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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의 명물은 재래시장 카라수 바자르 … 千里馬 구하러 달려온 漢의 흔적도
이 도시의 명물은 재래시장 카라수 바자르 … 千里馬 구하러 달려온 漢의 흔적도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4.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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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10. 페르가나 분지의 오아시스 도시 오시

▲ 성산 술레이만에서 내려다 본 오시 시내 전경.

“사람은 도모할 뿐 이루는 것은 하늘이다.”
여기가 어디인가. 우리네 자연환경과는 사뭇 다른 이곳에 첫발을 디디는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건 무지막지한 더위 때문이었을 것이다. 코로 빨려 들어오는 열기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졌다. 아프리카 사막의 도시 이집트 아스완에서 느끼던 열풍의 두려움이 다시금 상기되는 순간이었다. 이내 얼굴이 달아올랐다. 오아시스 도시라더니… 빨리 그늘을 찾아 쉬고 싶었다. 차안은 후끈거리고 땀방울은 온몸을 적셨다. 오시는 땀 샤워로 손님을 맞나보다. 역사의 강 나린(the Naryn River)을 찾아 풍덩 뛰어들고 싶은 욕구가 간절했다. 최 고문은 돌아가자고 했다.


잘랄라바드주, 나린주, 신장성(중국), 타지키스탄, 바트켄주, 그리고 우즈베키스탄과 접해 있는 오시주의 州都 오시(Osh)는 페르가나 분지의 남동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알라이 산맥(the Alay Mountains)과 이웃나라 타지키스탄과의 국경 역할을 하는 트랜스 알라이 산맥(the Trans-Alay Range) 사이에 위치한 알라이 분지가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페르가나 산맥(the Ferghana Range)이 나린 지역과의 경계 역할을 한다. 오시의 서쪽 가장자리에는 북서로 흘러 나린강과 합류해 시르 다리야(the Syr Darya)를 형성하는 카라 다리야(the Kara Darya: ‘黑水’라는 의미)가 지나고 있다. 흔히 카라수(Kara-Suu)라고 한다. 물결은 거세다. 강을 건너면 우즈베키스탄이다. 강이 국경 역할을 하는 것이다. 구소련이 제멋대로 땅을 획정했다. 예부터 이 일대에 살던 사람들은 국경이 뭔지도 모르고 강 양쪽을 오가며 장사를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놓아길렀을 것이다.


오시주 전체의 인구는 대략 100만 명(2009년 현재). 그 가운데 도시 주민은 8만여 명. 사람들 대부분은 농촌 지역에 산다. 여기 오시주 주민의 1/3은 우즈벡족으로 키르기즈스탄 거주 우즈벡족의 절반 이상(키르기즈스탄 전체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숫자다. 이것만 보아도 과거 이 지역이 우즈벡인들의 주 생활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구 소련에 의한 억지 영토 획정 때문에 오시에서는 특이한 영토의 모습을 보게 된다. 키르기즈스탄 땅이 본국에서 떨어져 이웃나라 우즈베키스탄의 영토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오시주 카라수 구역에 속하는 페르가나 계곡 내의 바락(Barak) 마을이 그 주인공으로 주민의 수는 고작 600여 명. 키르기즈스탄 땅 오시에서 우즈베키스탄 코자아바드(Khodjaabad)에 이르는 도로 상에 위치해 있는데 우즈베키스탄 안디잔 방향으로 키르기즈-우즈벡 국경에서 북서쪽 약 4km 지점이다.


