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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군과 벌인 고선지 최후의 결전 … 세계문명사가 바뀌었다
아랍군과 벌인 고선지 최후의 결전 … 세계문명사가 바뀌었다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4.29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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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11. 동서 문명 교류의 시발, 탈라스 전투(1)

고구려 유민의 후손 高仙芝 장군.
누군가는 힌두쿠시를 넘은 그를 ‘동방의 알렉산더’라 했고, 오렐 스타인 같은 이는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에 비교했다. 아랍 역사서에는 ‘힌두쿠시의 제왕’이라 기록됐다. 패배를 모르던 고선지 장군이 탈라스 전투에서 졌고, 그로 인해동서양의 정치, 종교, 군사, 사회, 문화적지형이 바뀐다.

 

▲ 탈라스 가는 도중의 오트목 고개(해발 3,326m) 사진제공 KBS 다큐팀 총괄 EP인 장영주 PD

“손을 뻗어 하늘의 별에 닿으려다가 인간은 번번이 발치의 아름다운 꽃들의 존재를 잊는다.”―제레미 벤담(1748~1832)

 

 

▲ 고선지
밤 12시. 오시(Osh)는 여전히 더웠다. 충격적인 한낮의 무더위에 시달렸으니 쉽게 잠이 올 거라 생각했으나 천만의 말씀이었다. 다행히 점심으로 한식을 먹어 마음과 몸이 행복해진 일행들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오시의 숙소는 처음 보지만 반가운 동포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이곳에서 며칠간의 낯선 음식과 고단한 여정으로 지친 몸을 위로받았다. 주인장의 말에 의하면, 멀고 먼 이역, 거의 오지에 가까운 오시에 한국인이 70여 명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며칠만 김치, 된장 못 먹어도 안달하는 한국 사람들인데……. 낯선 환경도 습관이 들면 익숙해질까. 아무리 케밥이 맛있어도 몸에 익숙한 삼겹살만 할까. 무슨 사연, 혹은 무슨 소명을 받고 이들은 고국을 떠나 여기까지 왔을까.

 


다음날 새벽 3시에 떠나려니 잠은 어차피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떠나야했다. 오시를 출발해 잘랄라바드, 독도굴, 탈라스를 경유해 비시켁까지 하루에 이동하려면 부득이한 일정이었다. 실제로 20시간이 소요됐다. 탈라스는 어디고, 거기는 왜 가야하는가. 바로 751년 고구려 유민의 후손 고선지 장군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아랍군이 벌인 세기의 전투 때문이다. 천 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거기 무슨 흔적이 남아있을까 만은 세계문명사의 전환점이 된 탈라스 전투의 현장을 빼놓을 수 없었다.


탈라스 평원은 탈라스강을 끼고 키르기즈스탄과 카자흐스탄 두 나라에 걸쳐 있다. 몽골제국이 남긴 최초의 세계사라 할 라시드 앗 딘의 『집사』 1권에 해당하는 『부족지』 서론에 투르크 종족이 예전부터 거주하던 지역이 서쪽의 킵착 초원부터 시작해 동쪽 방향으로 쭉 나열돼 있는데, 여기 투르크의 주요 활동무대로 탈라스가 등장한다.


킵착 초원은 현재의 카자흐 초원으로 몽골제국 당시는 칭기즈칸의 큰 아들 주치(Jochi)의 소관 영토였다. 탈라스 역시 마찬가지. 탈라스 강이 흐르고 그 주변으로 광활한 분지가 펼쳐진 스텝. 여기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 8세기 중반 동진하는 아랍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中原의 당나라 군대가 최후의 결전을 벌인 때문. 결과는 당나라의 동맹군이었던 돌궐의 지파 카를룩(Qarluq) 군대의 배반으로 인한 압바시드 왕조 아랍군의 승리. 이 싸움으로 문명사는 아랍과 유럽에 호의적으로 변천한다.


당나라 연합군의 장수는 고구려 유민의 후손 高仙芝 장군. 누군가는 힌두쿠시를 넘은 그를 ‘동방의 알렉산더’라 했고, 오렐 스타인 같은 이는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에 비교했다. 아랍 역사서에는 ‘힌두쿠시의 제왕’이라 기록됐다. 747년 소발률국 정복을 시작으로 패배를 모르던 그가 탈라스 전투에서 졌고, 그로 인해 동서양의 정치, 종교, 군사, 사회, 문화적 지형이 바뀐다.


