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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영원한 것은 없다’ 일깨워주는 치렌산맥 그곳의 대서사시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없다’ 일깨워주는 치렌산맥 그곳의 대서사시
  •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4.01.15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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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_2. 流浪의 시작, 月支의 西遷(2)

▲ 윤후명의 소설에 나오는 몽환적 돈황과 달리, 이곳 돈황의 풍경 곳곳에는 눈에 익은 모습이 많다. 나그네 눈에 비친 이 친숙한 풍경이야말로, 중앙아시아가 어쩌면 하나의 문화적 DNA를 공유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월지의 원거주지였던 기련산이 멀리 보인다. 사진 장영주 KBS다큐팀 E

 

흉노에 패배한 월지는 겁에 질려 천산을 넘어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거기서 힘 길러
그들의 西遷은 도미노현상처럼 중앙아시아와
멀리 유럽까지 민족대이동 촉발했다

“Everybody needs somebody. Anybody cannot be somebody, though.”
아시아 동방의 초원에서 월지의 서천이라는 역사적 변동이 일어나기 150여 년 전. 유럽 대륙 발칸반도 마케도니아 왕국의 군주가 빌립보 2세(Philip II)에서 그의 아들로 바뀌었다. 세계제패의 야망을 지닌 이 젊은 군주의 이름은 바로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alexo ‘to defend, help’ + aner ‘man’, 기원전 356년 출생, 재위: 기원전 336~323년). 우리는 그를 흔히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알렉산더를 大王이라 부르는 건 페르시아인들에게는 모욕이다. 그는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에 쳐들어온(기원전 334년) 침략자요 호전적 악당에 불과하다. 그의 무력 앞에 무릎을 꿇은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어쩌지 못한 집단은 시르다리야(시르 江, the Syr Darya) 북쪽의 유목민 스키타이(Scythai) 뿐이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Darius III, 재위: 기원전 336~330년)는 몇 년에 걸쳐 사력을 다했으나 역부족. 종당에는 제국 동방의 屬州(satrapy) 박트리아(Bactria, 중국 사서의 大夏) 쪽으로 도주했다가 그곳 太守(satrap)인 벳수스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벳수스는 스스로 페르시아 대왕을 칭한다. 물론 이 배신자 또한 친구 스피타메네스에게 붙잡혀 알렉산더에게 압송되고, 알렉산더는 이를 메디아(Media)의 수도 에크바타나로 보내 페르시아인들로 하여금 조국의 배신자를 처단하게 한다.


이런 일, 배신은 꼭 있다. 제2돌궐 제국 두 번째 카간(qaγan)인 카파간(Qapaγan, ‘정복자’라는 뜻, 중국사서의 黙啜可汗, 재위: 691~716년)도 동족이라 믿었던 토구즈 오구즈(Toghuz Oghuz, 九姓 오구즈)의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오다 일원인 바이루크(拔野古) 부족의 계략에 빠져 살해당했다(716년). 그의 머리는 참수돼 중국 사신 靈佺(학영전)에 의해 당의 수도 장안으로 보내진다. 탈라스 전투에서 高仙芝 장군도 믿었던 연합세력에게 뒤통수를 맞는다(751년).

이 배신이 역사의 물결을 바꿔놓았다. 세상에 두려울 것 없던 알렉산더가 동방원정에 나서며 중앙아시아의 박트리아까지 침탈한 건 기원 전 329년의 일이다. 이때 위기의식을 느낀 발흐(Balkh) 지역의 추장 옥샤르테스(Oxyartes)는 열여섯 살짜리 자신의 딸을 알렉산더에게 바친다. 그녀의 이름은 Ro˘x̌āna(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Pashto어 표기). ‘빛나는 아름다움(luminous beauty)’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요즘 Roxanne, Roxanna, Roxandra, Roxane 등으로 異表記 돼 사용된다. 일본학자 요시다 유타카(吉田豊)가 필자와는 달리 安祿山의 祿山(중국어 병음: lushan)을 ‘환한 것’ 즉 ‘빛’의 의미를 지니는 소그드어 rokshan으로 파악한 것은 이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다시 월지 서천 이전, 당시 중원과 초원을 대표하던 한과 흉노의 대치 상황으로 돌아가자.