오시의 역사는 3천년이나 된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일대에서 기원전 5세기경의 다양한 고대 器物을 발굴했다. 로마보다 역사가 오래됐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좀 황당하긴 하지만 솔로몬이 여기에 도시를 건설했다는 전설도 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처음 도시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는 얼핏 그럴듯하다. 오늘날의 오시를 포함한 페르가나 분지를 다스리던 ‘大宛’이라는 고대국가 이름의 유래를 살필 때 그러하다. 아무튼 도시의 기원에 관한 설왕설래와는 무관하게 오시는 실크로드라는 고대 교역로 상의 주요한 교차점이었다. 사람들은 물자가 모이는 곳에 촌락을 이뤄 정착하는 경향이 있기에 오시의 도시로의 변모는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오시는 키르기즈 민족의 영웅 서사시 『마나스(Manas)』에도 등장한다. 이곳 출신의 현자 Oshpur(‘오시 城’이라는 뜻)는 키타이 사람들의 압제 속에 고통 받는 키르기즈 민족을 구하는 영웅 마나스의 스승이었다. 10~12세기 오시는 페르가나 분지 내 제 3의 도시였다. 1762년에는 코칸드 칸국(the Khanate of Kokand)에 편입돼 왕국 내 6개 무역 중심지 중 한 곳이 됐다.


왕국은 사라지고 현재 코칸드(Kokand or Khoqand)는 우즈베키스탄 동부 페르가나 주의 소도시로 페르가나 분지 (남)서부에 위치해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시켄트 남동 228km, 안디잔 서쪽 115km, 페르가나 서쪽 88km의 지점에 자리 잡은 이 도시의 인구는 대략 20만 명. ‘바람의 도시(The City of Winds)’ 혹은 ‘멧돼지의 도시(The Town of Boar)’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대 교역로 상의 십자로에 위치해 페르가나 분지로 들어가는 두 개의 주요 도로가 여기서 만난다. 북서쪽으로 산악지대를 지나 타시켄트로 가는 길과 쿠잔드(Khujand)를 경유해 서쪽으로 향하는 길이다.


페르가나 지역은 고대 중국 사서에는 ‘大宛’으로 기록돼 이름을 전한다. 왜 대완일까. 대완에서의 ‘大’는 ‘大月支’, ‘大夏’(박트리아), ‘大秦’(로마)에서 보듯, ‘强國’을 뜻하는 수식어로 보인다. ‘대완’이라는 명칭은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가 이곳에까지 이르렀다가 돌아간 뒤 사정상 뒤에 남은 휘하 병사 및 그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필경 페르가나에 남기를 선택한 그리스인들은 이오니아인(Ionians)이 주류였던 것 같다.
세계사 시간에 듣기는 했어도 자세히는 모르는 이오니아인들은 도리아인(Dorians), 아이올리스인(Aeolians, 아이올리스 사람. Aeolis는 소아시아 북서안 지방), 미케네인(Mycenaeans 혹은 구어 Achaeans)과 더불어 고대 그리스의 주요 4대 종족 중 하나였다. 이들 모두는 본래 한 뿌리로 고대 어느 시기에 4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졌다고 스스로 믿었다. 이들에 대해 더 파고들지는 않겠다. 다만 일부 이오니아인들이 역사의 한 시점에 중앙아시아 페르가나 분지까지 왔었고 본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러 살게 된 것만 수긍하면 된다.


오시 시내 한복판에 그 이름도 유명한 술라이만 투(Sulaiman Too: 솔로몬 산(the Solomon Mountain))가 있다. 산 정상에 박물관이 있으며 여기서는 눈 아래로 시내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이 산을 16세기까지는 ‘바라 쿠치(Bara Kuch)’라고 불렀다는데, 그 뜻은 ‘Nice Mountain’이라고 한다. 그러다 현재와 같은 이름으로 개명된 것은 이 산 기슭에 무슬림 예언자 술레이만 세이크(Suleyman Sheikh)가 묻혔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이 8세기부터 이슬람화 됐고 그 영향이 이런 식으로 나타남을 우리는 보게 된다. 결국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에게 오시와 술레이만 산은 종교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聖地이며, 어떤 이는 모하메드가 여기서 알라께 기도를 드렸다고까지 믿는다. 우리나라 남해의 금산과 보리암이 이씨 조선의 개국주 이성계의 기도처라고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름없다.