역사의 무대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우리와 관계있는 쪽으로 가져와 보자. 7세기 중반 그러니까 6백년 대 중반 이후 동북아의 정치 상황이 크게 변모한다. 660년 공식적으로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고, 그로부터 불과 8년 후 만주벌의 패자 고구려가 맥없이 몰락한다. 물론 지배왕조만 바뀌었을 뿐 주민들이 다 죽거나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이주한 건 아니다. 바로 이 시점 실크로드와 중앙아시아도 전란의 소용돌이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도 인간은 싸우지 않은 때가 없다. 역사적 전환점이 됐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인간은 부단히 전쟁을 벌였다. 안서4진의 설치와 관련한 앞의 글에서 보았듯, 중원의 당나라는 서역지배를 놓고 북으로는 돌궐, 서로는 티베트와 쉼 없는 갈등상태에 놓여있었다. 이런 와중에 고구려를 패망케 한 것은 어쩌면 요행이었을 수 있다.

동진하는 아랍군과 당나라 군대의 최후의 결전
후환이 두려운 당나라는 고구려 포로를 잡아간다. 무려 3만8천3백戶. 어림잡아도 2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숫자다. 포로가 된 고구려인 일부는 수도인 장안으로 상당수는 江淮南 등지의 오지로 끌려갔다. 가는 도중에 많은 이들이 죽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어떤 굴욕의 삶을 살았는지, 얼마나 비참한 인생 행로를 걸었는지 역사는 친절히 알려주지 않는다. 黑齒常之와 같은 백제 장수가 당나라를 위해 공훈을 세웠음을 중국 남경박물관에 남아있는 그의 묘지명을 통해 알 수 있을 뿐이다. 고선지에 대해서도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당나라의 역사서를 통해 그의 출신과 업적, 사망 등의 대략을 알 수 있을 뿐이다.

 

 

▲ 745년부터 840년까지 몽골초원의 지배자였던 위구르 제국을 중심으로 그 아래 중국과 서역

『삼국사기』는 보장왕 26년(668년)에 있었던 고구려 패망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전한다. “겨울 10월 이세적(당나라 장수)이 돌아가려 할 때 당나라 고종이 그에게 명해 우선 고구려 임금 등을 데려다가 소릉(당 태종의 능)에 바치고, 군사의 위풍을 갖춘 다음 개선가를 부르면서 장안으로 들어와 태묘에 바치게 했다. 겨울 12월 당 고종이 함원전에서 포로들을 받는 의례가 있었다. 고구려왕은 정치를 그가 한 일이 아니라 하여 사면하고, 사평태상백은 원외동정을 삼고, 천남산은 사재소경을 삼고, 승려 신성은 은청광록대부를 삼고, 천남생은 우위대장군을 삼았다. 이세적 이하에게는 벼슬과 상을 차등 있게 내렸다. 그리고 천남건은 검주로 귀양을 보냈다.”(필자 주: 승려 신성은 이세적의 당군이 평양성을 공격할 때 천개소문의 아들 천남건의 수하로 군사에 관한 일을 맡았는데 부하들과 함께 비밀리에 이세적과 내통해 성문을 열어놓아 결국 고구려가 패망케 한 인물이다. 천남건은 이 때 제 손으로 죽으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당군이 보장왕과 함께 포로로 잡았다.)

 


인문학 기행이니 만큼 짚고 넘어갈 사항이 있다. 사서가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 淵蓋蘇文을 泉蓋蘇文, 그 아들들을 泉男生, 泉男建, 泉男産 등으로 기록한 것은 唐 高祖의 이름이 李淵이었음에 연유한 忌諱 해프닝이다. 예부터 우리나라나 중국에는 임금이나 성현, 집안 어른의 이름을 언급하거나 그 이름을 따서 작명하기를 삼가는 관습이 있다. 이것을 ‘忌諱’ 또는 ‘避諱’라고 하며, 줄여서 ‘諱’라고도 한다. 휘는 한국·중국·일본 등 유교문화권에서 왕이나 제후 등이 생전에 쓰던 이름을 말한다. 원래는 죽은 사람의 생전의 이름을 삼가 부르지 않는다는 뜻에서 나온 말인데, 후에는 생전의 이름 그 자체를 휘라 일컫게 된 것이다. 결국 김부식이 기휘 습속 때문에 淵蓋蘇文의 姓을 뜻이 같은 泉으로 바꿔 적은 것이다.