흉노와 한의 전쟁, 거대한 이동의 기원
기원전 202년 한 고조 劉邦은 秦나라 붕괴 이후 혼란스럽던 중국을 통일했다. 그는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측근인 韓王 信을 북방에 배치하고 흉노 토벌을 명한다. 하지만 한왕 신은 흉노 토벌이 어렵다 생각해 화평을 시도했고, 이후 고조가 이를 책망하자 흉노로 투항한다.


한왕 신이 투항하자 흉노선우 모돈은 그의 인도를 받아 代의 땅을 공격해 들어갔고, 현재의 산서성 동쪽 平城에 이르렀다. 한 고조 역시 대군을 일으켜 이에 맞섰으나, 보병에 앞서 성급하게 적진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白登山에서 포위당해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흉노군에 포위된 채 7일간 전전긍긍 목숨이 위태롭던 유방은 모돈의 연지에게 선물을 보내 모돈을 설득토록 한다. 그리고 모돈이 짐짓 포위망을 느슨하게 한 틈을 타 유방은 장안으로 도망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체면 구기고 혼쭐이 난 유방은 劉敬을 보내 흉노선우에게 다음 사항을 약속했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의 仁祖의 三頭叩拜 치욕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다.

1. 매년 한 황실의 여인을 선우의 연지로 바친다.
2. 매년 한은 흉노에게 솜, 비단, 술, 쌀 등 일정량의 공물을 바친다.
3. 황제와 선우와의 사이에 형제의 盟約을 맺어 화친한다.
4. 만리장성을 경계로 양국이 서로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

유방이 지도자로서 인기가 없었는지, 한왕 신 이후에도 고향 친구였던 燕王 노관이 또 유방을 배신하고 흉노로 들어갔다. 유방은 죽고 싶었을 것이다. 때가 돼(이런 것을 일러 운명이라고 하는가) 한 고조가 죽고, 惠帝(유방의 차남 劉盈, 기원전 210~188년, 재위: 기원전 195년)가 즉위했다. 오버도그(overdog) 모돈은 언더도그(underdog)였던 고조의 미망인 呂太后에게 “이몸도 독신이고 그대도 독신이니 잘해보자”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모욕감을 견디지 못한 여태후는 격노해 흉노를 토벌코자 했으나, 주변에서 모두 고조의 백등산 전투를 거론하며 만류, 토벌을 취소했다.


한과 흉노 사이의 쟁패와는 별도로 흉노의 침공으로 더 이상 본향에 머물 수 없음을 깨달은 월지(月支 혹은 月氏로 표기) 유민들은 동쪽의 흉노를 피해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월지의 서천, 이 일이 마치 도미노현상처럼 중앙아시아는 물론 멀리 유럽에까지 민족 대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된다.
치렌산(祁連山) 북쪽 昭武城을 거점으로 하던 월지는 그곳을 떠나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을까? 청해호 주변과 치렌산맥 초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이들은 서둘러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 알타이 산맥을 넘고 중가리아 분지를 지나거나, 천산산맥을 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리하(伊犁河)가 흐르는 일리(伊犁, Yili: 몽골어로는 ‘bareness’(살풍경, 휑덩그렁함, 꾸밈없음, 알몸)) 계곡에 이른다. 후일 史家들은 이렇게 서쪽으로 이주해 간 세력을 대월지라 하고, 남아 있던 집단을 소월지라고 지칭했다. ‘일리’라는 이름은 아마도 ‘갈고리(hook)’를 뜻하는 위구르어 ‘Il’에서 유래한 것일 수 있다. 강의 지형이 그처럼 생겼으므로. 일리하는 북으로 흘러 현 카자흐스탄 소재의 발하시호(Balkhash Lake)로 흘러들어간다.
일리하에 대한 언급은 Mahmud al-Kashgari(Kashgar 출신의 마흐무드)라는 사람이 11세기 후반 2년여(1072~1074)의 노고 끝에 쓴 투르크어 사전 『The Dīwānu l-Luġat al-Turk』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리(Ili)는 강의 이름이다. 야그마(Yaghma), 토크시(Tokhsi), 치글릭(Chiglig) 같은 투르크 종족들이 그 河岸을 따라 산다. 이들은 일리강을 자신들의 자이훈(Jayhoun)으로 여긴다.”


