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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기 일본해군의 비밀기지…‘최초의 무선전신소’ 표지석 설치도 외면
러일전쟁기 일본해군의 비밀기지…‘최초의 무선전신소’ 표지석 설치도 외면
  • 최성환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ㆍHK연구교수
  • 승인 2012.07.09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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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⑬ 전남 신안군 ‘八口浦’ 옥도

하늘에서 본 신안군 옥도 풍경. 옥도를 기점으로 주변에 여덟가지 해로가 열려 있다는 뜻에서 오래전부터 八口浦라고 불렀다. 사진=신안군
전라남도 신안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섬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그 가운데 비금·도초·자은·암태 등의 섬들은 최근에 ‘신안 다이아몬드제도’라 불리고 있다. 하늘에서 보면 다이아몬드 형태로 바다 위에 수놓아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오래전부터 이 일대를 지칭하는 흥미로운 명칭이 존재했었다. 원래의 명칭은 ‘八口浦’였다. ‘팔구포’는 현 신안군 하의면 玉島를 기점으로 주변에 여덟 가지 海路가 열려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하나의 섬이나 포구를 의미하기보다는 옥도를 중심으로 한 주변 해역과 도서들을 통칭한다. 공간적 개념으로 ‘다이아몬드 제도’나 ‘팔구포’는 그 의미가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팔구포 해역의 8가지 해로와 옥도의 위치다.
팔구포의 중심은 옥도이다. 옥도는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에서 북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지점에 있다. 중국 쪽을 향해 열려있는 먼 바다와 목포내륙으로 가는 시하바다, 양쪽 모두로 연결되는 해로의 요충지가 된다. 현재 거주 인구는 133명 수준(2011년 기준)이다. 마을회관이 유일한 공공시설이고, 민박집이나 상점도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한적한 섬마을이다. 평화로운 분위기의 이 섬마을에는 ‘갑진년 군함통’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갑진년은 1904년을 의미하며, 이때는 러일전쟁이 발발한 시기이다.

‘갑진년 군함통’이라는 말은 러일전쟁기 일본의 군사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본해군은 군사적 목적으로 평화의 섬이던 옥도를 비밀스럽게 점령했다. 옥도는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요충지이자, 해상전투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원정근거지가 됐다. 옥도가 선택된 이유는 ‘팔구포’라는 지명이 붙여진 것처럼 해군함대의 진출과 퇴각이 전략적으로 매우 용이했고, 옥도 내 식수 사정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옥도는 일본해군전함의 집결지 및 급수지 역할을 했다.  

평화로운 섬과 '갑진년 군함통'

옥도에 설치된 일본해군기지의 명칭은 ‘팔구포방비대’였다. 팔구포방비대와 관련된 내용은 러일전쟁기 일본의 군사경영에 대한 기밀문서철인「일러전역시 한국에서 제국의 군사경영 일건」에 상세하게 남아 있다. 총 195건 문서 가운데 33건이 팔구포 일본해군기지와 관련된 내용이다. 일본정부는 옥도를 침탈하고 해군기지를 설치한 것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매우 주도면밀하게 추진했다.

옥도에 일본해군기지가 설치되면서, 근대문화와 관련된 몇 가지 최초의 사례들도 나타났다. 일본해군이 옥도를 점령한 가장 큰 이유는 전신취급소를 설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근 해역을 지나는 함선과의 연락을 위해 이곳에 전신소가 설치됐는데, 그것은 개항장 목포보다도 시기적으로 빠른 것이었다. 옥도의 전신소가 확대돼 훗날 목포무선전신소로 발전해 나갔다. 일본인들은 목포무선전신소가 한국 최초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기상관측에 있어서도 옥도는 한국 근대 기상관측의 발상지이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군사적 목적에 의해 만주와 우리나라의 요지에 임시 관측소를 설치했다. 옥도도 그 임시관측소 중 하나였는데, 1904년 3월 25일부터 근대적인 관측 업무를 개시했다. 이는 우리나라 근대 기상관측의 시초이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1906년 4월말 관측소는 목포로 이전됐고, 지금의 목포기상대로 그 명맥이 이어져 왔다. 현 목포기상대에는 당시 옥도에서 사용된「觀測野帖」을 비롯한 관련 기록물들이 지금까지 잘 보존이 돼 있다.

한국근대 기상관측이 시작된 곳

옥도에는 아직도 일본해군기지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들이 상당수 남아 있다. 러일전쟁 당시 사용된 우물을 비롯해, ‘대일본제국해군용지’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표지석 등이 있다. 일본인들이 사용했다는 석조로 된 목욕탕도 남아 있고, ‘대장터’·‘소장터’·‘무기고’ 등 다양한 관련 지명이 전해온다. 옥도의 일본해군기지는 러일전쟁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유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근거를 밝히기는 어렵지만,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중국까지 바다전선을 설치했었다” 혹은 “대동아 전쟁 때 하와이를 습격한 일본군함이 이곳에서 출발했다” 등의 이야기도 마치 전설처럼 구전되고 있다.

일본해군이 러일전쟁시기 팔구포 옥도에 일본해군기지를 비밀리에 설치했었다는 사실은 옥도 주민들의 오래된 기억 속에만 남아 있고,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역사였다. 옥도의 사례는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침탈성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섬이 지닌 공간적 특성이 근대화의 시기에 어떻게 활용됐는가에 대한 시사점을 제시하기도 한다.

2004년도에 기상청에서는 근대기상관측이 시작된 장소임을 기념하기 위한 표지석을 옥도에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옥도가 너무 외진 곳이라는 이유로 이 계획은 결국 무산됐다. 역사는 현대인에게 끊임없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과거에 이곳이 일본 해군기지로 활용됐고, 우리나라 최초의 무선전신소가 만들어지고, 근대 기상관측이 시작된 곳이라면 그만큼의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비록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기념 표지석을 세우는 일에서조차 외면당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귀하고 보배로운 구슬섬 옥도의 진가가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다.

최성환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ㆍ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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