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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16. 훈수꾼들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16. 훈수꾼들
  • 교수신문
  • 승인 2008.12.3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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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훈수꾼들
 
 교육부와 大學運營本部가 惰性으로 維持하는 體制를 言論이 그대로 반영하면 그것이 사회적 현실로 굳어지고, 一般사람들은 自然히 이것을 받아드릴 뿐이다. 이런 반성 없는 意識狀態에서 곧잘 훈수가 나온다. 모두 나름대로 嶺南大學의 將來를 위한 意見으로 내놓는데, 인식의 바탕이 잘못돼있으니 설령 善意의 발언이라도 빗나가는 것이 일수다.  나는 이것도 是正해주는 일을 떠맡아야 하니, 싸워야 할 상대는 官廳과 大學 現役뿐만이 아니라 全方位다.  다음, 이야기가 되풀이 되는 것을 무릅쓰고 그 例를 들어본다. 훈수꾼들의 原文은 省略하고 筆者의 反駁文만 收錄하나, 이 글을 통하여 그들의 발언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기사] ⑮ 정상화한다면서(2)

[관련기사] ⑭ 정상화한다면서(1)

[관련기사] ⑬ 判定勝

[관련기사] ⑫ 深宮에 갇힌 “行動하는 良心”(2)

[관련기사] ⑪ 深宮에 갇힌 “行動하는 良心” (1)

[관련기사] ⑩ 國政監査와 判定勝

[관련기사] ⑨ 時代의 證言과 參與
[관련기사]
⑧ ‘工專’‘靑丘’ 이름에 집착한 사연 … 설립자, 구체적 설계 있었다

[관련기사] ⑦ ”20년 피땀어린 학교 되찾기 위해 百方으로 뛰었지만 ”
[관련기사] ⑥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 … “사학 설립자 노력 정당하게 대접해야”

[관련기사] ⑤ 大邱에서도 의아해했던 ‘청구-대구 합병’… 설립자 의사 무시

[관련기사] ④ 陶南 조윤제 박사 ‘다시 일어서자’ 권유해 희망 가졌지만

[관련기사] ③ 이사장 자리 비어있던 ‘진상 각서’ … 故人의 말을 직접 인용한 까닭
[관련기사] ② “1967년 6월 신축 校舍 붕괴 … 위기 몰린 신경영진, 惡手 던져”
[관련기사] ① “2代 理事長, 설립자 배신하고 靑丘를 청와대에 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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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寄稿                                            2006 8/3
“嶺南大 財團 ‘正常化’에 관하여”
-- 正常化는 道義와 廉恥의 正常化부터 --

 日前 이 오피니언 칼럼 (7/19)에서 그 筆者(黃平교수)는 1988년 영남대학의 國政監査를 재단 부정과 입학비리를 척결 하기 위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었다. 그러나 實은 그 감사에서는 학교의 成立過程에 있어서의 權力의 非理와 正體性이 도마에 올랐으니, 문제의 輕重으로 보아 당연히 이 正體性의 문제가 경영상 하자보다 優位를 차지하는 것이 아닐까? 이제 敎育部(私立大學 支援課)가 드디어 영남대학의 ‘正常化’를 추진하게 되었다면,  이런 道義的 次元에서 시작해야 할 터인데, 該當課에서 내린 지침에는 이것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학교 구성원, 재산출연자 및 학교발전에 기여한 자 등, 이해관계인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그 방안을 연구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하면서, 設立者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혹자는 ‘이해관계인’이란 말에 설립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으나,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明示를 아니한 것은 역역히 실수였다. 그래서 내가 이것을 該當課에 질문하니, 課에서는 그 질문서를 ‘公文處理’하여 임시이사회에 회부하였노라고 회신이 왔다. 이것이 지금 영남대 정상화 추진을 둘러 싼 現在進行型의 상황이다.

