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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량 500년 잔혹사 … ‘꿩대신 닭’ 안면곶 섬이 되다
안흥량 500년 잔혹사 … ‘꿩대신 닭’ 안면곶 섬이 되다
  • 변남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승인 2012.06.14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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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⑨ 충남 태안 안면도

충남 태안의 안흥량. 바닷길 곳곳에 수중 암초가 드러나 보인다. 고려ㆍ조선시대에 충청ㆍ전라ㆍ경상의 세곡미를 실은 조운선은 태안반도의 안흥량을 받드시 통과해야 서울에 도착했는데, 이곳 안흥량은 빠른 조류에다 수중 암초가 많아 파손이 잦았다. 안흥량의 본래 이름도 통행하기 어렵다는 ‘難行梁’이었다. 사진=변남주
충청남도 ‘태안’은 ‘국태민안’의 준말이란다. ‘안면도’나 ‘안흥’도 같은 뜻을 품고 있다. 태안의 안면도는 우리나라에서 여섯 번째로 큰 섬이고, ‘안흥량’이라는 특별한 바닷길과 연결된다. 바닷길 옆 해안선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금모래 천지다. 천리포, 만리포, 몽산포, 청포대, 꽃지 등 해수욕장이 줄줄이 있기 때문이다. 금모래와 석양의 붉은 빛 조화는 일품이라 평하지만, 숨겨진 뱃길의 역사는 매우 잔혹하다.

고려·조선시대에 충청·전라·경상의 세곡미를 실은 조운선은 태안반도의 안흥량을 반드시 통과해야 서울에 도착했다. 그런데 안흥량에서는 해난사고가 줄을 이었다. 빠른 조류에다 특히 관장각 인근에는 수중 암초가 많아 전복되거나 파손이 잦았던 것이다. 인명은 물론 국가 재정에도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 ‘안흥량’의 본래 이름도 통행하기 어렵다는 뜻의 ‘難行梁’이었다. 고려 때에 안흥량 인근의 지령산에다 安波寺를 건립해 무사 항해를 기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난사고는 그치지 않았다. 조선 태조부터 세조시기까지 확인되는 사고만해도 선박 침몰이 200여 척, 사망자는 1천200여 명, 세곡손실은 1만 5천800여 석이나 된다. 주요 사고만 보면, 태조 4년(1395년)에 경상도 조운선 16척이 침몰, 태종 14년(1414년)에 전라도 조운선 66척 침몰에다 200여 명이 익사하고 5천800석의 세곡이 손실됐다. 또 세조 원년(1455년)에는 전라도 조운선 54척이 침몰했다. 이어 조선 중기에는 호남 세곡 손실만 10만 석에 이를 정도였다. 심지어 ‘쌀썪은여’라는 지명까지 생길 정도였다.

최근 안흥량 바다에서는 곡식은 물론 최고급 고려청자, 발신지와 수신자가 적힌 목간, 생활상을 알려주는 젓갈이나 석탄 등이 속속 인양되고 있다. 이러한 까닭에 혹자는 이곳을 ‘보물선의 공동묘지 또는 박물관’이라 칭하면서, 태안수중문화재 발굴에만 100여 년이 소요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처럼 ‘안흥량’은 뱃사람들이 사투를 벌여야하는 악마의 바다였다. 이런 절박함을 극복하고자 옹색한 궁여지책이 등장한다. 조선 태종 무렵에 ‘難行’이라는 이름 때문이라며 ‘安行梁’이라 개칭했다. 그래도 효과가 없자 다시 ‘안흥량’으로 개명했다.

또 절체절명의 절박함은 태안지역 운하공사에도 숨어 있다. 이른바 굴포(掘浦, 이하 우리말 ‘판개’)운하 공사다. 첫 번째는 태안군과 서산시 경계에 있는 ‘판개’이고, 두 번째는 소원면 의항리의 ‘개미목’이고, 세 번째가 안면도 ‘판목’ 공사다. 이를 순차적으로 살펴보자.

