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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와 늑대가 돌본 종족 … 그들의 역사무대는 언제였을까?
까마귀와 늑대가 돌본 종족 … 그들의 역사무대는 언제였을까?
  • 연호택 관동대 영어학
  • 승인 2014.02.18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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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 5. 유목민 塞種의 요람 이식쿨 호수와 烏孫의 赤谷城(1)

▲ 이식쿨 호수와 그 주변 천산의 풍경이다. 이식쿨(Issyk Kul[K¨ol])은 키르기즈스탄 동부 천산산맥 북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내륙해로 해발고도 1천600m, 카스피해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鹽湖다. 크기로는 세계 10번 째. 사진 권오형

 “부드러움보다 강한 것은 없다. 그리고 진정한 힘보다 부드러운 것은 없다.”
―Ralph W. Sockman

한 여름. 송쿨의 밤은 잔인했다. 해발 3천16m. 일교차가 심할 것을 예상해 품질 좋은 침낭에(새로 샀다!) 수면 양말, 모자와 장갑 등 최선을 다해 예비했지만, 유르타(yurta, 유목민 텐트) 틈새로 침입하는 추위는 지독했다. 잠을 자도 잔 게 아니었다. 어서 아침이 오고 햇살이 나기만 기다렸다. 한 유르트를 쓰는 일행의 코 고는 소리는 들어도 들리지 않았다.


긴 밤 끝에 이윽고 날이 밝고, 새벽 댓바람에 밖으로 나간 각각의 나는 소리 없이 탄성을 질렀다. 아름다웠다. 오롯이 아름다웠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설산 히말라야도 비경이지만, 여기 白頭의 天山에 사방이 에워싸인 하늘호수 송쿨은 장엄했다. 즐겁게 놀란 가슴이 서늘한데, 그 느낌을 평생 가져가고만 싶다. 냉방 지옥의 추억은 후일 송쿨을 회상하기에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었다.


기약 없는 게 인간의 바람이어늘… 다시 오리라 다짐하고 카라쿨로 향하는 가슴에는 초원의 바람이 들었다. 오늘 만날 카라쿨은 또 얼마나 아름다울까. 수년 만에 다시 맞대할 이식쿨은 필경 사람의 마음에 기분 좋은 파문을 일으키리라. 이래서 여정은 즐겁다. 일상을 벗어나 길 위에 서는 기쁨이 이런 데 있다.


이식쿨 호수. 그 일대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안 가본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고, 그러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아예 말도 하지 말 일이다. 칸 텡그리 탁(Khan Tengri Tag, 天王峯)를 위시해 사방이 눈으로 덮힌 天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이곳은 천혜의 방목지요, 때문에 지상 낙원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다. 산, 바람, 물, 공기만 좋은 것이 아니다. 여름이면 가지가 부러져라 열매가 매달린 살구나무, 사과나무 등 과수 또한 풍부하다. 물론 여기 사과(alma,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타(Almata or Almaty)는 ‘사과(alma) 아빠(ata)’라는 말이다)는 크기도 작고 우리의 것에 비해서는 맛도 없다.


하지만 그런 것이 대수인가. 물끄러미 호수를 바라보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행복감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이곳. 눌러 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다시 말하자면, 도연명의 무릉도원, 『잃어버린 지평선(The Lost Horizon)』에서 그리고 있는 샹그릴라(Shangri-la)와는 다른 차원의 순수 자연이 선사하는 경이로운 선물이 바로 이식쿨과 그 일대 초원 산간지역이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열해의 비밀
천산에 둘러싸여 있지만 겨울에도 얼지 않는 까닭에 중국 사서에 熱海라고 기록돼 있고 이식쿨이라는 이름 또한 그런 의미-warm lake-라고 하지만, 나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는 물에 짠맛이 있다고 해서 함해(鹹海)라고도 했다. 14세기 중반 유럽과 아시아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흑사병(the Black Death), 그 大疫病의 시발점을 여기 이식쿨로 보는 역사학자들이 많지만 이 또한 근거가 미흡하다고 믿는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상인이나 여행자들이 이곳 초원지대에서 체류하는 중 해충에 감염됐을 가능성을 얘기하나, 그런 일이 왜 꼭 여기이어야만 하는가.


