다. 대승경전인『華嚴經』에서는 6바라밀에 方便, 願, 力, 智의 네 가지 바라밀을 더한 10바라밀을 거론한다.

반야(praj??, 지혜)는 불교 가르침의 중요한 요소다. 깨달음에 이르는 필수 요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無明(지혜롭지 못함)으로 인해 욕망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것이 번뇌의 근원이 돼 행복한 삶을 꾸리지 못한다는 단순한 진리. 이런 불교적 다르마(dharma. 가르침)를 바탕으로 중생은 반야를 證得함으로 번뇌의 삶과 절연하고 三昧(samadhi)의 경지에서 노닐 수 있다. 인생이 이처럼 자유로울 수 있음이다. 흔히 『金剛經』이라고 알고 있는 불경의 원명은 『金剛般若 波羅蜜多心經(Vajracchidik?-prajn?-p?ramit?-s?tra)』이며, 『般若心經』역시『般若波羅蜜多心經』으로 모두 반야를 증득하기 위한 경전임을 밝히고 있다.

17~18세기 서역(오늘날의 동투르키스탄)은 격동과 격변의 장소였다. 카시가르도 예외가 아니었다. 발단은 만주에서 발원해 중원의 지배자가 된 만주족의 나라 靑朝 중화의 서진정책에 기인한 일이었다. 몽골초원을 넘어 오이라트 제 부족이 세력을 떨치던 알타이 이서의 준가르를 아우르고 이리초원까지 손에 넣은 청 황실은 천산 이남의 서역을 장악하고자 했다. 

자신들이 맥없이 淸軍에 굴복한 것과는 달리 비록 여자임에도 끝내 수청을 거부하고
위그르인으로서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향비는
카시가르인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향기로운 여인 향비여야 했다. 민족적 자존심의 향기.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父皇 옹정제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이른바 태자밀건법에 의해 청나라 제6대 황제가 된 건륭제의 만주어 본명은 愛新覺羅 弘曆(아이신줘로 훙리). 아이신줘로는 우리식으로 하면 김씨, 김가라는 말이다. 만주어 ‘아이신(aisin)’은 ‘金’을 뜻한다. 아이신 집안은 황금씨족인 것이다. 건륭제는 별명이 ‘十全老人’이다. 열 번의 정복전쟁에서 모두 승리한 위인이라는 의미다.

1711년에 태어나 20대 중반인 1735년 황위에 올라 60년 넘게 보위에 있다가 1796년 물러났으나 이후 2년간 太上王으로 실권을 행사하다 1799년 세상을 뜬다. 중국 최후의 태평성세인 康乾盛世의 마지막을 장식한 황제로 중국의 역대 황제 중 최고로 장수한 황제이며 중국 최후의 태상황제였다. 이만하면 건륭제는 더없이 행복했던 황제다. 남자인 나는 어느 때는 그가 부럽다.

그에게 ‘십전노인’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1747년 大金川을 시작으로 1791년까지 무려 40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준가르, 사천성 금천 지역, 네팔을 각각 두 번씩, 그리고 回部(회족지역), 미얀마, 대만, 월남을 한 번씩 도합 십 회에 걸친 원정을 통해 모두 승리를 거둔 十全武功 때문이다. 그로 인해 현재 중국의 영역이 확정된 셈이다. 또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藏族, 회족의 5개 민족을 아우르는 판도를 형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시기에 이르러 중국요리의 최고봉 ‘滿漢全席’이 완성됐음은 우연이 아니다. 건륭제의 조부 강희제는 본인이 회갑을 맞아 천자로서는 보기 드문 장수를 누리는 기쁨에 전국의 65세 이상 노인 2천800명을 대궐로 초청해 이틀에 걸쳐 千壽宴을 벌였다. 그리고 만석과 한석을 두루 갖춘 잔칫상을 가리켜 친히 만한전석이라 불렀다. 이렇게 해서 만한전석은 만족과 한족의 산해진미를 모두 갖춘 궁중연회를 뜻하는 말이 됐다. 황제는 청왕조 지배 하에서 다수의 한족과 소수의 만족이 서로 융화해 태평성대가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만한전석에 쓰이는 식기류가 온전히 남아있는 것은 산동의 공자 집안에 보관된 것이 유일한데 모두 404개로 물경 196가지의 음식을 담아 낼 수 있다고 한다. 모두가 은제인 이 식기류는 1771년 신묘년 건륭제가 자신의 딸을 공자의 72대손에게 시집보내면서 혼수품으로 딸려 보낸 것이라고 한다.