술레이만산 꼭대기에 자리한 박물관 입구에서 아래쪽 오시 시내를 바라보고 왼편에 산허리를 감도는 길이 나있다. 더운 날 걷기가 즐겁지는 않으나 일단 다녀오면 보람이 있다. 관광객들은 망설여도 현지인들은 느릿느릿 그 길을 걷는다. 순례자처럼. 도보길을 따라 걷다보면 중도에 작은 동굴이 눈에 띄는데 똑똑 작은 물방울이 위에서 떨어진다. 순진한 키르기즈스탄 무슬림들은 이것을 술레이만의 눈물이라고 믿는다. 소박한 신앙이다. 그래서 병에 걸린 사람들, 현실의 문제로 걱정이 많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촛불을 밝히고 착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기도를 한다. 신앙은 이렇게 현실의 고난에 대한 위안의 수단이 된다. 좀 떨어져 보면 동굴의 생김이 얼핏 누워있는 임산부를 닮았다. 그래서인지 아이를 못 낳은 여자들이 이곳에서 자손 점지를 기원하며 비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카라수 바자르(재래시장)에서 만난 금이빨의 기르기즈스탄 여인들. 우즈벡이든, 키르기즈든, 타직이든 종족과는 무관하게 여기 중앙아시아 여인들은 금이빨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소원을 비는 미끄럼 바위도 있다. 여기서 다섯 차례 온몸으로 미끄럼을 타면 소원이 이뤄진단다. 나도 이런 일엔 빠질 수 없었다. 한낮의 후끈한 더위로 열기가 더해진 바위 위를 어린애처럼 미끄러지며 남북통일을 빌었다면 사람들이 믿을까.


이런 구경과 놀이를 즐기며 더위에 몸이 축축 늘어져도 꾹 참고 30분 쯤 걷다보면 1497년, 당시 14세 소년에 불과했던 바부르(Babur)가 페르가나 분지의 왕으로 즉위한 직후 세웠다는 모스크와 깃대가 이내 눈에 들어온다. 사정을 모르는 이에게는 뜻밖의 사실이겠으나 문제의 바부르는 후일 인도에 내려가 모굴 제국(The Moghul Empire)의 개창자가 된 인물이다. 칭기즈칸과 티무르의 혈통을 이은 이 유목민 집안 소년에 의해 중앙아시아의 역사는 거세게 요동친다. 모굴(Moghul)은 몽골(Mongol)의 페르시아식 표기. 실타래처럼 얽힌 역사의 수수께끼는 말로 푸는 재미가 있다. 인도의 수도 델리와 타지마할의 도시 아그라를 얘기하며 바부르의 무굴제국과 그 역사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오시의 명물은 뭐니뭐니해도 재래시장 카라수 바자르다. 카라수의 글자적 의미는 ‘검은 물’, 즉 ‘黑水’로 이 일대를 흐르는 강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많은 이들이 이곳을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자르로 꼽는다. 카라수 강변을 따라 약 1km 정도에 걸쳐 온갖 상점들이 자리 잡고 있는 이 시장은 워낙 넓기 때문에 이국적 인물상과 물품들에 한눈팔다가는 자칫 함께 간 일행을 놓치고 홀로 헤매기 십상이다.


여기에서 마침내 금이빨 여인들을 실컷 볼 수 있다. 장보러 나온 아낙이나 물건 파는 여자 상인이나 나이 좀 들었다 싶으면 예외 없이 금이빨이다. 앞서 최 고문의 질문이 생각나 대놓고 질문을 한다. “왜 금이빨을 하셨소? 충치 때문이오? 아님…” 일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던 견과류 노점상 여인이 답한다. “예쁘지 않아요?” 우문현답이다. 이런 대화의 장면 어디선가 또 있었다. 데자뷔(dé·jà vu)! 그랬다. 흔히 목 긴 카렌족이라고 알려진 미얀마의 소수민족 빠동족을 만나서 왜 천형처럼 무거운 황동 목고리, 팔고리, 발목고리를 끼고 사느냐고 물었을 때도 같은 대답을 들었다. 여자라면 모름지기 아름답게 치장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 무거운 18개의 목고리 때문에 목이 굽은 빠동족 여인의 답변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라는 의구심을 나는 지금도 떨치지 못한다. 중앙아시아 여인들의 금이빨은 황금사랑에서 기인한 것일 수 있다. 햇살 아래 빛나는 황금을 본 사람이라면 그 색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것이다. 스키타이의 황금장식이 그러하고 사르마타이, 흉노의 장신구가 그러하다. 그렇다면 빛나는 황금이빨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더하고 싶은 중앙아시아 여인들의 욕구는 정당하다.