알다시피 조선 태조는 初名이 성계요, 初字는 중결이었는데 임금이 된 뒤에 이름을 旦으로 고쳤다. 이렇게 바뀐 이성계의 이름 ‘단’ 때문에 이전까지 매달 초하루를 월단이라 하던 것을 月朝라 했다. 임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제도에 어긋나는 기휘저촉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구려 광개토왕이 백제 阿莘王에게 항복을 받은 곳이고, 온달 장군이 신라와 싸우다 전사한 阿旦城 또한 태조 이성계의 이름인 ‘단’자가 있다는 이유로 비슷한 글자인 阿且城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런 기휘 습속과는 관계없이 현 중국 낙양에는 고속도로를 사이에 두고 위나라 효명제 능묘 맞은편에 연개소문의 맞아들 천남생, 천남생의 둘째아들 泉獻誠, 연개소문의 고손자 泉毖의 묘가 나란히 있고, 효명제 능묘 뒤편에 셋째 아들 천남산의 묘가 있다. 당에게 협조하지 않은 둘째 아들 남건의 묘는 없다. 역사는 냉정하다.


냉정한 역사 기록을 좀 더 읽어본다.
“총장 2년 己巳(669년) 봄 2월 왕의 서자 安勝이 4천여 호를 인솔하고 신라로 갔다. 여름 4월 (당) 고종이 강회의 남쪽과 산남, 장안 서쪽의 모든 주들의 빈 땅에 (고구려 포로) 3만8천3백 호를 옮겼다.”


이렇게 포로가 돼 낯선 남의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산 사람들이 물론 고구려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구려도 한 때 이민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곤 패한 종족 사람들을 포로로 삼았을 것이다. 전쟁사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엔 이런 일이 다반사였다. 573년 11월 페르시아는 동방에서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구인 티그리스 강변의 다라를 점령했다. 또한 거의 때를 같이 하여 그들은 시리아를 침공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페르시아군은 무려 (비잔틴 제국에서) 포로를 29만2천명이나 잡아갔다고 한다. 호스로우는 투르크의 칸과 동맹을 맺을 때 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포로들 가운데서 2천 명의 아름다운 그리스도교 처녀들을 직접 골랐다. 그러나 이 처녀들은 칸의 진영에서 200여 킬로미터 떨어진 큰 강에 이르자 목욕을 하고 싶다면서 호위 병사들을 멀리 가게하고는 신앙과 정조를 모두 잃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기를 택했다(존 줄리어스 노리치, 『비잔티움 연대기』 1권 『창건과 혼란』 444쪽).


비슷한 일이 조선 중기 우리나라에서도 있었다. 1636년 12월 한 겨울에 발발한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불과 두 달을 못 버티고 이듬 해 1월 30일 仁祖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三田渡로 향한다. 이윽고 머리를 풀어 헤친 임금 인조는 受降壇 위에 오만하게 앉은 누르하치의 여덟째아들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三拜九叩頭’ 항복의 예를 올린다. 세 번 큰절을 올리는데,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바닥에 찧어대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다. 원래 조선의 식자층은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禽獸’라며 경멸했다. 심지어 청 태종 ‘皇太極’을 비슷한 음가의 ‘紅泰豕’, 즉 홍타이지라고 불렀다. ‘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인간’도 아닌 ‘야만 돼지’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남한산성에 갇혔던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굴욕적 항복을 선택한다.

