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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랑을 키우고 터전을 닦았던 도시는 과연 어디에?
그들이 사랑을 키우고 터전을 닦았던 도시는 과연 어디에?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3.1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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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 7. 유목민 塞種의 요람 이식쿨 호수와 烏孫의 赤谷城(3)


▲ 제티오구즈(일곱 마리의 황소)라는 이름의 황토 암석군. 이 일대의 수승한 풍광에 반하지 않을 이 없다. 사진 이정국

바르스콘 계곡을 따라 남쪽 길을 택해 내려가면 해발 4천의 베델 고개를 지나 중국(신장성 악수)에 이른다. 그럼 여기 바르스콘이 赤谷城일까. 위치상은 그럴 듯하다. 문제는 의미로도 소리로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곳은 없을까. 있다. 내 판단에 제티 오구즈가 오손왕의 치소 적곡성의 후보지로 적합하다

. “눈으로 미운 대상이 있고, 마음으로 싫은 존재가 있고, 머리로 이해 못할 인물이 있다.” ―정자

“연 교수,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뒷좌석에 앉아 있던 A 출판사 김 대표가 태블릿 PC를 들이민다. 세계 유수의 여행안내서에 게재된 박스 기사(the boxed text)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유괴당한 신부(The Kidnapped Bride)」. 젊은 시절 즐겨듣던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Bedřich Smetana, 1824-1884년)의 오페라 「팔려간 신부(The Bartered Bride)」가 떠올랐다. 돈에 팔리는 신부의 심경은 어떨까? 유괴당한 신부는 도대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파키스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이웃집 여자를 맘에 두고 있던 남자가 친구들과 작당해 그녀를 훔쳤다. 귀한 자식을 도둑맞은 여자의 집안에서 수소문 끝에 진상을 파악하고 남자와 그 일가를 고소했다. 법정의 판사가 여자에게 물었다. 돌아가려는가?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의 뜻과는 무관하게 납치돼 마음에 없는 남자와 살아야 하는 것이 끔찍하지만, 돌아가면 자신은 즉시 살해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선택은 ‘삶’이었다. 남자의 손을 탄 여자가 있다면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아버지나 남자 형제나 그 누군가가 그녀를 죽이는 것이 그 사회의 불문율이다. 뿌르다(Purdah, ‘curtain’)라는 여성 격리의 전통에 뿌리를 둔 잔혹한 종교, 사회제도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21세기 대명천지에 ‘명예살인(honor killing)’이 끈덕지게 자행되는 배경이다.


1991년 이후 법적으로 금지됐다고는 하나 키르기즈 유목민 사회에 여전히 ‘약탈혼’의 악습이 남아있다고 한다. 마음에 드는 처자를 납치해 강제로 아내로 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보쌈이라는 게 있었다. 남자를 보쌈하거나 유괴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문제는 왜 이런 야만스런 일이 존재하는가 하는 점이다. 여자가 넘친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남자가 돈이 많거나 학식, 인물, 집안 배경 등 매력이 있다면 구태여 여자를 몰래 훔치지 않을 것이다. 신부 측에서 신부값을 요구하는 전통이 존속되는 한 가난한 남자의 선택은 신부 훔치기가 유일하다. 성공만 한다면 신부 납치는 혼인 비용을 대폭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페트르 롬(Petr Lom)이라고,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 있는 유럽중부대학교(Central European University)의 교수가 있는데, 이 사람이 우리가 곧 가게 될 키르기즈스탄 제2의 도시 오시(Osh) 외곽 지역에서 이런 ‘약탈혼’ 광경을 목격했는데요. 글쎄 Norkuz라는 25세 노처녀가…” “Sto-o-p!” 잘난 척하는 내 설명을 멜론 자르듯 유 사장이 잘랐다. “날 더우니 멜론이나 먹고, 그 얘긴 오시에 가서 듣자구요.” 하긴 날이 지독히 무덥고 건조했다. 그리고 그 동네 멜론은 달고 부드럽고 물이 기막히게 좋았다. 양들도 멜론을 좋아한다.
양은 유목민의 생활 그 자체다. 식량이 되고, 거처의 재료가 되고, 의복이 된다. 어린이의 놀이 친구가 되기도 한다. 양 가죽의 용도도 다양하지만 털은 카펫과 천의 주요 재료다. 우리나라 여자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성들이 좋아하는 모직물 캐시미어(cashmere)는 인도 북서부 산악지대 카시미르(Kashmir)의 와전된 글자요 발음이다. Kashmir에서 ‘-mir’는 ‘고지대, 고원’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Kash’는 무슨 뜻일까. 월지의 이동과 관련해 아주 중요한 단어임을 염두에 두자.


