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旅路에 듣는 엄숙하고도 구슬픈 마나스치 암송 … 그것은 어떤 바람소리인가
旅路에 듣는 엄숙하고도 구슬픈 마나스치 암송 … 그것은 어떤 바람소리인가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5.28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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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13. 키르기즈인의 민족 서사시, 마나스(Manas)

 

▲ 키르기즈인의 민족 영웅 마나스 동상. 사진 이정국

마나스가 다루는 시기가 10세기가 됐든 그 이후가 됐든, 투르크어의 한 지파인 키르기즈어로 구전되는 이 방대한 서사시에는 무수한 인물과 종족, 산하, 자연물의 명칭이 존재한다. 키르기즈스탄 여행길에 듣는 마나스치의 암송은 때론 서글프고 경쾌하며 때론 엄숙하다. 시종 비장한 선율 속에서는 민족적 자부심이 느껴진다.

“인간은 얼굴을 붉히기도 하며, 혹은 붉힐 필요가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마크 트웨인

탈라스 전투가 벌어진 해(751년)가 문명교류사의 관점에서 그렇듯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연도가 있다. 1492년은 콜럼버스가 신대륙 탐험을 떠난 해다. 조선에서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1443년, 반포는 1446년)한 지 50년 후의 일이다. 그가 대항해를 꿈 꾼 계기가 됐고 험난한 대서양 파도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눈을 빛내며 읽었던 책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Queen of Castile, 1451~1504)에게 청을 해 대서양을 건널 배를 얻었다. 콜럼버스와 동갑인 가톨릭 군주 이사벨라 여왕은 바로 그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여장부다.

남편인 아라곤의 왕 페르디난드 1세(Ferdinand I, King of Aragon)와 함께 그라나다의 사라센을 축출한 것이다. 콜럼버스는 당시 해상 무역을 놓고 베네치아와 치열하게 경쟁하던 제노바 사람이었다. 필자보다 700년, 콜럼버스보다는 197년 앞선 1254년에 태어난 마르코 폴로는 베네치아 출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의 베네치아는 아니다. 어딜까?


폴로 가문의 세 남자, 즉 마르코 폴로(Marco Polo)와 아버지 니콜로(Niccolo), 삼촌 마페오(Maffeo)의 출신지는 오늘날 아드리아해에 면한 크로아티아의 섬 코르출라(Korˇcula)다. 1254년에 태어나 17세에 아버지, 삼촌과 함께 동방으로 떠났다가 大元제국의 궁정에서 머무는 등 장장 24년간의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마르코 폴로는 44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베네치아-제노바간의 해상권 전쟁(1298년)에 참가했다가 18개월이나 제노바 감옥에 투옥된다. 동방견문록은 여기서 탄생한다. 개인에게는 불행이지만, 문명사적 관점에서는 행운인 이 사건의 배경인 海戰이 벌어진 지역이 바로 코르출라 섬 일대다.


1298년 9월 9일 제노바와 베네치아 함대 간에 벌어진 ‘코르출라 해전’은 13~14세기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간 지중해와 레반트 무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전쟁 중 하나다. 이 전투는 (현재의 크로아티아) 남부 달마시아 해상, 정확히는 코르출라 섬과 본토의 사비온첼로 반도(Sabbioncello Peljeaˇsac) 사이의 해협에서 벌어졌다. 베네치아 해군을 이끈 인물은 지오반니 단돌로 총독의 아들 안드레아 단돌로, 제노바군의 우두머리는 람바 도리아(1245~1323) 제독이었다. 양군의 함대 수는 거의 같았지만 도리아 제독이 뛰어난 전술로 적인 베네치아 함대에 철저한 패배를 안겼다. 그 결과 베네치아의 함선 95척 중 89척이 파괴되고 도날드(즉 단돌로) 제독을 포함한 7천명의 병사가 전사하고 7천400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대다수가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됐는데, 마르코 폴로는 꽤 오랜 시간을 제노바의 감옥에 갇혀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거기서 피사 출신의 루스티켈로라는 남자를 만나 베네치아를 떠나 원나라 궁정에서 쿠빌라이 황제와 함께 보낸 17년간의 세월을 포함한 총 24년 동안의 사정을 구술하고 루스티켈로가 기록함으로서 『동방견문록』이라는 위대한 저술이 탄생하게 됐다. 1299년 프랑코 이탈리아어로 쓰인 최초의 판본 완성 직후 마르코는 출소한다. 원제목은 『세계의 記述』,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은 일본이 번역하며 붙인 것이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 해의 코르쿠라(Corcyra, 오늘날의 Corfu)섬 출신의 그리스인들이 코르출라섬에 이주해 와 ‘Melaina Korkyra’ (‘Black Corfu’라는 의미)라는 이름의 작은 식민지를 건설하고 정착해 살기 시작했다. 섬의 이름이 코르출라가 된 것은 미국에 식민지를 건설한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모국 이름을 본 따 그 지역 이름을 ‘New England’라고 하거나, 신대륙을 발견한 화란인들이 자신들의 고향 마을 이름을 따서 ‘New Zealand’라고 명명한 것이나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6~7세기 야만인으로 간주되던 슬라브족과 아바르족(Avar)이 달마시아 해안지대에 정착을 시도하면서 그곳에 살던 로마화된 지역 주민들은 바다건너 섬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크로아티아계 슬라브 민족들이 아드리아해로 유입되는 달마시아 해안의 네레트바 강(the Neretva) 유역과 코르출라섬을 장악했다.