태안의 ‘판개’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운하공사다. 북쪽의 가로림만과 남쪽의 천수만을 연결하고자 했는데, 총길이는 약 7㎞다. 고려 숙종(1096∼1105년)과 예종(1106∼1122년)을 거쳐 인종 12년(1134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수천 명의 인력을 투입했으나 3㎞ 정도를 남겨두고 갯벌이 자꾸 무너져 수로를 메우는 바람에 중단됐다. 당시 실패한 거리를, 소 울음소리를 서로 들을 수 있는 정도라 표현했다. 중단된 지 250여 년이 지나 王康의 건의로 공양왕 3년(1391년)에 공사는 재개됐다.

그러나 암반층의 출현으로 또 중단해야했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종 12년(1412년)에는 종전의 해수관통 방식을 바꾸어 독특한 ‘저수형’ 갑문식 운하가 탄생한다. 암반층 구간에 5개의 저수지를 계단식으로 만들어 각 저수지마다 배를 두고 세곡을 릴레이 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일곱 차례나 옮겨 날라야 했으므로 매우 번거롭고, 미곡 손실 또한 이만저만 아니었다. 뾰쪽 수를 찾고자 태종 임금이 직접 태안을 두 차례 방문했으나 실효성이 없어 ‘저수형’ 판개운하는 중단됐다. 

그러던 중에도 안흥량의 대형사고가 잇달았다. 고심 끝에 중종 임금은 운하의 위치를 변경했다. 그곳은 ‘蟻項 굴포’인데 우리말로는 ‘개미목 판개’다. 오늘날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와 송현리 사이에서 확인된다. 이곳에는 1522년에 3천 명의 인력을, 1537년에 중(僧) 5천 명을 투입해 한 때 준공됐다고 만세를 불렀으나 막상 通水해보니 시원치 않아 사실상 실패였다. 

이렇게 개미목마저 실패하자 옛 판개 운하가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번에는 또 다른 방식이 도입됐다. 이른바 김육(1580∼1658년)의 設倉陸輸策이었다. 남쪽 천수만과 북쪽 가로림만 양안에 창고를 설치하고, 창고 사이 육지는 우마차로 운반하는 방식이다. 현종 10년(1669년)에 송시열도 거듭 제안해 시행됐지만 이 또한 싣고 내리고를 반복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곧 폐지됐다. 이로써 안흥량의 난행을 벗어나려는 500여 년의 판개 노력은 모두 마침표를 찍었다.

한편 ‘꿩대신 닭’이라고, 소나무가 편안히 잠자고 있던 안면곶(安眠串)으로 관심이 쏠렸다. 보령 출신 유명한 풍수가 토정 이지함(1517∼1578년)이 아름다운 안면도에 놀러왔다가 한 마디 뱉었다. “나중에 반드시 안면곶 뒷 줄기를 파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말이 씨가 되었을까. 태안의 향리 방경령이 충청감사 김육에게 판목운하 건설을 건의했다.

이에 따라 1638년 무렵, 운하공사가 시행됐다. 그 결과 ‘안면곶(串)’, ‘안면소(所)’, ‘안면도(道)’라고 불리던 이곳은 ‘안면도(島)’라는 섬이 됐다. 특이하게도 이전의 공사와는 다르게 공사상의 난맥을 지적하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일꾼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만들어졌다는 신털이봉 설화만 전한다. 별다른 문제없이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끝났음을 알 수 있다.

안면대교와 판목운하. 사진=박종삼

이런 판목운하는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데, 태안군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경계에 존재한다. 육지간 거리는 약 200m이다. 이는 서산지역 세곡의 안전한 운송을 위한 운하이다. 천수만에서 출항한 배가 판목운하를 통과해 안흥포구로 직행하게 돼 약 60㎞가 단축되는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안면도 주민들은 안면대교가 건설되는 1970년까지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불편을 겪어야 했다.

태안지역의 운하공사는 오늘날 잣대로 보면 ‘두어 달이면 가능한 사소한 문제’ 때문에 실패를 거듭했다. 하지만 난행을 극복하기 위한 끈질 긴 집념과 의지 그리고 자연에 대한 도전정신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라 하겠다.

변남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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