카시미르 역시 고래로 유목민의 요람이었다. 바까르왈과 같은 카시미르 유목민들은 일 년에 한 번씩 양과 염소 등 가축 떼를 이끌고 해발 4천 미터의 피르판잘 고개를 넘어 스리나가르를 오간다. 생사를 넘나드는 한 달 여의 험준한 고산여행이다. 눈 쌓이고 바람 심한 산악길이라 짐승은 물론 사람도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기 십상이다. 이들이 기르는 양의 털을 가공해 만든 천이 캐시미어다. 이 중에서도 최고의 캐시미어 양모와 그 천을 빠시미나(pashmina)라고 한다.


빠시미나라는 이름은 인도말 Pashmineh (پشمین)에서 왔는데, 여기서 pashm은 ‘wool’이라는 뜻이다. 빠시미나 중 최고의 것은 Pashmina goat라 부르는 특별한 염소 창탕이(changthangi)의 털(주로 목과 가슴 주위)로 만든 것이다. 이 염소는 주로 네팔, 파키스탄, 북인도의 히말라야 고산 지대에 서식하고 있다. 카시미르의 주도 스리나가르의 카펫 상점과 북인도 히말라야 산자락의 휴양도시 마날리의 한 가게에서 질감이 빼어나고 가볍기가 종잇장 같은 이 빠시미나 숄을 만져보고 나는 망설임 없이 넉넉한 수량을 구입했다. 사실은 젊은 주인의 매력적인 상술에 혼이 나간 것이다. 중국인, 아랍인, 유대인의 상술이 빼어나다지만 여기 카시미르인의 장사 수완 역시 대단하다. 과거 소그드인의 피를 물려받은 것으로 본다. 소그드인에 대한 궁금증은 좀 더 뒤에서 해결하기로 한다.


양모와 관련해 색종의 요람, 월지와 오손이 이주해 살던 이식쿨 일대는 어떨까. 영어로 ‘caracul[kæ´r??k??l]’이라 불리는 중앙아시아산 양과 그 모피, 그리고 그 양털로 짠 직물 명칭이 있다. 이는 현 우즈베키스탄 부하라 주의 Qorako‘l에서 그 이름을 따온 Karakul 혹은 Qaraqul 羊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천산과 파미르 일대에 카라쿨(karakul or karakol, ‘검은 호수’라는 뜻)이라는 지명은 많다. 이식쿨 동변에도 카라쿨이 있고, 톡도굴 지역에도 카라쿨이 있으며, 파미르고원이 천산 및 쿤룬(崑崙)과 만나는 지점에서 멀지 않은 곳에도 해발 3천600m의 카라쿨도 있다. 카시가르 관광 시 필수 코스다. 세계의 지붕 이 일대는 당연한 얘기지만 고래로 양 유목이 이뤄졌다. 그리고 드넓은 초원의 무공해 풀들을 먹고 자란 스트레스 없는 양들의 털은 품질이 매우 우수할 수밖에 없다. 양들을 돌보는 키르기즈 남정네의 눈동자는 호수의 물빛 닮아 비취빛 푸른색이다.

호수의 물빛 닮아 비취빛 푸른색 눈동자를 한 키르기즈의 남자들
우리네 수많은 성씨 중 양천 이씨의 조상은 色目人이라고 한다. 색 없는 눈이 있을까 만은 색목인은 검은색이 아닌 푸른 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애초 단일 혈통만으로 구성된 사회는 없으므로 다양한 인종의 混居가 하나의 사회 속에 이뤄지는 것이 정상이요 자연스런 일이다. 검은 눈이 주종인 우리나라에 눈 푸른 색목인은 오늘날처럼 따돌림을 당했을까.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앞서 바이칼 호수 서쪽에 살던 키르기즈인의 조상격인 隔昆이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의 집단이라고 했다. 돌궐인의 특징에 대한 묘사에서도 똑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돌궐인 모두가 아닌 지배집단 아시나씨족의 모습에서 그런 특징을 보았을 것이다. 烏孫 역시 푸른 눈에 붉은 머리의 집단이라고 중국의 史書는 전한다(烏孫於西域諸戎其形最異 今之胡人眼, 赤須, 狀類彌者, 本其種也). 그렇다면 이들은 전혀 별개의 종족일까. 다른 종족 중에는 이런 특징을 가진 집단이 없을까. 역사의 미스터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좀 더 꼼꼼한 조사와 인내가 필요하다. 시간 역시 필요하다. 사실 烏孫도 일리계곡과 이식쿨 호수 일대로 이주하기 전에는 현 중국 국경의 북서부(돈황과 치렌산 사이 숙주 북부의 Sobo Nor와 Sobok Nor 지역, 아니면 그보다 약간 더 남쪽, 혹은 돈황 근처 과주의 서쪽)에 살았다. 이들의 이주는 자발적 선택이 아니라 흉노의 침공에 의한 부득이한 결정이었다.