12세기에 이르러 코르출라는 베네치아의 귀족 페포네 조르지(Pepone Zorzi)에 의해 정복당하면서 베네치아 공화국에 병합됐다. 일시 헝가리와 제노바 공화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결국 1255년 마르실리오 조르지(Marsilio Zorzi)가 이 섬을 완전 정복하고 다시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하에 들게 했다. 서방세계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몽골초원에서는 9세기에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했던 키르기즈인들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밀려 알타이 너머 천산 북방의 중가리아 분지로, 일리 초원으로 이주하게 된다. 오늘날의 키르기즈스탄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다.


구 소련에 의해 ‘키르기즈인(Kyrgyz)의 땅’이라 이름 붙여진 ‘Kyrgyzstan’은 사실 120여 민족이 혼재하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다. 엄밀한 의미에서 저마다의 언어와 풍속 습관, 문화와 전통을 지닌 서로 다른 종족들이 투르크 국가라는 하나의 政治體制안에서 사회, 문화, 언어의 조화와 융합을 꾀하는 하이브리드 사회인 셈이다. 이런 사정은 같은 ‘Turkestan(돌궐족의 땅)’에 속한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거듭 말해 오늘날 키르기즈스탄 초원과 산악 지역의 주인공은 키르기즈족이 아니었다. 오손과 강거가 살았고, 색종이 자리 잡고 유목생활을 했다. 이곳에 기원전 2세기에 월지의 서천을 시발로 흉노가 이주하고 돌궐이 들어왔다. 17세기에는 서부 몽골에 해당하는 오이라트(Oirat) 제 부족이 청나라 황제 강희제의 서역정벌에 밀려 중가리아를 떠나 카자흐 초원에 칼묵(Kalmyk)이라는 이름으로 칸국을 건설하며 지역의 맹주가 됐다. 키르기즈인도 원래 이 땅에 살던 종족이 아니었다. 이들의 고향은 먼, 그러나 스텝으로 연결돼 있어 常時 이동이 가능한 바이칼 호수 서쪽의 삼림지대였다. 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當地에 이르게 됐을까. 키르기즈인의 민족 영웅 서사시 『마나스』에 그들의 고단한 이주 노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창조적 인류 구전 전승의 縮圖라 할 수 있는 『마나스』는 키르기즈 민족이 세계 최고라 자부하는 영웅 서사시다. 유목민족인 키르기즈인은 문자가 없었고, 자신들의 전통과 문화, 역사를 서사시라는 형태로 미래와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을 택했다.

▲ 마르코 폴로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크로아티아 코르출라 섬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Korcula_City.jpg

키르기즈스탄에서는 해마다 ‘마나스 축전’이 열린다. 5일간 진행되는 이 행사는 전설상의 영웅 마나스의 고향이라 여겨지는 북부 산악 지역 탈라스에서 개최된다. 이곳 알라투 산속에 마나스가 묻혀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웅 마나스에게 바치는 상징적 기념 축제를 통해 키르기즈인들은 자신들의 고대 유목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자랑스레 펼쳐 보인다.


현재까지 다수의 마나스치(manaschi, 마나스 암송자)를 통해 채록한 마나스 버전은 대략 65종에 달한다. 그 중 가장 긴 버전은 大마나스치 중 한 사람인 故 사이악바이 카랄라예프(Saiakbai Karalaev, 1894~1971)에 의한 것으로 총 50만553행에 달하는 분량이다. 이는 길이에 있어 호머의 서사시 『일리어드』(1만5천693행)와 『오딧세이』(1만2천110행)를 합친 것의 18배, 인도의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Mahabharata)』의 두 배 반에 버금간다. 티베트 서사시 『게사르 왕(King Gesar)』보다도 길다. 마나스는 방대한 분량보다 거기 사용된 시적 언어와 그 안에 담긴 키르기즈 민족의 풍부한 역사, 문화, 종교 관련 내용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예로부터 유목민족인 키르기즈인들은 돌궐, 위구르, 칼묵, 여진, 거란 등 다른 종족들과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증거 할 문헌 자료는 부족하지만, 분명 흉노, 월지, 오손, 선비, 중국 등과도 전쟁을 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쟁에서 지게 되면 패한 세력은 정주지를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이주를 결행할 수밖에 없고 이런 상황 하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끌고 지켜줄 영웅을 고대하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이 『마나스』에서도 나타난다.