  영남대학의 前身중 하나인 靑丘大學은 1948년 大邱時報 독립운동국의 성인대중을 위한 ‘학술강좌’, ‘夜間大學期成會,’ ‘文理科專門學院’의 단계를 거쳐, 1950년에 4년제 대학 인가가 난 이래 1966년 末까지, 18년 동안 야청(也靑)최해청 선생이 創設者이자 求心點이었다. 그가 필생의 사업으로, 心血을 기울여 육성한 학교였다. 학교라는 것이 사회의 公器라는 사실을 감안하고서도, 적어도 대구 바닥에서는 그 학교는 최 아무게의 학교로 불리워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1967년 6월 신축중이던 校舍가 붕괴하고 人命被害가 엄청나자 당시 운영자들은 당황했다...... 設立者에게는 일언반구없이 노산 이은상씨를 중개로 靑瓦臺에 進上했다. 당시 주역들이 지금은 그 행위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는 것 만 해도 다행한 일이다.

  大邱大學은 설립후 우여곡절 끝에 재단 측에서 자진 상납했으니, 청구대학과는 범주가 다르다. 하여튼 이것을 奇貨로 당시 청와대에서는 박대통령 퇴임 후의 安息處로 嶺南大學校를 만들었는데, 이 권력에 의한 통합에 대하여 당시 ‘每日新聞’主筆은 社說에서 여러 차례 懷疑와 의구를 대서특필했고(1967 12월), 也靑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저 발버둥을 쳤으나, 청와대는 鐵門을 내리듯 접근을 막아버렸다.(한때는 고향 선배로 서울까지 모셔다가 諮問하던 사이었음에도). 정보부는 모셔가서 공갈협박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야청은 1977년 恨을 품고 타계하였다. 당시 얼어붙은 겨울共和國에서 일어난 그 허다한 非理와 非情의 事例에 比하면 이런 일쯤 크게 놀랄 일이 아닌 그 동안 세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바라던 민주개혁의 움이 조금은 틀어나고, 과거에는 입밖에 내지 못하던 일들이 파헤쳐지고, ‘眞相調査‘가 진행되는 요즘 세상이다. 영남대의 정상화 추진도 이 봄 기운의 산물이다. 하나,...... 영남대학의 경우 그 ‘정상화’ 試圖는 아직도 옳은 괘도를 못찾고 있는데, 그 동안 세월의 흐름이 罪인 것 같다.  지금 정상화의 수습을 나선 사람들이 이미 그 당시 事案에대하여 잘 아는 年輩가 아니다.  그러다보니 그 때 일이 마음에 닿지를 않는다. 모르면 알려고 노력을 해야겠는데, 어디 보통 사람의 심리가 그렇더냐. 모르는 것은 알려고 하기보담, 도망해버리는 것이 일수다. 거기에다 그들은 그 자리에 임시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니, 어제와 같이 오늘 또한 大過없이 넘기면 그만인 것이다. 1988년 國政監査後에도 줄곧 ‘王立大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 지난해에도 국회에서는 ‘校主 박정희’문제가 대두되었건만(白元宇 의원), 지금 교육부 該當課나 臨時理事會 사람들에게는 거의 듣지 못한 이야기들이다. 이래서야 正義가 운다. 희생자는 어찌 하란 말이냐. 
 
 그래도 교육부의 意圖만큼은 “이해관계인의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현실성 있는 합의안”을, “이로 인하여 학내문제가 다시 야기되는 일이 없도록” 바라고 있다. 이 정당한 바램이 실현되기에는 무엇 보다 道義的 接近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물며 ‘敎育部’가 아닌가? 次世代를 가르친다는 大學이 아닌가? 敎授들도 지금 하늘에서 떨어진 橫材를 두고 그 처리를 論하는 경우는 아닐 것이다. 여러분이 成長하기 전에, 혹은 나기도 전에 心血을 기울여 그 학교를 세운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은 可히 염치(廉恥)를 아는 第一步라 하겠다. 그리고, 음수사원(飮水思源)이라 했다, 물을 마셔도 먼저 그 源泉을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東洋敎育의 根本精神이기도 하다. 日前 바로 이 신문, 어느 칼럼에서 글쓴이는 大邱사람들의 意識이 바뀌어야 지역의 발전과 미래를 말할 수 있다는 결론을 강조하고 있었다(7/21 박병선). 내게는 이 말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민족의 장래는 학생들에게 道義를 가르치는데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영남대학의 ‘正常化’는 어떤 모습으로 학생들에게 본을 보여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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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글은 “嶺大同窓會報”에 난 原文(2006 10月號)에 대한 나의 是正文이었는데 哀惜하게도 會報에 실려주지를 안했다. 原文의 著者가 世交가 있는 잘 아는 분이기에 나는  빗나간 觀點이 더욱 마음에 걸렸다. 多少 기나마 곧 이어질 이야기의 片鱗을 미리 보여주는 보람도 있어, 供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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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歷史 記述에 대하여 -- 嶺南大學校의 경우>