▲ 사진 속 키르기즈 전통 펠트 모자를 쓴 노인이 손자를 안고 있다.사진 이정국
『漢書』 西域傳 烏孫條에 의하면, 오손왕의 처소는 赤谷城이었다. 과연 알타이 서쪽과 천산이북의 드넓은 초원과 강과 호수, 산악지역을 무대로 한나라와 흉노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친 오손의 왕이 머물던 治所 赤谷城은 어디였을까. 먼저 적곡성이라는 지명이 현지어의 소리를 옮긴 말인지 뜻을 풀어 한자로 기록한 것인지를 알아야 위치 파악이 쉽다. 중국 측 사서에서 보이는 수많은 지명, 인명이 현지의 말을 한자음을 빌려 표기하고 있기에, 유독 赤谷城의 ‘赤谷’만이 ‘붉은 계곡’이라는 의미의 말이라 하기는 곤란하다. 물론 이식쿨을 ‘熱海’라고 訓借한 경우도 있기는 하다. 또 파미르 고원을 뜻으로 적어 ‘蔥嶺’이라 하고, 소리를 옮겨 ‘伯米爾’, ‘蕃密’ 등으로 전사하는 경우도 있다.


천산산맥 베델 고개(the Bedel Pass, 해발 4천200m)는 현 중국 신장성과 키르기즈스탄을 연결하는 고개로, 과거에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간의 실크로드 무역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 신장성 악수(Aksu)에서 이 고개를 넘으면 이식쿨의 남쪽 호반의 마을 바르스콘(Barskon)에 이른다. 이 이름은 종족 이름이기도 한데, C. E. 보스워츠에 의하면, 아주 옛날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페르시아의 왕자가 투케스탄(Tukestan)에 와서 정착해 살며 그곳의 지배자가 됐고, 사람들은 그를 Pārsi-khwān이라고 불렀다. 이는 페르시아어로 ‘학식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말인데, 세월이 흐르며 Barskhan 등으로 축소됐다고 한다.

바르스콘은 군사 기지로 시작해, 트레킹과 승마, 폭포로 유명한 바르스콘 계곡(the Barskon valley) 초입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서쪽으로 탐가 타시(Tamga-Tash)가 있는데 이는 3~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불교 명문(tamga)이 새겨진 바위(tash)가 있기 때문에 생긴 마을 이름이다. 고대 카라반들은 이곳 바르스콘에서 동과 남, 즉 중국과 인도로 길을 잡아 떠났다. 아직도 남아있는 카라반세라이(caravanserai, 대상숙소) 유적이 과거의 증거다. 11세기 학자로 당시 이슬람제국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에 거주하며(1072~4년) 최초로 투르크 諸語 비교 사전을 쓴 마흐무드 알 카쉬가리(Mahmud Al-Kashgari)는 이곳 태생이라 바르스카니라고도 불렸다. 그가 그린 세계 지도의 중심에는 바르스콘이 있었다. 그의 무덤은 카쉬가르 남쪽 파키스탄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바르스콘 계곡을 따라 남쪽 길을 택해 내려가면 베델 고개(해발 4천284m)를 지나 중국(신장성 악수)에 이른다. 도중에 최초의 우주인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에 성공한 후 이식쿨 호수 남쪽 호반에서 휴가를 보낸 것을 기념해 만든 가가린 흉상을 볼 수 있다. 그럼 여기 바르스콘이 赤谷城일까. 위치상은 그럴 듯하다. 문제는 의미로도 소리로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곳은 없을까. 있다. 내 판단에 제티 오구즈(Jeti-Ögüz:'seven bulls’)가 오손왕의 治所 赤谷城의 후보지로 적합하다.


