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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 섬 그곳에 남사당패가 왔다, ‘발광대놀이’로 밤을 지샜다
외딴 섬 그곳에 남사당패가 왔다, ‘발광대놀이’로 밤을 지샜다
  • 송기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 승인 2012.06.18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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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이야기 ⑩ 전남 완도군 생일도

전남 완도군의 외딴 섬 생일도 전경.
멀리 떠있는 돛단배에서 바람결에 징소리 북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온다. 징소리는 30리를 가고, 북소리는 10리를 간다고 했던가. 북소리가 들리니 10리는 되는가보다. 배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소리가 요란스러운데, 그 안에 울긋불긋 색동옷을 입고 징, 꽹과리와 북장구를 치는 사람들이 한껏 흥을 내고 있다. 남사당패였다. 조그만 섬마을에 들어온 남사당패는 밤새도록 줄타기와 꼭두각시놀음, 무동놀음을 하고 풍물을 울려댔다. 그들이 돌아간 후 마을의 청년들과 아이들은 얼굴에 광대를 쓰고 남사당 흉내를 내느라 밤을 새웠다. 여기까지는 필자의 상상이다.

영화 「왕의 남자」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남사당패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남사당패는 전국을 유랑하면서 줄타기와 재담, 극, 노래, 풍물 등을 선보였던 대표적인 유랑연희패다. 그 남사당패 이야기를 서남해의 섬마을에서는 어디서든 들을 수 있다. 그리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섬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대개 남사당이 섬을 유랑하면서 예능을 전수해주었다는 내용인데, 남사당이 들어왔다가 정착했다거나 섬 주민이 남사당을 따라나섰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을 수 있다. 실제 음악학적 연구에서 향토민요에 수용된 사당패소리가 전라도와 서남해 도서해안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유랑연희패들이 서남해 섬마을을 드나들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는 완도 생일도에 전승됐던 발광대놀이를 소개해본다. 생일도는 전라남도 완도군 생일면에 속한 섬으로 면 자체는 2개의 유인도와 7개의 무인도, 8개 마을로 구성돼 있다. 농경지가 적어 경지정리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 면적이 3헥타르를 넘는 곳이 없다. 따라서 2010년 현재 900여명의 인구 중에 80%가 전복양식이나 다시마, 미역 등의 해조류 양식업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평범하고 작은 섬에 남사당패와 관련된 발광대놀이가 전승됐다.

생일도의 발광대놀이는 발에 광대를 씌우고 노는 광대놀이다. 이 발광대놀이는 정월에 마을농악대가 밤굿이나 파방굿을 할 때 연행됐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까지만 해도 활발하게 연행됐으나 지금은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발광대놀이는 발에 광대를 씌우고 노는 광대놀이다. 사진은 2004년 1월 생일도에서 당제 ‘열두당산굿’ 모습이다.

농악대가 밤굿이나 파방굿을 치는 중간에 갑자기 “발광대 나온다!”라는 소리가 나면 농악을 맺고 판의 한쪽 구석을 틔운다. 그러면 발에 광대를 씌운 발광대가 마당으로 나온다. 발광대놀이가 시작되면 발광대 옆에 쇠, 장구, 북이 각각 한 명씩 나와 반주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발광대는 농사짓는 흉내를 낸다. 발광대를 놀리는 사람은 나뭇가지를 움직여 모를 찌고 심는 동작을 하며, 발을 들고 세우면서 허리를 숙였다 펴는 동작을 한다. 모심는 동작을 하다가 허리가 아프면 허리를 펴는 흉내를 내고, 춤을 추고 상모 돌리는 동작을 하기도 한다. 발광대놀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는 모심을 때 부르는 상사뒤여 노래이다.

아 헤야 에헤루~ 상~사 뒤여
여보시오 농부님들 이내말을 들어봐요
아 헤야 에헤루~ 상~사 뒤여
서마지기 논배미가 반달만큼 남었네
아 헤야 에헤루~ 상~사 뒤여

 생일도에서 연행되는 발광대놀이는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79호로 지정돼 있는 발탈연희와 유사하다. 발광대나 발탈 둘 다 발에 가면을 씌우고 반등신 형상의 인형을 만들어 놀린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연희자가 발로 인형의 얼굴을 움직이고, 양손에 인형의 팔로 기능하는 막대기를 쥐고 양팔을 조종하는 것도 같은 방식이다. 다른 점은 발탈의 경우 발탈꾼이 인형을 놀리며 재담을 하지만, 발광대에서는 동작만 할 뿐 재담을 하지 않는 것이다.

생일도의 발광대가 어디에서 유래되고 전승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을에서도 육지로부터 걸궁패가 들어왔었다는 것을 말로만 들어 알고 있을 뿐, 그 걸궁패들과 발광대가 관련되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발탈과 유사한 연희이고, 서남해지역에 일반화된 놀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유랑연희패와 관련지어 유래를 추정할 수 있다. 발광대가 발탈을 연행하던 유랑연희패로부터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발광대와 발탈은 예능의 구현에서 차이를 보인다. 유랑연희패들마다 조금씩 다른 형태의 연희를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할 때 생일도의 발광대는 유랑연희패들의 영향을 받은 후 토착화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일도의 발광대는 서남해 도서해안지역의 문화소통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섬마을에서는 남사당패 등의 유랑연희패를 초청하거나 받아들여서 예능적 수요를 충족하고 신명을 발산하는 계기로 삼았으며, 유랑예인들은 자신의 기예를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면서 섬 마을과 유랑연희패는 예능의 공생을 구축했다.

송기태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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