『마나스』에는 이산과 수탈, 핍박의 환난에 처한 키르기즈인들을 재결합시키고 보호해줄 영웅으로 자킵의 아들 마나스가 예언되고 출현한다. 중앙아시아 서사문학에서 영웅은 죽지 않는다. 때문에 마나스는 아들 세메테이에 의해, 그리고 세메테이는 또 자신의 계승자인 아들 세이텍을 통해 대를 이어 키르기즈인들을 이끌고 보호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마나스는 영원하며, 영웅의 역할은 손자인 세이텍으로 끝나지 않는다. 현존하는 최고의 마나스치 중 한 사람인 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이른바 동 투르케스탄)의 유수프 마마이(Yusup Mamai)는 17代까지 암송하고 있다. 서사시 『마나스』는 마나스와 그의 후손 및 추종자들의 이야기를 키르기즈족의 역사와 결부시켜 다룬 일종의 설화다. 키르기즈의 모든 부족과 거란제국 지배하의 오이라트 부족들 간의 전투가 중심 테마를 이룬다. 3부로 구성된 『마나스』는 과거 키르기즈인의 위대한 칸들의 칭송에 뒤이어 거란 황제의 명령에 따르는 토루가트, 칼묵 등의 오이라트 부족과 만주족의 침입으로 인한 살육과 파괴, 그리고 그로 인한 곤경으로 내러티브를 시작한다.


“알로케칸이 침략했을 때 / 우리 족장들은 어찌할 줄을 몰랐다 / 아르긴과 키르기즈는 절망에 빠졌다. / 노이구트족의 악발타와 자킵칸 등 / 카라한의 여덟 아들들은 / 서둘러 부족회의를 소집했다. / 위룰모 습지 언덕에 모여 / 끝없이 끝없이 절망하며 / 회의를 진행했다.”(ll. 500~ )
“그들 침입자들은 우리 키르기즈 사람들을 / 사로잡아 노예로 만들고 /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다. / 알티-샤르로부터 마르길란까지 / 코칸드에 이르는 모든 곳에 / 재앙을 가져왔다. / 부하라와 사마르칸드에서 조차 / 백성들은 살육되고 도시들은 파괴됐다. / 우리 키르기즈 사람들은 / 알로케칸에게 무릎을 꿇어야했다.”(ll. 890~)


키르기즈인들은 몰토 칸(Molto Khan)과 알로케 칸(Al¨o¨oke Khan)이 이끄는 키타이 침략자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유랑의 험로에 오른다. 원치 않는 이주의 결과로 일부는 알타이 산악지대로, 항가이 산맥으로, 로마로, 크리미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자킵과 키르기즈의 부족장들은 백성들을 이끌고 천산 북단 알라투를 거쳐 수차례 이주의 길에 오른다. 무력한 키르기즈인들은 결국 칼묵과 토루가트 등 오이라트 부족들의 본거지인 알타이에서 유배의 삶을 살게 된다. 때로 용감한 부족장이 나타나 저항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거기서 오랜 기간 칼묵인들의 지배를 받으며 독립을 꿈꾼다. 마침내 오랜 기도의 응답으로 노인이 된 자킵의 늦둥이 아들로 마나스가 태어나면서 키르기즈인들의 운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칼묵 등 4부족 연맹체인 오이라트의 칸은 키르기즈인들을 압제에서 해방시킬 어린 전사 마나스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잡아 살해하고자 한다. 위기를 모면하고 마나스는 자신의 종족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데 성공하고 마침내 칸으로 선출돼 적과 대결을 벌이게 된다. 마나스는 중가리아 남쪽 변경에 자리 잡고 있던 위구르와 결탁해 세력을 확장한다.


마나스의 출현으로 희망과 용기를 얻은 키르기즈인들은 알타이를 넘어 오늘날의 키르기즈스탄 산악 지대에 있는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친구 40인을 이끌고 주변 종족들에 대한 정복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마나스는 남방의 아프간 사람들과 동맹관계를 수립하고 부하라 국왕의 딸과 혼인을 맺으며 河中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키르기즈스탄 정부는 1995년 마나스 탄생 1천週年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키르기즈인들의 마음속에 동일 명칭의 서사시의 주인공 마나스가 995년에 태어난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10세기라는 시기는 시라무렌(Xira Muren, 湟水) 일대를 거점으로 하던 거란족이 만주의 패자 발해와 그의 屬臣 세력이던 여진 등 다수의 집단을 제압하고 만주와 長城 이북, 나아가 몽골 초원의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던 때다.


마나스가 다루는 시기가 10세기가 됐든 그 이후가 됐든, 투르크어의 한 지파인 키르기즈어로 구전되는 이 방대한 서사시에는 무수한 인물과 종족, 산하, 자연물의 명칭이 존재한다. 페르시아와 아랍의 영향을 받은 흔적도 발견할 수 있다. 이슬람 전파의 흔적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 유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키르기즈인의 삶속에 살아 숨 쉬는 고유의 신앙과 민속의 모습도 엿보인다. 키르기즈스탄 여행길에 듣는 마나스치의 암송은 때론 서글프고 경쾌하며 때론 엄숙하다. 시종 비장한 선율 속에서는 민족적 자부심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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