그에 따라 조선의 백성들이 포로가 돼 야만족의 땅 심양으로 끌려간다. 그 과정이 얼마나 비참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최명길은 『지천집』에서 “50여만 명이 포로가 됐다”라고 전한다. 나만갑의 『남한일기』는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이며, 몽고 군대에 포로가 된 자는 포함하지 않았다”고 해 우리를 더 큰 충격에 빠트린다. 또 누가 쓴 글 인지 알 수 없는 『산성일기』 역시 “심양 시장에서 팔린 사람이 66만. 몽고에 남아있는 자는 셈하지 않았다”라고 비슷한 내용을 전한다. 후대 숙종대의 학자 李重協(1681~?)이 역대 군사관계의 자료를 모아 만든 총서인『備御考』도 “심양으로 잡혀간 포로가 60만 명인데 몽고군에게 붙잡힌 자는 셈하지 않았다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만주벌의 새로운 지배세력이 된 淸나라의 인구를 50만 정도로 추정한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싸움에 진 당나라 포로들은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이런 일은 또 있다. 앞서 노르만의 일파인 바랑고이족의 한 무리가 원 거주지인 스칸디나비아 반도(스웨덴)로부터 이동을 시작해 9세기 중후반 오늘날의 벨라루시아에서 발원 우크라이나 키예프를 관류해 흑해로 들어가는 드녜프르강 유역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을 정복 지배했다고 말했다. 피정복민인 슬라브인들이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루스’라 부른 이 푸른 눈의 야만 침입자들의 생계는 종속 원주민들에게 부과된 공납에 의존했다.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라 구태여 외부로 진출하지 않아도 그곳에서 생산되는 물품 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했다. 그러나 외부로부터 온 그들이 점거한 지역은 지형적으로 상업에 유리했기 때문에 곧바로 그들은 교환경제에 적극 참여했다. 돈 되는데 마다할 사람 없는 법이다.

아랍 상인들과 유대 상인 및 비잔틴 상인들은 루스족이 남부 러시아로 진출하기 전에 이미 이곳을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루스족은 영리 추구의 욕구에 따라 상업 활동에 뛰어들었다. 루스족이 점령한 지역은 부유하고 세련된 생활을 하는 주변 제국들과의 교역에 아주 적합한 토산품이 많았다. 설탕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아주 귀한 상품이었던 꿀, 그리고 기온이 따뜻한 남부 지방에서도 고급 의류와 의장품에 필수적으로 사용됐던 사치품인 모피 등을 광대한 산림지대에서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스족은 쉽게 슬라브족 노예들을 포획할 수 있었다. 이런 노예들은 모슬렘의 하렘(harem)과 비잔틴의 상류층 집안이나 작업장 덕택에 판로가 보장됐을 뿐 아니라 이윤도 많았다. 따라서 9세기에, 프랑크제국은 지중해가 폐쇄된 이후 고립돼 있었지만, 반대로 남부 러시아는 이 지역의 영향을 발휘하던 (아랍과 비잔티움이라는) 2개의 대시장에서 그들의 상품을 판매했다(앙리 피렌느, 『중세 유럽의 도시』, 46~48쪽 발췌).


비록 사라센에 의해 지중해 교역이 차단되다시피 했지만,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에 동방상인들이 드나들며 위험을 감수한 상업 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선박은 마르세유 부두에 화물을 하역한 뒤, 프로방스의 해안을 떠나 귀환하면서 승객은 물론이고 회송화물을 실었다. 그 화물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가능한데, 가장 타당한 추측은 화물 상당 부분이 인간 상품, 즉 노예였으리라는 것이다. 프랑크 왕국에서 노예매매는 9세기 말까지도 계속됐다. 작센, 튀링겐, 슬라브족 거주지역의 만족들과의 전쟁으로 많은 노예가 공급될 수 있었던 것 같다. 9세기에도 여전히 유대인이 열심히 종사하고 있던 노예무역은 분명 그 이전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위의 책 26쪽 발췌).


돈 앞에 인륜이나 양심은 무력하다. 최근 진도 앞바다 참사도 알고 보면 돈이 원인이다. 이런 냉혹한 현실, 이성이 무시되는 사건은 역사의 이면에 수두룩하게 존재한다.
탈라스 전투는 어떻게 벌어졌으며, 싸움에 진 당나라 포로들은 역사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 고선지 장군을 만나러 탈라스로 가는 길은 멀고 멀었다. 나중에 만나게 될 『왕오천축국전』을 쓴 慧超는 고선지보다 25년 쯤 앞서 723년 오늘날의 중국 광주를 떠나 海路로 인도에 갔다가 4년 간의 인도와 서역 순례를 마치고 727년 11월 상순 당시 안서도호부 소재지인 구자를 거쳐 장안에 돌아왔다. 어쩜 이 둘은 먼발치에서라도 조우했을지 모른다.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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