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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26. 청구대학’ 주춧돌에 새긴 문구와 太平洋을 오간 父子들의 편지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26. 청구대학’ 주춧돌에 새긴 문구와 太平洋을 오간 父子들의 편지
  • 교수신문
  • 승인 2010.04.2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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也靑과 나 
 
나는 1950년 5월, 6.25 事變 한 달 전에 高麗大學을 나오고(哲學科), 戰火속을 걸어서 집까지 돌아왔다. 나는 靑丘大學으로 나오라 하실까 여겼는데, 商業高等學校의 校長으로 계시는 옛날 啓聖時節 恩師가 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곳으로 보내셨다. 靑丘大學에는 이미 伯父님과 叔父님이 敎授陣에 계셨으니, 나는 학장의 自肅人事의 본보기가 되는구나 싶었다. 내 친구들은 그 학교에 취직했다. 나는 避難온 高麗大學 敎授들을 招待하여 집에서 待接하시게 하는 등 側面傍助를 하고 있었는데, 1954年 입학시험때는 손이 모자라 學校에서 내게 응급 구원을 해 왔다. 일이 끝나고 내게도 한 강좌를 맡겼는데, 이것은 분명 남들이 建議를 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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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 유학길에 오른 것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버지 덕택으로 여길 것이나,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어느 날 신문에서 文敎部에서 미국 Montrey 의 軍事外國語學校에 보낼 한국어 강사를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고, 서울 가서 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명단도 신문에 나서 다음 通知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것이 龍頭蛇尾로 끝났다. 나중에 들은즉 駐미韓國大使가 任意로 現地에서 人員을 調達하고 本國의 文敎部는 망신을 시킨 것인데, 그 때 政府部處間에 하는 일들이 이랬다. 文敎部는 이 事態變化에 대하여 변변한 謝過通知 하나 없었다.  그러나 내가 미국 가게 돼 있다는 것은 이미 소문난 일이라, 나는 들뜬 기분을 그냥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사귀던 미국 兵士에게 探問을 하던 中,  뉴욕의 New School 이야기를 듣고 귀가 솔깃해져서, 여기와 편지 往來를 하던 끝에 드디어 장학생 입학을 따냈다. 장학생이란 명목이 있어 飛行機票는 집에서 받아 내고, 그때 서류상 最難關이었던 미국內 財政保證人으로는 그 미국 친구, Stanley Matoren 君의 신세를 졌다.  미국에 가서는 한 때 Rothschild 재단의 혜택을 받은 일이 있으나, 그 外는 소위 ‘아르바이트’ 로 꾸려나갔는데, 가장 오래 종사하고 내게도 의미있는 職으로는 Chinese Society Bibliography Project 에 參與하여 中國社會에 관한 文獻을 涉獵한 일이다.  내용과 평가를 code 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덕택에 Columbia 大學을 내 집 같이 드나들고, 내 Ph.D. 論文 着想도 그 도서관에서 하고, 文獻도 거기서 많이 이용했으니 인연이 깊다 하겠다.  그러나 New School 에서는 끝까지 장학생 신분을 維持했다. 

New School  大學院에 흥미를 가진 것은, 이야기를 들으니 그기는 미국안에 있는 한 작은 쌈지 구라파 같은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구라파에서 Nazi 독일의 횡포로 猶太人 기타 良心學者들이 핍박을 받고 있을 때 Alvin Johnson,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學長이 미국 재벌을 설득하여 그들을 救出하고 대학원을 차린 것이다. 처음에는 독일계의 University in Exile 과 불란서계의 Ecole Libre des Hautes Etudes 로 시작했는데, 불란서계는 分離獨立하고, 지금은 독일계가 Graduate Faculty of Political and Social Science 란 이름으로 남아 있어, 독일政府로부터도 過去 Nazi 행위에 대한 贖罪로 某種의 惠澤을 받고 있는 줄 안다.  New School 자체가 원래 Columbia 大學의 歷史學科 敎授들이 學問的 見解差異와 反戰思想(當時 一次大戰)으로 獨立해 나와서 차린 學校로, 思考의 舊틀을 깨고 새로운 試圖를 해보려는 학자, 예술가들에게 門戶開放하는 것을 趣意로 發足한 것이다. 1920年代 미국 학계, 예술界의 어떤 새로운 움직임을 알린 학교로 기억되고있다. (이 말은 그 때도 大學은 一般的으로 閉鎖的이었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現代舞踊을 創始한 Martha Graham, 詩人 T.S. Eliot, Gestalt 심리학의 唱導者 Wertheimer, 著名한 인류학자, Levi Strauss 등이 거쳐갔고, 내가 도착한 後의 학자 가운데는 Alfred Schuetz, Hans Jonas, Hanna Arendt 등은 국내에도 알려져 있는 이름이다. 近來 New School 을 New School University 로 고쳤다가, “새로운” 학교의 “전통”을 지킨다고 다시 New School for Social Research 로 돌아 갔다 하나, 옛 모습은 아닐 것이다. 내가 출국절차를 밟던 1950年代 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書類審査하는 擔當은 “大學이라면서 이건 College 도 아니고, University 도 아니고 뭐야” 하고 당황했다. 내가 가보니 과연 독일 老學者들이 교수진의 主宗을 이루어 있고, 이들은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미국과의 이질성을 誇示하고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그 “亡命大學” 이란 始初의 이름이 내 기분과 상통했다.