 歷史의 變遷은 사람의 感情과 義氣의 얽히고 설킴이다. 우리나라의 近代歷史를 그저 日本이 들어와서, 우리나라 保護를 自任하여 淸軍에 이기고, 露軍에 이겨, 乙巳條約을 거쳐, 1910年에는 韓日合邦을 했다가, 1945년 일본이 世界大戰에 敗함으로써 해방이 되었으나 강토는 분단이 되었다고 敍述한다해도 사실은 사실이니, 멋모르는 第三者에게는 그냥 통할 것이고, 일본사람들 마음에는 들겠지. 그러나 이것이 어디 우리의 역사인가? 이런 식으로 역사를 기술한다면, 天人共怒할 宮闕侵入事件은 어디 있으며, 乙巳條約은 왜 늑약이라 하며,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등 기타 부지기수의 抗日先烈들의 恨과 憤과 눈물은 어디 있는가? 역사는 感性의 기록이다. 특히 亡國의 역사는 그러하다. 實證이 缺如되어도 안되겠지만, 實證主義 歷史學이 批判받는 理由도 여기 있다. 大邱에 半僧反俗의 어떤 분이 계셨다. 老境에는 절도 차리셨지마는 젊을 때는 無政府主義 진영에서 血氣 발발하게 抗日運動을 하신 鬪士였으며,  靑丘大學 설립자 也靑선생과 요먼저 이 紙面에 寄稿를 하신 신성구 同門의 先親의 同志이기도 하셨다. 이 분의 碑文을 보고 也靑선생이 “사람이 죽었다고 이렇게 맘대로 글을 써서, 흡사 그분의 生涯가 하나의 착하디착한 佛者에 그친 양 만들면 어떻게 하느냐”고 개탄하신 것을 떠올리면서 이 글을 草해본다.

 嶺南大學校는 也靑선생의 恨이 맺힌 곳이오, 자칭 ‘生埋葬’을 당한 곳이다. 그분은 그 학교를 “臟物 학교”라 일컬었으며, 그것이 臟物이 안되게 하기 위하여 지금은 “校主”가 되어있는 박정희씨를 만나러 東奔西走하다가, 종내 열리지 않는 鐵門을 바라보듯 恨을 품고 돌아가셨다. 민중의 힘이라도 빌려보려고 소위 “연판장”을 작성하니까, 정보부에서 모셔가 공갈협박을 했다. 박씨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에는 고장 선배로 禮를 갖추어 초빙하여, 자문을 하던 관계였음에도 말이다. 

 靑丘大學은 학교를 만들려고 돈을 모우고 이사회가 구성되어 생긴 학교가 아니다. 赤手空拳으로, 無에서 有를 만들어낸 덩어리라 해서 하나도 과장이 아닌 경우다. 그것은 創業을 한 분의, 文字 그대로, 18년의 피와 땀이 고인 결과물이었다. 지금 통례로 돈을 얼마나 出捐했느냐의 잣대로는 겨눌 수 없는 精神과 獻身의 産物이었다. 일찍이 大邱壽昌小學校 상급생일때 3.1운동을 맞아, 아이들을 이끌고 거리로 나오다가 제지당하였으며, 大邱高普(지금 慶北高)재학시에는 오만한 일본인 교사 배척운동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퇴학을 당하여 일본 廣島에 유학하셨으나, 畢業도 못한채 身恙으로 돌아 오셨다. 일제시대에 맘끝 활동을 못하신 恨을, 이제 해방 후에야 민족에 대한 그 빚을 갚는다고 靑丘 일에 몸을 바쳤노라고 述懷하신 바가 있다.