건륭제의 명을 받은 靑軍이 낙타부대를 이끌고 타림분지를 침공한 것은 1758년이다. 그리고 이듬해 분지 전역을 정복했다. 이렇게 해서 이리분지, 준가르 등지를 망라한 동투르키스탄은 ‘새로운 강역’이라는 의미의 ‘新彊’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고, 청제국의 영역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청제국은 이리하 유역, 이르티시강 일대, 우루무치에 타란치(taran-chi)라 불리는 타림분지 일대 오아시스에 거주하는 인도-토화르계는 물론 투르크계(보다 정확하게는 Karluk, 葛邏祿) 무슬림 정주민들을 이주시켰다. 사회경제적으로 청의 지배를 뒷받침하게 된 이들 타란치는 이렇듯 본래 오아시스 지역에서 농경활동을 하던 농민이었다. 생산성 높은 관개농업의 경험이 풍부한 경작 기술자들인 셈이다.

타란치’라는 말은 ‘농민’을 뜻하는 몽골어 ‘타리야치’(혹은 서몽골 오이라트어 ‘타란’)를 차용한 차가타이-투르크어라고 한다. 청이 타림분지를 정복하기에 앞서 17세기 중후반 오이라트가 중심이 된 준가르국은 이리 계곡을 점령한 후 농토 개간을 위해 천산 남부의 오아시스 지역에서 수많은 타란치들을 데려왔다. 

이 무렵 타림분지 서단 카시가르에 후일의 香妃가 되는 아름다운 위구르 여인이 있었다. 그 지역의 이슬람 귀족 집단 호자(Khoja) 가문 출신이었다. 정복자에게 피정복 지역의 미인이 헌상되는 것이 관례임은 역사가 증명한다.

향비의 입장에서 과거를 보자. 그녀는 슬펐을 것이다. 20대 초반의 꽃다운 아가씨가 말도 다르고 풍습도 다를뿐더러 50살에 임박한 노인(당시 50세는 이미 노인으로 간주됐다)에게 시집을 가야하는 것이다. 그 남자에게는 다른 여자도 많았다. 저 멀리 남의 땅 북경으로. 기막힌 팔자를 한탄하며 끌려가다시피 그녀는 건륭제의 후비로 팔려간다. 정치 혹은 외교란 이런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역사적 실체는 대부분 망실된다. 대신 사람들은 자신들의 부끄러운 행위를 아름다운 이야기로 지어낸다. 역사의 미화. 대부분 그렇게 자신들의 과실을 변명하고 위로한다. 향비의 전설도 이런 맥락에서 탄생됐을 것이다.

건륭제가 꿈속에서 아리따운 한 여인을 만난다. 꿈에서 깨어난 황제는 사방을 수소문해 그녀를 찾으라고 명한다. 그녀는 당시 위구르인의 땅이던 서역 카시가르에서 발견된다. 황명으로 그녀는 황제가 있는 북경 자금성으로 보내진다. 절세가인이기도 하지만 몸에서 매혹적인 향기가 감돌아서 향비라 불렸다는 이 여인은 황제와의 잠자리를 거부하고 항상 서쪽 고향만 그리워하며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그녀를 못마땅하게 여긴 황태후가 황제의 부재를 틈타 그녀를 죽였다.