2007년 키르기즈 과학 아카데미 부원장 블라디미르 플로스키흐(Vladimir Ploskikh)가 이끄는 역사학자팀이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식쿨 호수 가장자리 얕은 곳에서 2천500년 전의 거주지를 포함한 선진문명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수집된 고대 유물 자료를 분석한 결과 당시 고대 도시는 수 평방킬로미터의 메트로폴리스 수준이었으며, 길이가 500m 정도 되는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던 것으로 파악됐다. 또한 쿠르간(kurgan)이라 불리는 스키타이 특유의 분묘도 발견됐다. 이 일대는 월지와 오손이, 그리고 후일 흉노가 침래하기 이전 이미 스키타이―중국 측 기록의 塞種―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殊勝한 자연환경 때문에라도 유목민들이 이 주변으로 몰린 건 너무나 당연하다. 이들은 그저 부모가 하던 대로의 삶을 살았다. 이름이나 영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살았다. 자연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이 일대의 유목민들을 정확히 알지 못하던 당시 중국인들은 구전으로 전해들은 부정확한 지식과 말로서 그들에 관한 정보를 전하고 기록으로 남겨놓았다. 왜곡의 가능성은 있으나 그나마 고마운 일이다.
塞種이 바로 이들이다.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인도 사람들은 이들을 각각 Scythai, Skudat, Sacae, Sakya(釋迦族) 등으로 기술했다. 유라시아 초원에 사는 유목민들에 대한 총칭인 셈이다. 물론 사정이 허락하는 한 보다 세분화된 명칭으로 그들을 구분하기도 했다. 이른바 중화의 틀에 갇힌 한족 정권이 자신의 외곽, 특히, 중국 동북방 만주 일대에 살던 野人(야만 집단)을 도매금으로 靺鞨로 총칭하고, 白頭山 일대의 집단은 白山말갈, 黑龍江 일대를 거점으로 하던 말갈은 黑水말갈, 松花江(숭가리강)을 따라 살던 말갈은 粟末말갈 등으로 지역이나 어떤 특징에 따라 구별하던 것과 마찬가지다. 발해의 건국주 大祚榮은 고구려의 지배를 받던 속말부 말갈의 추장 乞乞仲象(처음부터 大仲象이 절대 아님)의 아들이었다.

 

▲ 맛있어 보이는 이 둥근 빵은 신장 위구르자치주에서부터 터키, 이집트까지 어디에서나 유목민들의 주식인 난(논)이다.

흉노도 그랬고 월지도 그랬으며 후일의 鮮卑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원 제국으로서의 흉노가 떠난 자리. 탁월한 지도력을 갖춘 선비족 출신의 걸출한 영웅 檀石槐가, 만주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지배했던 흉노의 자리를 대체하고 거대한 초원 부락 군사연맹체를 구축했다. 그러나 그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그의 제국은 급속히 와해됐다. 지도자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다행히 단석괴의 후손인 선비족 大人 가비능(軻比能)(원세조 쿠빌라이와 발음이 유사하다)이 여러 戎狄들을 제어하면서 흉노의 옛 땅을 모두 수용해 운중, 오원 이동으로부터 요수에 이르기까지를 모두 선비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요새를 넘나들며 노략질을 일삼아 유주, 병주의 중국인들이 시달림을 당해야 했다(『三國志』「魏志」 烏桓鮮卑列傳). 그러나 실제로 그는 오르도스 일대만 거점으로 삼았을 뿐이다.

