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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를 타고 온 ‘가거도’의 내방신(來訪神)
파도를 타고 온 ‘가거도’의 내방신(來訪神)
  • 이윤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 승인 2012.04.18 20: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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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1. 서남해 ‘가거도’

 

서남해 지역의 ‘끝섬’ 가거도의 대풍리에서 바라본 당여. 오른 쪽 숲이 아랫당이다.
가거도(可居島). ‘사람이 살만한 곳’이라는 뜻은 역설적으로 살기 어려웠을 상황을 은닉하고 있다. 해양국토의 끝단인 가거초가 있어 서남해 최고 끄트머리라는 지위는 물려줘도 될듯하지만 사람 사는 ‘끝섬’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하늘을 향해 날을 세운 경사지엔 아열대는 물론 열대에 가까운 수종들이 갖가지 색을 자랑한다. 깎아지른 벼랑 아래로 무심한 파도가 이빨을 드러낸다. 기암괴석의 낙도, 중국 닭 우는 소리 들리는 곳, 절해고도, 이러한 여러 가지 수사들은 고독의 다른 표현들이다.

 

그래서일까. 이곳을 방문하는 누구라도 형언하기 어려운 이 절경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장그르니에가 지중해의 케르겔렌군도를 통해 인간의 실존과 고독을 묵상했다면 이곳은 초월과 해탈을 묵상할 수 있는 곳임에 틀림없다. 이곳 사람들의 지난한 삶을 잠시 접어둔다면 세파에 마음 상한 사람들이 며칠씩 쉬어가기 딱 좋은 곳이다. 중증이 아니라면 이 청정한 바다와 바람에 씻지 못할 마음병이 없을 것이다. 보너스도 있다. 설화의 행간 속에 살짝 감추어둔 유무형의 메타포가 그것이다.

정기 여객선이 닿는 큰몰(1구 마을)에서 서너 시간 산비탈을 타고 고개를 넘어 동편의 벼랑으로 내려가면 대풍리(3구 마을)가 나온다. 밀림이 우거졌던 시절에는 마을 간에도 배를 타고 갈 수밖에 없는 외딴 곳. 큰바람이 일 때마다 배를 낭떠러지바위 위로 끌어 올려두는 ‘뱃자리’가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는 마을제사(堂祭)에서 모시던 ‘발 달린 쇳덩어리신(神)’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우거진 후박나무숲을 뚫고 당도한 마을 어귀에서 만난 임동예 할머니(1924년 生)가 실감나게 그 이야기를 전해준다.

옛날에, 아마도 이 마을이 생길 그 즈음에 한 노인이 꿈을 꾸었다. 마을 남쪽 해안 ‘당여’로 쇳덩이가 가라앉지 않고 밀려와 ‘달강 달강’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 꿈이었다. 이상하게 여겨 해안절벽을 내려가 보니 실제 두 발 달린 쇳덩이가 바위에 부딪치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 보낸 ‘당영감’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이 쇳덩이를 마을의 윗당(堂)에 모셔두었는데 하루저녁을 자고 나니 쇳덩이가 아랫당(堂)에 내려와 있었다. 수상히 여겨 다시 윗당에 모셔두었더니 또 자고나면 아랫당으로 내려와 있곤 했다. 이렇게 하기를 수차례, 노인은 이것이 ‘당영감’이 아니라 ‘당할멈’ 혹은 ‘당각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두 발 달린 쇳덩이를 아랫당의 신격으로 모시고 마을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대풍리 아랫당 모습. 당제때 사용하던 솥과 절구가 방치돼 있다.

 

이것은 마을의 기원과 관련되는 해안(섬)표착형 설화다. 출발지를 특정하진 않지만 외부로부터 흘러들어 온 신격 혹은 물품이 주요 모티프를 이룬다. 직접적으로는 入島인의 유입설을 반증하는 것이며 간접적으로는 마을 사람들의 네트워크 지향성을 엿볼 수 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섬지역은 자체 생산만을 통해 생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끊임없이 교역 관계를 형성해왔다. 쇳덩이나 돌덩이, 혹은 궤짝이 가라앉지 않고 떠밀려 들어오는 설화는 서남해 도서지역과 해안지역에 의외로 많다. 관음석선과 관련된 불교설화를 제외하고라도 제나라 왕 전횡이 500여 무리를 이끌고 와서 정착했다는 어청도의 당설화, 한 노인에게 현몽하여 바닷가에 밀린 궤짝의 중국돈과 머리카락, 철마를 마을신격으로 모셨다는 안마도 당설화, 사공에게 현몽하여 제주도돌을 마을신격으로 모시게 된 만재도의 당설화 등이 대표적이다.

지역 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때로는 중국 등 동아시아와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생존해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가거도의 해풍을 맞으며 얻는 ‘마음씻김’ 외의 보너스는 대체로 이런 것이다. 대풍리의 ‘두 발 달린 쇳덩어리신’은 교역적 삶이 중심이었던 섬사람들이 숨겨둔 일종의 메타포다. ‘당각시’, ‘쇳덩어리’, 이 행간의 함의들을 추적하는 즐거움은 우리 삶 자체가 사실은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다는 깨달음 아닐까. 절해고도일지라도 섬나루를 통해 연결되어야 하듯이, 사람들도 끊임없이 어떤 관계를 통해 생존한다는 그런 진리 말이다. 

이윤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이윤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이윤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이윤선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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