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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ㆍ중 항로의 징검다리…신라ㆍ고려시대 ‘국제해양도시’의 흔적을 찾다
한ㆍ중 항로의 징검다리…신라ㆍ고려시대 ‘국제해양도시’의 흔적을 찾다
  •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원장ㆍ사학과
  • 승인 2012.10.15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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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19 흑산도

 

흑산도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한ㆍ중 항로를 연결하는 소통의 징검다리로 기능한 적이 있었음이 근래 밝혀지고 있다. 흑산도 북서쪽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인 읍동은 한ㆍ중 항로를 이어주는 중요 거점포구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상라보에서 내려다 본 흑산도의 읍동마을. 사진=강봉룡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97km 떨어져 있는 絶島. 다도해의 ‘바다호수’를 여러 겹 벗어나서야 비로소 마주대할 수 있는 망망대해 위의 孤島. 홍어의 섬 흑산도다. 이 흑산도가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한·중 항로를 연결하는 소통의 징검다리로 기능한 적이 있었음이 근래에 밝혀지고 있다.

 

먼저 18세기 중반에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신라 말 한·중 항로로 소개한 「영암 구림촌-흑산도-홍도-가거도-영파」의 코스 중에 흑산도가 포함돼 있다. 뿐만 아니라 장보고의 후원을 받아 9년간 당나라 유학생활을 했던 일본의 고승 엔닌이 쓴 일기 『입당구법순례행기』와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를 방문하고서 기술한 『고려도경』에도, 그들의 항해 여정에서 견문한 흑산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엔닌은 흑산도에 300~400가구가 살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고, 서긍은 흑산도에 뱃사람들이 머무는 館舍가 있다는 점과 중국의 사신이 오면 산마루에 봉화를 피워 왕성에 알린다는 점 등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들로 미루어, 흑산도의 어딘가에 한·중 항로를 이어주는 중요 거점포구가 있었을 것으로 예상돼 오던 차에,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이 흑산도 북서쪽에 위치한 바닷가 마을인 읍동에서 다수의 통일신라 및 고려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을 찾아냄으로써 이를 실증한 바 있다.(『흑산도 상라산성 연구』, 2000) 읍동에서 조사된 몇 가지 대표적인 유적을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館舍址로 추정되는 곳이다. 상라산 전망대에서 읍동마을을 향해 뻗어 내려온 동쪽의 끝자락에 형성된 ‘해내지골’에 동서 장축 30m 정도의 평탄 대지가 형성돼 있는데, 이곳이 관사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에는 축대가 일부 남아 있고, 그 건물지는 남향이다. 『고려도경』에서 흑산도에 있었다고 한 관사가 이것이다.  

둘째, 절터이다. 오늘날 읍동마을의 절터에 남아있는 석탑과 석등은 대개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그 이전으로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 절 이름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조사 과정에서 수습된 명문기와를 통해서 ‘无心寺禪院’이라 불리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은 의외의 큰 수확이었다.

셋째, 제사지 및 봉수지이다. 해발 226m의 상라산 정상부(상라봉)에서 철제마 3점을 비롯해 주름무늬병, 줄무늬병편, 그리고 편병의 구연부편 등과 같은 제사 관련 유물이 다수 수습됐다. 특히 이곳에서 수습된 철제마는, 말을 통해서 안전항해의 염원을 하늘에 빌곤 했던 뱃사람들의 ‘철마신앙’이 행해진 제사터였음을 확인시켜 준다. 또한 이곳은 『고려도경』에서 소개한 그 봉수대로도 활용됐을 것으로 보인다.

넷째, 상라산성이다. 이 성은 전체 길이 280m의 테뫼식 소형산성으로 상라산의 6부 능선을 따라 남사면만을 반월형으로 성벽을 쌓았다. 바다에 면한 북쪽 능선은 성벽을 쌓지 않고 100m 이상의 해안절벽이 자연 성곽을 이루고 있는 형세이다.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라산성 모습이다. 읍동포구가 국제해양도시로 번영을 누리면서 해적들의 공격을 감시하고 방어할 필요성에 따라 축조된 방어시설로 볼 수 있다. 사진=강봉룡

이처럼 읍동마을에서 사신이나 海商들이 머물렀을 관사터와 그들의 入境을 왕성에 알리는 봉수대의 존재가 확인됐다는 것은, 이곳이 한·중 항로 상에서 핵심적인 거점포구로 기능했음을 재삼 확인시켜준다. 또한 이곳에 무심사선원과 제사터가 있다는 것은, 사신이나 해상 일행이 머무르면서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다양한 해양신앙의 의식을 거행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읍동포구는 다국적의 뱃사람들이 모여들어 북적대던 국제해양도시로 성장하고 번영을 누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럴수록 읍동포구는 해적들의 공격대상이 됐을 것이어서, 이를 감시하고 방어할 필요성이 제기됐을 것이니, 상라산성은 이러한 필요성에서 축조된 방어시설로 볼 것이다.

읍동마을에는 유적뿐만 아니라 통일신라~고려시대의 유물들도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허다하게 산재해 있다. 수습 유물들은 크게 토기류, 자기류, 기와류, 철제마, 문초석 등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중 절 이름이 새겨진 ‘无心寺禪院’銘 수키와와 철마신앙이 행해졌음을 보여주는 철제마를 수습한 것은, 조사과정의 최대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밖에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유물로 알려진 주름무늬병, 줄무늬병, 그리고 해무리굽청자 등은, 읍동포구가 통일신라 후기, 즉 장보고시대부터 한·중 항로의 중요 거점포구로 활용됐을 가능성을 증언해 준다.

또한 녹청자와 상감청자, 중국 송대의 청자, 그리고 전형적인 고려시대 기와로 알려진 魚骨文 기와편 등 11~14세기대의 유물들은, 흑산도 읍동포구가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도 국제해양도시로서의 위상을 확고하게 유지해갔음을 보여준다.

거기에 문초석이 다수 확인됐고, 보도블럭으로 활용됐을 瓦塼도 흔히 볼 수 있으니, 이들은 보도블록으로 포장된 거리에 다수의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는 국제해양도시 읍동포구의 위용을 상상하게 한다. 상당 기간 존속했다가 언제부턴가 사라져버린 ‘섬 문명’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강봉룡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원장ㆍ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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