이 무렵 중원의 晉은 허약하고 내분이 심했으나 북방에 흉노군이 버티고 있었다. 이렇게 북방은 북방대로 소용돌이가 일고 장성 南쪽에서는 後漢 말 어지러운 중원의 三國時代를 지나 五胡十六國이 상쟁하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4세기 河北에 작은 나라 代國을 세웠다가 나중에 魏(스스로는 大魏)로 개칭한 탁발부 선비가 등장하며 북중국은 통일된다. 선비라는 이름은 연맹체의 명칭이다. 그 하위에 탁발 말고도 독발, 우문, 모용, 단 등의 部가 존재했다. 월지를 서쪽으로 떠나가게 하고, 천산 자락과 이식쿨 주변, 일리하 草原을 무대로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집단을 烏孫이라 부른 것도 그런 연맹체의 대별화된 명칭인 셈이다. 오늘날로 치면 國名에 해당한다. 오손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종족들이 무리지어 살았을 것이다. 여기는 워낙 넓은 지역이다. 김 서방이 마실을 가려해도 말 타고 몇 십리는 가야 이 서방 유르타를 만나는 그런 곳이다.

그런데 왜 烏孫일까? 기원 전 2세기(중국 漢武帝 時) 그 나라 왕 곤막은 아버지(난두미)가 흉노에(사실은 월지왕에) 의해 살해당하고 태어나면서 바로 들판에 버려졌다. 그 때 까마귀들이 먹을 것을 물어다 주고 늑대가 길렀다고 한다. 그래서 ‘까마귀의 후손’이라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었을까. 그러나 곤막은 오손의 시조가 아니다. 아버지 대 이전부터 월지와 더불어 돈황 일대(祁連山以東, 焞煌以西)에 살고 있었다. 또한 돌궐신화에도 늑대와 까마귀가 등장하고 돌궐족은 늑대(Bori)의 후손으로 치부되지만 이는 이들 종족의 토템신앙을 반영하는 것 일뿐 突厥이라는 한자어의 뜻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튀르크(T¨urk)의 한자표기다.


Persia(漢語로는 巴思)는 ‘파르스(Fars)’ 지방 유목세력들이 실권을 장악했기에 ‘Fars의 나라’라는 뜻으로 붙여진 타칭이다. 기실 ‘페르시아인’이라는 집단은 10개의 分族으로 이뤄진 아리아 계통의 유목민 집단이었다. 기원전 700년경 자그로스 산 중의 ‘파르스’를 근거지로 삼고 살던 이들이 기원전 6세기 중반 이란 고원의 대부분을 장악했던 메디아 왕국을 전복하고 패권을 이어받아 이룩한 국가가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다. 북방의 스키타이와 싸워 곤욕을 치룬 다리우스(Darius)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영화 「300」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황제)가 이 제국을 대표하는 제왕들이다.
Persia라는 이름처럼 烏孫 또한 그리스계 로마 학자 Strabo(64/63 BC-ca. 24 AD)가 지은 지리 백과사전 『Geographica』의 Asi(i)에 해당하는 종족의 한자 음차어 명칭이다. 이는 Ptolemy가 말하는 볼가강 동쪽에 거주하던 Asman과 같은 족속으로, Asman은 As와 man(‘사람’이라는 의미의 투르크어)의 합성어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왜 烏孫일까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烏孫(Asi)은 『한서』에 등장하는 렵교미 곤막(대왕)으로 대표되는 당시 그 일대 지배 세력의 명칭이다. 그리고 덧붙여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오손 외의 다른 혹은 오손을 포함한 일체의 유목집단을 통칭해 塞種이라 하고, 스키타이라 指稱했다. 나중에 풀이할 기회가 있겠지만, 塞族과 스키타이는 동일 명칭의 異표기에 불과하다. 몽골초원의 유목집단을 흉노라 하고, 선비라 하고, 유연이라 하고, 돌궐이라 하고, 위구르라 하고, 몽골이라 하는 것처럼 그 속에는 아주 복잡하고 다양한 집단으로서의 인간 그물망이 얽히고 설켜 있는 것이다.