1959年 也靑이 미 국무성의 Foreign Leaders Visiting Program 으로 미국에 오셨을 때, 前章에 언급한 바, 나는 마침 아르바이트로 이런 招請訪問客을 위한 案內/通譯을 맡고 있던 연고로 내가 隨行을 하게 되었다.  남이 보기엔 유람하고 즐기는 기회이고, 父子가 같이 다니는 것은 부러운 일이었을지 몰라도, 미리 짜여진 스케줄을 따라 한 달을 여행하니, 우선 也靑이 건강상 無理가 있었고,  거기다가 학교를 위하여 무엇을 하나 얻어 가겠다는 執念에서 解放이 안되시니 우리는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나는 也靑의 그 workholism 이 못마땅했고,  책망도 많이 했다.

보통 미국 一周가 끝나면, 歸路를 구라파 시찰 길로 잇는 것이 常識인데, 이것도 健康 其他 문제를 두고 저울질 하다가, 막판에 런던행 항공표를 끊었으니, 구라파 內의 宿所, visa, 航空등은 전혀 준비가 없는 상태였다. 런던에 도착하고부터 Esperanto 手帖을 들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同志들에게 전화해서 안내를 받아 숙소를 정했고, 다음 旅程을 위하여 해당 영사관에 가서 visa 받고, 비행기 표 예약하고 하는 것이 다 내 몫이었는데, 파리의 경험을 가장 잊지 못한다.  밤中에 도착하여 어느 同志에게 전화했더니, 자기가 여관을 경영한다기에 좋다고 가보니, 영낙없이 파리의 旅人宿이랄까,  寢臺라는게 兵士침대, 숙박료가 一泊에 1弗이니 상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고나니 등이 배긴다. 낮에 나와서 살살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조금 나은 곳으로 옮겼는데(Rue de Mozart 근처), 여기는 그래도 보통 침대도 있고, 당시 말만 듣고 보진 못했던n 비데까지 있는데 一泊에 2弗이 좀 안되니, 호텔치고 그 等級은 可想이다. 목욕을 하려면 일주일 전에 예약하란다. 그러나 이 골목안의 古色이 蒼然한 집은 1930年代의 불란서 영화, “파리의 지붕 밑”의 바로 그 현장이라, 우리는 그대로 그 韻致를 질겼다. 그런데 정부의 어느 하급 공무원이 이런 日當으로 출장을 가려할까.

로마에서 묵은 곳도 소위 ‘빵시옹,‘ 여기서 也靑은 동쪽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나는 남아서 이태리를 좀 더 보고 가기로 처음부터 얘기가 되어있었는데, 그 前날 밤 也靑은 내 手中의 돈을 다 내노라고, 가다가 香港에 둘러서 工科 機器를 사 가야 한다고 하시더니, 50弗을 남겨주신다. 비행장에서 餞送을 하고 빵시옹에 돌아 와보니, 거기에 계산할 돈이 10弗 이나 남아 있지 않는가. 객지에서 숙박과 식대를 어떻게 하라고?  이럴 줄 알고 나는 뉴욕에서 올 때 200弗을 감추고 가져왔기에 며칠을 더 이태리를 구경하고 뉴욕에 돌아 갈 수가 있었다. 1977年 아버지 病患으로 내가 歸國했을 때다, 내가 볼 일이 있어 外出을 하려고 하니, “서울에서 볼일 보려면 택시를 타야 하니이라” 하시기에 깜짝 놀랬다. 이 때까지 이런 配慮의 말씀을 들어 본 일이 없었으니 말이다. 也靑에 있어서 家族이란, 靑丘大學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犬馬之勞를 부려먹어도 無關한 存在였다.