‘자이훈’은 아랍어로 중세 무슬림들이 에덴동산을 흐르는 거룩한 네 개의 강 중 하나를 가리키던 말이다.
이로 미뤄 山河의 주인은 수시로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세기 이후 상당기간 烏孫國이 차지했던 일리 계곡이 세월이 흘러 11세기에는 몇몇 돌궐(투르크) 부족이 점유하고 있었다. 그 무렵 몽골초원의 지배자는 돌궐과 위구르와 키르기즈를 거쳐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란은 만주까지 지배했다.


그렇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없다. 개인에게 생로병사가 있고 주거지나 직업의 변화가 있듯이, 국가 또는 특정 지역의 지배계층도 수시로 바뀐다. 땅과 사람은 대부분 그대로인데, 王氏가 지배하던 고려가 李氏가 지배하는 조선으로 정권교체가 일어난 경우가 그러하다. 현대에 이르면 이런 일이 민주적 투표에 의한 평화적 세력교체가 이뤄진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마침내 운명은 아무다리야 강 너머로
월지가 애통함을 억누르고 당도한 낯선 지역 일리 계곡과 그 주변 그리고 천산산맥 일대에는 오래 전부터 塞種이라 불리는 유목집단이 살고 있었다. 이제 이들이 월지에 밀려 이주를 시작한다. 월지는 일시 안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오손이 들이닥친다. 오손 역시 키르기즈족과 마찬가지로 푸른 눈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유목집단이었다. 월지와 오손은 다 같이 치렌산과 돈황 일대에 살던 이웃이었다. 흉노의 도움을 받은 오손은 월지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일리계곡에서도 쫓겨난 월지가 다음으로 당도한 곳은 이식쿨(Isyk kul) 호수. 그러나 오손은 계속해 압박을 가한다. 얼마 못가 다시 유랑의 길에 오른 월지는 페르가나 분지(대완) 북쪽 카자흐 평원에 이른다. 당시에는 그저 시르다리야 북쪽의 초원으로 알려진 곳이었다. 여기는 떠나온 고향 치렌산에 비해 추웠다. 다시 이들은 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마침내 도달한 곳은 康居의 故地. 북으로는 시르다리야 강이, 남으로는 아무다리야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른바 河中지역이었다. 아랍어로는 ‘Mawara an-Nahr’라고 하는데, ‘(아무다리야) 강 너머(의 지역)’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Transoxiana(Oxus 강, 즉 아무다리야 강 너머(의 지역))라고 한다. 희랍인들은 아무다리야(the Amu Darya (江))를 Oxus로, 시르다리야(the Syr Darya(江))를 Jaxartes라고 불렀다. 땅과 강의 주인이 바뀌면 새 주인은 자신들의 말로 주변을 지칭한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에 대해 여러 명칭이 존재한다. 아무튼 이렇게 월지는 이동하고 이렇게 새로운 땅 소그디아나(Sogdiana, 소그드인의 땅)에 정착한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디아스포라(diaspora, 移住. 역사상 바빌론 流囚 이후 유대인의 離散이 유명하다). 유랑의 길에 오르기 전 월지의 본거지는 자신들의 말로 ‘하늘(天)’을 의미하는 ‘치렌’산맥 일대의 草地였다. 이 산맥은 현 칭짱(靑藏)고원(티베트 고원)의 북쪽 기슭인 간쑤성(甘肅省)과 칭하이성(靑海省)에 걸쳐, 북서쪽은 알타이산맥에 접하고, 동쪽은 란저우(蘭州)의 흥륭산에 이르며, 남쪽은 차이다무 분지와 칭하이(靑海) 호수에 서로 연결된다.