 解放의 기쁨과 동시에 벌어진 미군정하 소위 通譯政治의 혼탁한 분위기에, 1946년에는 10.1 사건이라는 大邱만이 겪은 홍역에, 과거 附日분자들의 발호에, 당시 大邱時報 社長이던 張仁煥先生은 時局을 함께 걱정하자는 朔望會(초하로, 보름의 모임)를 만드셨다. 也靑선생도 참여하신 이 모임에서, 時日이 흐름에 따라 사람들이 결석을하고, 나중에는 張 사장과 단 둘이만 남아 얘길하다보니 의기투합하여, 大邱時報社에 “獨立運動局”이란 간판을 걸고, 그 국장으로 앉게 된 것이 발단이었다. 명색이 해방은 한 후인데 왜 새삼 “獨立”이냐고 필자 자신도 질문한 적이 있다마는, 그후 우리 국민들의 행태로 봐서는 그 이름이 마냥 時代錯誤라 할 수 없다는 느낌도 든다. 하여튼 也靑이 털어논 “國民再敎育”의 필요성이 張 社長의 공감을 얻어, 우선 향토선열의 유적조사에 착수하는 한편, 덜뜬 민심을 배움의 정진으로 갈아 앉혀야겠다고 成人大衆을 위한 학술강좌를 개최한 것이, 그때는 몰랐지마는, 靑丘大學의 濫觴이 된 것이다. 그때가 1948년 일월,  시민의 호응이 그렇게 뜨거울 줄이야 개최한 사람도 사실 놀랐다. 청중에 떠밀려서 드디어 장기적인 施設을 만들게 되었는데, 법적인 具色을 가추어 “理事會”도 초빙해 앉히고, 文敎部에 허가도 따내고 했지마는, 그래서 공동체가 형성되기는 했지마는, 創業의 CEO 로서 大邱에서 ‘靑丘大學’ 하면 모두가 也靑이 하는 학교로 認識했다해서 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때도 “學園謀利輩”라는 유행어가 돌아다닐 만큼 私立大學이 亂立하고 그중 어떤 것들은 과연 謀利의 소굴이 되기도 했다..... 靑丘大學은 이처럼 한 個人이 시작하고, 個人이 자기 人生을 건 학교였다는 점에서, 그것이 좋든 나쁘든, 처음부터 여러 사람이 모여서 시작하고,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게되는 大邱大學(구)과는 判異(판이)했다.

 財政難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18년을 꾸려오면서 항상 파탄상태란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공납금과 銀行起債로 그럭저럭 수지를 맞춰 오다가 1960년 이후  위기를 맞은 것은 經理職員의 不正사껀때문이었다(내가 유심히 探問하기도 했는데, 당시 직원, 교수들로서 이걸 否認 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다가 팽창주의 -- 5.16 과는 아이러니컬하게 최고권력자로부터는 극진한 환대를 받은 반면, 아래 軍人 아저씨들이 업적을 하나 남기겠다고 덤벼들은 ‘혁신작업’에서는, 학교의 ‘物理的 條件’이 부족하다는 명목으로 이미 4년제 대학이던 것이 2년제로 격하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것을 만회하느라 서울에 오래 체류하는 동안(이건 학교의 士氣에 관한 문제로 일부러 公開를 안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경리직원이 不正을 저질러 負債가 갑자기 天文學的 수짜로 오르니,  분노하셔 서울에서 計理士(신현국씨)를 초빙하여 자체감사를 시작했다. 이 와중에도 한 편으로는 효목동으로 캠퍼스를 옮겨 校舍를 신축하고, 어렵사리 Colombo plan 의 혜택을 따내어 병설학교를 신설, 또는 청탁이 들어온 대로 남의 학교를 인수하는 등, 한 마당 일을 동시에 벌인 것은, 기會도 스스로 다가왔지마는, 군인 아저씨들에게 받은 物理的 評價에 대한 傲氣도 작용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이 팽창주의를 후회도 하셨다 - 청구는 청구대로의 갈 길이 있는데, 하고.