나는 그녀를 향비로 묘사한 위구르 무슬림들의 심정이 궁금했다. 그녀는 카시가르를 다스리던 이슬람 귀족 집단 호자(Khoja) 가문의 여인이었다고 전한다. 호자 가문의 역사는 티무르의 후손임을 자처하고 사마르칸드로부터 카시가르로 이주한 이슬람 수피 호자 이스하크로부터 시작된다. ‘호자’는 이슬람 사회에서 신분을 나타내는 칭호 중 하나로 본래 사만조 시대의 관직명으로 ‘귀족’을 뜻한다. 호자 이스하크를 필두로 이슬람 신비주의 교단의 하나인 낙슈반디 교단에 속하는 마흐두미 아잠(‘위대한 스승’이라는 의미)의 후손들이 16세기 말 사마르칸드로부터 카시가르로 옮겨와 점차 그곳에서 세력기반을 형성하며 종교 귀족으로서 聖俗 양면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들이 바로 카시가르 호자 가문이다.

카시가르에서 북동으로 5km 정도 떨어진 곳에 아파키야, 이샤니야, 혹은 악 타글릭(Ak Tagliq)으로 불리는 이슬람교 白山黨의 수장 호자 아바크(Khoja Abakh, ?~1693/94)의 영묘가 있다. 아바크는 카시가르는 물론 주변의 호탄, 야르칸드, 쿠처, 쿠얼러, 악수 등을 통치한 인물로 여기 그를 기리는 영묘에는 5대에 걸친 그의 가문 사람들의 무덤이 있다.

향비묘도 바로 이곳에 있다. 호자 아바크 영묘의 주묘실 안에는 사람 키 절반 정도 높이의 테라스가 있어 거기에 크고 작은 관 58개가 자리 잡고 있다. 향비묘는 테라스 동북쪽 모서리에 위치해 있는데 무덤 앞에 위구르어와 중국어로 그녀의 이름이 적혀 있다. 황제의 여인이었다면 의당 건륭제가 묻힌 북경 동쪽 준화시에 있는 청 황실의 묘지 東陵에 매장돼 있어야 마땅하다. 따라서 향비가 역사적 실제 인물이었다면 카시가르의 향비묘는 허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위구르인들이 청나라에 패한 굴욕의 역사를 보상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기 위해 향비라는 인물과 그에 관한 전설을 창조해낸 것인지 모른다.

전설에 의하면 향비가 건륭제의 비가 된 것은 그녀의 나이 22세 때인 1757년. 위구르 무슬림의 오아시스 국가 카시가르가 청나라에 패망 복속되기 두 해 전이다. 향수병에 잠겨 황제의 침소에 들기를 한사코 거부하던 그녀가 자살을 했는지 혹은 미움을 사 죽임을 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향비 전설의 대미는 향비가 죽자 카시가르 사람들 124명이 3년 반이나 걸려 북경에서 카시가르까지 향비의 시신을 실은 수레를 끌고(혹은 상여를 메고) 걸어서 운구해 왔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맥없이 청군에 굴복한 것과는 달리 비록 여자임에도 끝내 수청을 거부하고 위구르 여인으로서 민족적 자존심을 지킨 향비는 카시가르인의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기에 그녀는 향기로운 여인 향비여야 했다. 민족적 자존심의 향기. 나는 그것이 어떤 것일까 궁금했다. 도시 외곽 도로변에 가로수로 심어진 키 높은 백양나무의 향기가 그러할까. 그러나 백양나무는 향기가 거의 없다. 파미르 고원 야생화의 향기일까. 알다시피 야생화 또한 향기가 희박하다. 그렇다면? 바자르 과일 가게 앞을 지나다 하미과라는 타림 분지 특산의 멜론을 고르고 있던 젊은 무슬림 여인에게서 문득 향기가 전해져 왔다. 그건 다름 아닌 무르익은 멜론의 달콤한 향기였다. 그랬을 것이다. 향비의 몸에서 풍겨 나오던 향기는 멜론의 향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향비의 향기를 결정지었다.     

연호택  관동대 ·  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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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웅 2014-06-29 18:04:50
불교의 금강경에서 말하는 다르마의 뜻이 너무 광범위하여 일저리 찾던 중
연호택 교수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제가 원하는 다르마의 뜻은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많은 분들이 유럽여행들을 가시는데, 위그루인들이 사는 곳도 가고 싶어지고,
동투르기스탄에도 가고 싶어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