지금은 作故하신 大邱의 某 大學  總長님은 啓聖中學 시절 우리 영어 선생님이셨는데 나를 뉴욕에서 보시고, 왜 너희 집안에서는……? 疑訝하셨다. 그때 그 분은 二世를 留學시키면서 자기 後繼者를 기르고 있었을 때다. 우리 집도 보아하니 비슷한 狀況인데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하신 거다. 첫째 나는 내 발로 미국에 왔지, 靑丘大學 學長이 보내서 온 것이 아니란 것부터 아실 理가 없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의 프라이드가 있고 나는 나대로 傲氣를 피워, 서로 依支같은 것은 절대로 표면상은 없었다. 나는 위에서도 말했지마는 靑丘大學 以上의 문제가 胸中에 도사리고 있었다. 해방후 겪어왔던 나라 전체의 문제가 滯症같이 가슴을 눌러 있어, 한국을 떠날 때 나를 반드시 靑丘大學과 연결을 지우질 않았다. 그렇다고 아버지 하시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지 않은 것도 아니고, 심부름이라면 기꺼이 해드리면서도 그랬다. 아버지는 속으로는 은근히 바라는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必要를 안 느끼는 동안은, 언제나 그랬듯이, 자식은 放牧主義였다.  훗날에 “나는 네가 좀 더 있다가 미국 가기를 바랐는….” 하실 때 내게는 약간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 때 말씀을 하실 거지… 하고 싶었으나,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中에도 나는 먼데서나마 아버지에게 도움되는 말씀이나 정보를 보내는 役割은 自任했다. 그러나 때로는 가시돋친 말을 해서, 지금 생각하니 죄송하기 그지없다. 나중에 “아비에게는 責善을 안 하는 법”이라는 옛말을 책에서 보고 내 가슴이 찔린 듯 했다. 아버지에게는 잘못을 따지는 법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딴에는 아무리 忠誠으로 나온 말이라도 度가 지나쳤을까 후회도 된다.

한번은 “젊은 先生들이 날보고 아버지 같다고 한다”고 편지에 쓰셨다. 이것은 내가 人和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한 것에 대한 답이었는데, 나는 되려 꼬집었다. 그걸 믿으시느냐고. 내가 옳았기는 옳았다. 처음 어느 不平敎授로부터 딴 주머니를 찬양 의혹을 받았을 때 그들을 충분히 降伏시키고 나서도 “이제는 금이 갔다. 처음의 오붓한 기분이 아니다” 등등 心傷해 하시는데에 也靑의 脆弱點은 있었다고 나는 본다. 靑丘살림이 커가면서 이제는 다른 段階에 접어든 것을 인식하고, 합리적으로, 냉철하게 대처하는 대신, 감정으로, 감상으로 흘러가는 바람에 인간관계에 도리어 손해를 보신 것이다. 내가 未熟했던 점은 父子間 書信에서 사회문제, 시국문제를 들먹거리면서, 그 사회에서 事業을 하려면, 그 사회에 살아남으려면, 運身과 思考에 限界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考慮하지 않을 때가 있었다는 것일게다. 柳林先生도 歸國하여 獨立勞農黨을 만들었을 때 어떤 사람이 無政府主義者가 왜 政黨은 만드려고 하나고 하니, “오뉴월에 합바지 입고 나오는 소릴 하지마라” 고 쏘아주었다고 들었는데… 也靑이 學校를 떠시고는 결국 民主守護運動에 投身을 하셨다.

내가 進言을 한 것 中에 지금이라도 되풀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새 歷史를 창조”하시라는 말일 것이다. 나는 서울에서 大學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旣存秩序에 줄서지 마시라고 누누이 말씀드렸다. 지금 서울에 모델로 삼을 學校는 없다고. 靑丘大學이 잘하면 序列의 우두머리에 선다고. 그래서 “새 역사의 창조자” 라고 親筆로 쓰신 돌이 靑丘大學 校庭을 장식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소위 嶺南大學 캠퍼스 어느 구석에 놓여 있다. 지난 2005年  EBS 放送局에서 嶺大 캠퍼스에서 靑丘大學 案件取材를 했을 때 PD가 지나가는 學生들을 잡고 그 돌의 由來를 물으니, 단 한 사람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새 역사의 창조”는 지금은 흔한 語套가 되어 있어, 或 다른 이는 자기가 그 始初라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우리 모두가 놓인 歷史的狀況에 이런 발상과 표현은 同時에, 여러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靑丘大學 그 돌에 새긴 글만큼은 太平洋을 오간 父子間 편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也靑 自身도 그건 내가 1948年 俗稱 夜間大學 開學 때에 한 말이다고 하셨으니, 그 뜻으로 보면 果然 그때도 같은 말을 하셨다. 但, 내 趣向으로는 “새 역사의 창조자” 로 名詞로 끝나기보담, “새 歷史를 創造하라” 아니면 “…하자” 라고 動詞로 끝나는 文句를 選好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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