 이 짬에 자기가 초빙해 앉혀 놓은 理事會를 보강하려고(이사들은 그들이 출자한 돈 이상을 벌써 찾아 갔다고 한다) 재편성하려하니, 理事들은 전례 없이, 갑자기 그들의 법적우위성을 宣言하여, 1966년 12月30日 저녁, 일방적으로, 학장 경질을 선언한다(禮儀, 道理上으로도 그러하거니와, 이때는 設立者가 學長을 겸한 특수한 경우인데, ‘理事會’의 규정만 있고 ‘設立者’에 대한 법적인 보호조례가 없었는 것도 문제였지 않았나싶다). 영락없이, 믿는 도끼에 발을 찍힌 꼴이었다. 분을 품고 5個月餘 칩거하는 동안 학교에서는 ‘名譽學長’으로 예우하겠으니 뒤에서 지도나 해주십사고 尋訪도 오고 했다하니, 이때만 해도 당시 학교를 차지한 사람들이나, 也靑先生이나 ‘靑丘’의 存續與否에 대해서는 꿈에도 의심을 해본일이 없었을 것이다.

 벼락은 1967년 6월 15일 正午에 떨어졌다. 공사중인 신축 교사가 붕괴하여 人命에사상자까지 난 사고로..... 되레 설립자의 등장을 차단하고 자기네끼리 수습을 하다가 여의치 않으니, 궁여지책으로 청와대에 구원의 손을 뻗힌 것이다. 설립자의 出現을 기피한 것은 ‘66년末에 3층 설계로 착수한 공사를 임의로 5층인지, 6층으로 증축을 했으니, 설립자가 나서서 원래 설계를 밝히면 범죄사건이 形成되는 것이다. 이로 부터 설립자를 배신한 理事들, 교수들, 노산 이은상씨 등이 등장하고 청와대에 진상교섭이 벌어진다.  미우나, 고우나 平地에서 학교를 일으키고 18년 동안 키워온 덩치를, 어떤 교수는 ‘아버지’와 같이 모셨다고 하는 그 사람에게는 일언반구 상의없이 엉뚱한 곳으로 갖다  바치니, 也靑의 심정이 어떠 했겠는가?  이제는 구구하게 교수들을 상대로 따질 겨를도 없이, 잘 아는 박정희씨를 만나 “내 말 좀 들어보소”고 사실을 털어놓을 일만 남았다. 보따리가 청와대로 갔다는 말을 듣고 고향 親知 김성곤씨, 이효상씨, 한석동씨등을  만나 박통과의 만남을 주선을 청탁하니, 처음에는 모두 “박통이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해도 설립자 意思가 우선이지...”고 慰勞를 하다가, 2,3일만에 태도가 표변했다고 한다.  아무리 처음에는 상식적으로 판단하다가도, 청와대 태도가 그게 아니라면 그들도 그기에 따라야지 별수 있었겠느냐. 이 나라 소위 名士의 志操가 이랬다.  그러나 이 삭막한 와중에 야청에게 종시일관 조언과 위로를 아끼지않고, 교수들앞에서 官權에 의지할 發想을 의연하게 叱咤한 사람이 있었으니, 국문학자, 趙潤濟 博士였다. “진짜 경상도 사나이”라고 야청은 日記에 적고 있다.

 신발이 닳도록 이후락씨(당시의 제2인자)를 만나보고자 분주하다가 드디어 李씨가 나오라는 데가 당시 半島호텔이었다. 8月19日, 나가지말라는 동지, 나가보라는 동지, 의견이 엇갈리는데 그래도 “사람이 말을 가두어놓고 토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주로 이후락씨를 마난다고 나간 것이다. “그런데.....거기에는 구 이사진들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하여 물잔을 던지면서 ‘이 들이 부정 은폐하려고 이 같은 짓을 한 것이다’고 호통을 치고 방금 한 바탕 버러지려 하는데, 좌우에서 김성곤씨와 김인씨가 만류해서 허탕이 되어버렸다.”(遺稿,『靑丘有言』에서) 내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이때 양복 어깨의 실밥이 터졌다하니 그 狀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여기 특히 故人의 말을 직접 인용한 까닭은, 흡사 야청이 순순히 학교를 내놓은 듯한 記述을 하도 보아 왔기에, 이런 사람잡는 말을 從今以後로는 절대 못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어떤 글에서는 ‘發展的解消’란 日帝時 造語를 쓰고 있는데, 야청에게는 이런 말이 더욱 아니꼬웠다.