‘오손’과 6세기 중반 역사의 무대에 떠오른 집단(Asi)과의 관계
부럽고도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한국)보다 먼저 서역과 중앙아시아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프랑스, 영국, 독일, 스웨덴, 네덜란드, 러시아 등의 유럽 나라와 중국, 일본과 같은 아시아 국가 그리고 그들이 보낸 학자들이었다는 점이다. 그 학자들 중 한 사람인 스웨덴 출신의 샤르팡티에르(Jarl Charpentier, 1884~1935)는 중국 측 기록의 烏孫이 Pompeius Trogus의 ‘Asianoi’ 또는 Strabo의 ‘Asioi’와 동일한 집단으로, Alan(Sarmatae인들의 또 다른 명칭)의 친척 내지 조상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분석이 맞는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북흉노의 서천이 연쇄적 반응을 불러 일으켜 급기야 유럽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초래했고 이것이 서양 중세의 시발이 됐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일리계곡, 이식쿨 호수, 천산 일대에 목영지를 두고 유목생활을 하던 오손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든 카자흐스탄 평원을 거쳐 러시아 남부 초원지대를 따라 카스피해 북부 일대로까지 이주해 그곳에 정착하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남아있거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 일시 다른 세력에 의탁해 숨을 고르고 있던 오손의 후예들도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烏孫과 후일 6세기 중반 Asi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집단과의 관련성을 주목해야 한다.


바로 이들이다. 부민 카간이라는 탁월한 지도자가 등장하자 돌궐족은 힘을 규합해 초원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다. 6세기 중반 초원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뭇 부족의 통합 맹주가 된 돌궐제국의 명칭은 G¨ok[K¨ok] T¨urk Khanate(푸른(혹은 하늘) 튀르크 제국)다. 그리고 이 막강한 제국의 지배집단은 다름 아닌 Ashina(阿史那, Asin, Asena로도 표기) 씨족이었다. 여기서 ‘-na’는 ‘氏族’을 가리키는 접사에 해당한다. 匈奴(Hunna)에서의 ‘-na’와 마찬가지다. 그리고 최근 일본 문헌학자 팀이 소그드어로 쓰여진 Ashina 왕조의 Bugut 명문(The Bugut inscription)을 재해석한 결과 이 최초의 돌궐제국의 명칭이 Ashinas임을 발견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만이 전부나 유일한 진실은 아닌 것이다.


유라시아 초원 동쪽의 원거주지를 벗어나 그 누구보다 먼저 서쪽으로 이주해 간 Asi[Asioi]는 Pasianoi, Tokharoi, Sakaraulai와 연합해 시르다리야를 넘어 소그디아나에 침입하고, 더 나아가 박트리아까지 쳐들어가 그리스 지배세력을 몰아내고 정착한다. 大夏의 탄생이다. 한편 동쪽으로 이주해 알타이 산자락에서 柔然의 그늘 아래 숨죽이고 살던 Asi인은 때가 되어 돌궐제국의 주인이 된다. 이렇게 오손은 역사 무대에 끊임없이 등장한다.


이런 주장에는 근거가 필요하다. 『周書』 列傳 第四十二 異域下 突厥條의 기록을 살펴보자. 기이해 과학적이지 못하므로 학문적 판단의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하지 말고, 행간을 읽어 본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옛사람들의 자연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중요하다. 남자의 갈빗대를 뽑아 여자를 만들었다는 성경의 기록은 비판 없이 수용하지 않는가. 고주몽, 박혁거세, 김알지, 김수로 등도 한결 같이 알에서 태어났다는데…… 조선의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桓雄과 곰이 변해 여자가 된 熊女의 자식이라는데……세상에는 기이한 일도 많고 요상한 믿음도 상당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무척이나 기이할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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