이식쿨 주 제티 오구즈 구의 중심은 키질수(Kyzyl-Suu: 구 소련 때 이름은 Pokrovka). 이식쿨 호 남동 내륙으로 10km 정도 떨어져 있으며, 제티 오구즈 리조트와 바르스콘 사이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이 일대가 2천여 년 전 赤谷城이 있었던 곳이라고 생각이 드는 이유는 바로 이 마을이 Chong Kyzyl-Suu (‘little red water’) 강과 이 강이 이뤄내는 분지의 시원지에 위치한 때문이다. 작은 赤水(Chong Kyzyl-Suu)에서 시작해 마침내 큰 赤水인 Kyzyl-Suu로 흘러내리는 강. 황하나 루비콘(the Rubicon) 강처럼 비가 많이 와 강수량이 많아지면 주변의 붉은 토양 때문에 강물이 붉은 흙탕물이 되는 데서 키질수라는 이름이 생겼다. 이 주변에 赤谷城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토양이 적토임은 키질수를 포함한 제티 오구즈 지역 산악 트레킹의 출발점이자 옐친 별장으로 유명한 관광명소 제티 오구즈 리조트 초입의 웅장한 황토 암석군을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그 생김새가 체격 늠름한 황소 7마리가 나란히 서있는 것 같다 해서 ‘Jeti-Oguz’란 이름이 붙었고, 이것이 곧 지역 이름이 됐다. 과거에는 그저 키질수 계곡이었을 것이다. 이 말의 뜻을 한자로 옮기면 ‘赤谷’이 된다. 오늘날의 제티 오구즈구에는 나린 강, 사리자즈 강, 바르스콘 강, 제티 오구즈 강 등이 흐르며 이식쿨 계곡, 上 나린 계곡, 악 시이락 계곡을 형성하고 있다.

 
과연 赤谷城의 위치가 우리의 생각과 부합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漢書』陳湯傳의 기록이 도움이 될 것이다. 기원전 36년 서역도호 감연수(西域都護 甘延壽)와 부교위 진탕(副校尉 陳湯)이 漢兵胡兵 도합 四萬餘人을 이끌고 오손 북서 康居의 땅(추 강과 탈라스 강 일대)에 망명해 있던 흉노 질지(???支) 선우를 토벌하러 갈 때의 노정 부분이다. 질지는 흉노 분열 시기 다섯 선우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호한야 선우와의 쟁패에서 밀려 서쪽으로 달아나 강거로 가서 그곳을 지배하며 한나라에 대항했다.

오손의 운명에 철퇴를 가한 초원의 새 강자 유연
“그날로 군대를 이끌고 나누어 행군하는데, 六校로 구별해 그 三校는 남도를 따라 총령(파미르고원)을 넘어 大宛을 지나고, 다른 三校는 (서역)都護(의 치소)에서 溫宿國(오늘날의 악수 일대)으로 가서 그곳을 출발해 북도를 따라(천산산맥 베달 고개를 넘어) 赤谷으로 들어가 烏孫을 지나 康居와의 境界를 건너 池(전지, 즉 이식쿨)의 서쪽에 이르렀다. 이때 강거의 副王 抱이 將帥와 수천 기병을 이끌고 赤谷城 동쪽을 침략해 (오손) 大昆彌의 백성 千餘人과 수많은 가축을 살육했다. …… 진탕이 胡兵을 풀어 그들을 공격해 460인을 죽이고, 사로잡힌 (오손)民 470명을 구해 대곤미에게 돌려주고, 말과 소, 양은 군량으로 삼았다. 또 (부왕) 포전과 貴人 伊奴毒을 포로로 잡았다.” 필자의 추정대로 고대 기록상의 赤谷城이 오늘날의 이식쿨 호수 동남쪽 키질수(赤水) 일대라면 오손은 이곳에 대곤미의 왕성을 두고 수백 년 간 아니 천년 넘게(요나라 때까지) 존속했다. 그 역사는 나름대로 곡절이 많았다. 왕위를 둘러싼 혈육 간의 갈등, 漢族 출신 왕비에 대한 오손 남자의 욕망, 그리고 漢나라와 흉노 사이에서의 정치 외교적 줄다리기 등 현대를 사는 우리가 과거를 통해 배워둘 대목이 많다. 천백여년 역사의 비잔틴 제국이 서서히 작아지듯이 오손도 점차 세력을 잃었다.


철천지원수 월지를 몰아내고 과거 塞種 땅의 새로운 주인이 된 아시족이 세운 나라 烏孫. 유목왕국으로서의 烏孫의 운명에 철퇴를 가한 것은 초원의 새로운 강자 柔然이었다. 영원한 것은 없다. 柔然의 힘은 글자 그대로 부드러움 이었을까.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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