치렌산맥은 서북에서 동남으로 달려 여러 개의 평행하는 산맥이 돼 평균 해발 4천m 이상, 길이 2천여km, 폭 200~500km에 이른다. 평원의 하곡이 산지 면적의 3분의 1이 넘으며 主峰은 간쑤성 북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치렌산이다. 일부는 빙하가 발달한 6천500m 급의 고봉이 늘어서, 하서회랑의 오아시스 도시들인 武威(예전의 凉州), 張掖(예전의 甘州), 酒泉(예전의 肅州), 敦煌(예전의 沙州, 투르크어로는 Dukhan) 등을 윤택하게 하는 내륙 하천의 수원이 되고 있다.


祁連山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흉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흉노어 혹은 월지어로 ‘치렌’은 ‘하늘’이라는 뜻이며, 그래서 치렌산은 ‘天山’이라고 불린다. 하서회랑의 남쪽에 있기 때문에 ‘南山’이라고도 불렸다. 唐나라 시인 이백의 시 “明月出天山 蒼茫雲海間 長風幾万里 吹度玉門關”에서의 ‘天山’은 바로 이 치렌산을 가리킨다. 석도명이 염장한에게 天山으로 간다고 했을 때도 天山山脈이 아니라, 여기 치렌산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고 한다.


아름답기로는 燕支山을 빼놓을 수 없다. 역시 현 중국 간쑤성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산은 과거 흉노의 근거지였다. 얼굴에 바르는 연지의 원료인 연지, 즉 紅花(잇꽃)의 자생지라고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흉노 선우의 아내를 택해서 흉노왕비를 燕支라 부른다고 한다는데, 사서가 전하는 閼氏를 연지로 읽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過燕支寄杜位         연지산을 지나며 두위에게 부침
           岑參                                                 잠삼
燕支山西酒泉道     연지산 서쪽 주천 가는 길
北風吹沙卷白草     북풍에 모래 날리고 흰 풀이 도르르 말린다.
長安遙在日光邊     장안은 멀리 햇빛 비치는 쪽에 있으니
憶君不見今人老     그대 생각해도 볼 수 없고 사람은 늙어만 가네.

연지산을 지나 서역으로 가는 길에 이 시를 남긴 잠삼(715~770)은 당 현종 때의 시인으로 天寶 3년(744년) 진사에 급제해 안서사진절도사 고선지의 막부서기가 됐으며, 봉상청의 판관을 역임했다. 후에 嘉州 자사를 역임해 잠가주라 불리며, 이른바 邊塞詩의 대가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시를 지어 바친 두위는 詩聖 杜甫의 조카로 두보가 상서 엄무의 막하에서 참모로 있을 때 데리고 있었던 인물이다. 후에 역사훈원외랑 등의 직을 보임 받았다.


이제 정리해보자. 모돈선우의 공격을 받고 일차 절멸 위기에 처했던 월지. 다시 기원전 162년 모돈의 아들 노상선우의 공격을 받고 월지왕이 살해되고 만다. 이때 노상선우는 죽은 월지 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었다고 사서는 전한다. 패배한 월지는 겁에 질려 천산을 넘어 서쪽의 아무다리야 주변 소그디아나로 이주해 가고, 이 땅에서 힘을 기르고 안정을 되찾은 후 大夏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얼마의 세월이 흘러 기원전 130년경 漢武帝의 명을 받고 前漢의 사신 張騫이 천신만고 끝에 월지에 反흉노 동맹을 제안하러 가지만 이미 안주할 땅을 확보한 대월지는 단호히 동맹을 거절한다. 그리고 기원전 1세기경 토하라(Tokhara: 大夏 즉 Bactria)의 5흡후(翕侯) 중 하나인 쿠샨(Kushan: 貴霜)부족이 강대해져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북인도의 쿠샨 제국이 되고 이들이 동서교역을 지배하게 된다. 중국은 이 쿠샨 왕조를 여전히 대월지라고 불렀다.


연호택 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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