다양한 유목민들이 혼거하는 여기 오시는 2천여 년 전 대완국 남부의 성읍도시로 중국의 사서에 처음 등장한다. 사마천의 『史記』 「大宛列傳」에서 장건은 자신이 보고들은 대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한다.
“대완은 흉노의 서남쪽, 한나라의 正西방향에 있는데 한나라로부터 약 만 리 쯤 떨어져 있다. 그들의 풍습은 한 곳에 머물러 살면서 밭을 갈아 벼와 보리를 심는다. 포도주가 있고,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은 피와 같은 땀을 흘리고 그 말의 조상은 천마의 새끼라고 한다. 성곽과 집이 있으며 크고 작은 70여 개의 성읍을 관할하고 인구는 몇 십만 명 정도 된다. 대완의 무기는 활과 창이며 사람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쏜다. 대완의 북쪽은 강거, 서쪽은 대월지, 서남쪽은 대하, 동북쪽은 오손, 동쪽은 우미(扜冞 혹은 拘彌), 우치(호탄)이 있다. 우치의 서방에 있는 물이 모두 서쪽으로 흘러 염택(鹽澤, 롭 노르 호수)으로 흘러들어간다.”


바로 ‘汗血馬’ 혹은 천리마로 알려진 명마의 고향이 대완의 땅 페르가나 분지였다. 오손에 善馬가 유명했듯 이웃한 대완국에서도 의당 좋은 말을 길렀다. 『태평환우기』가 전하는 과거 대완국의 면모를 보자.
“대완국은 한나라 때 중국과 문호가 열렸는데, 그 왕은 貴山城을 다스린다. 가구는 6만, 王姓은 소색닉(色匿)이며 이름(字)은 저실반타(底失槃)로 대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있다. 살피건대 현재의 왕은 저실반타의 후손이다. ……이에 이광리(李廣利)를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아 대완 이사성(貳師城)에 이르게 하니 선마를 취하고 수만 인을 인솔해 그 경내에 당도해 욱성성(郁成城)을 공격했으나 (적군을) 성 밖으로 끌어내지 못하고 소득 없이 돌아오니 2년의 세월이 걸렸다. 돈황에 이르러 살피니 살아남은 병졸이 불과 열 명 남짓이었다.

황제가 분노해 옥문관을 차단하고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이사가 (다시 6만 군사를 이끌고) 대완에 이르니 그 나라의 새로운 왕 과수(寡首)가 말을 바친 바 한나라 군대가 그 선마 십 수 필(匹)과 중간 등급의 암수 말 천 필(疋) 도합 2천 마리를 취했다. 대완의 귀인 매채(昧蔡)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해마다 天馬 두 필을 바치기로 약조했다. ……후일 한 明帝 때에 대완이 또 汗血驥(피 같은 땀을 흘리는 천리마 혹은 준마)를 바쳤다. ……수나라 때의 소대사나국(蘓對沙郍國)은 한나라 때 대완의 다른 이름이다. ……장안으로부터 12,550리 떨어져 있다.”


위 인용문에 나타난 漢나라 때의 郁成城이 오늘날의 오시다. 한나라는 멀고도 먼 나라 대완의 욱성성까지 군대를 보내 초원에서 나고 자란 명마를 구하려 했다. 당시 말은 전쟁에서의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나라의 입장은 무척이나 절박했었다. 북방의 사나운 흉노와 대적하려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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