 이 자리에서는 우선 박통을 고문으로 하되 ‘大靑丘’를 만들겠다니 승낙을 했고, 요구조껀으로 1) 진행중인 校內 不正 감사를 끝내줄 것과, 2) 건축 倒壞사건의 원인을 밝혀줄 것, 3) 大靑丘를 만드는데 본인이 참여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 마지막 項은 當然之事이겠지마는, 1,2 項에 대해서는 범인을 당장 처벌 하고자하는 마음이니 이런 것은 2차로 미룰 것을 그랬다고 하는 이도 있었으나, 야청으로서는 학교가 財政難으로 무너졌다는 항간의 무책임한 소리에 반발하여, 그 입을 틀어막고 싶었던 것이다. 經理不正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오직하면 일부러 他地方에서 計理士를 초빙하여 자체감사를 시켰겠느냐? 그리고 靑丘 存續에 치명적 사유가 되어버린 倒壞사껀도 원래 3층 설계였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었다. 사건 당시 기자들이 한 마당 모여들었을 때 왜 당장에 설계도를 보여주지 안했느냐고, 당시 미국에 있던 자식마저 詰問 하니, 야청은 설계한 사람을 각별히 비호하고 싶어하는 어느 교수가 애걸구걸하는 바람에 때를 놓쳐버렸다고 한탄을 했다. 지금은 이 교수도, 설계자도 모두 故人이 되었지만, 집에 있는 청구 유물중에 3층 설계도는 아직도 존재한다 - 그 동안 세월의 때는 입고 있지만.  

 결국 이 1967년 8월 會議란, 야청에게는 공허한 행차였다. 이후락씨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속임수였고, 不正을 밝혀내달라는 것도 당시 청와대에는 통할 수가 없었다. 정부에서는 마침 선거를 앞두고 ‘선심’ 베푸는데 급급할 때였으니 不正 캐내는 것을 그들이 하고싶어 했겠느냐고들 했다. 이 해 末에 대구대학(구)은 자진 상납됐으니, 소위 ‘嶺南’이란 이름으로 양 대학이 통합되는데, 노산의 말대로 ‘박정희씨 下野時의 安息處’로 구상이 된 것이니. 속칭 ‘王立大學’이 빈 말이 아니었다. 야청을 ‘생매장’하고 난후 靑丘大學의 구 이사들은 이후락씨가 약속한 報償金을 못 받아 노산을 조루는 신세가 되었지만, 청구대학의 교직원들은 큰배에 옮겨탄 기분으로, 그들의 머리속에서 ‘야청’은 한갓 불편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었을 것이다.  내게는 원래 也靑의 동창생들에 대한 별난 기대와 짝사랑이 안타까워 보였다.  다만, 훗날 내가 과거 청구 風浪時節에 同窓會長 자리에 있던 吳一龍씨를 임종을 앞둔 病席에 방문했을 때, 그는 한 마디 옳은 말을 했다.  침통한 표정으로 그는 말했다. “事必歸正은  언젠가는 될 겁니다” 라고.    

 항간에서도 이 통합의 정치성, 권력성은 구설에 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걸 대표하듯 <매일신문> 사설은  “양 대학의 建學정신을 발판으로 한다면서,  대학을 세우고 육성한 사람의 참여는 왜 없느냐”고 거침없이 써댔다(’매일신문, 1967 12/17, 23). 1987년 민주화 물결을 탄 1988년 국회 文公委의 감사에서는 ‘영남대학교’의 정체성이 도마에 올라, 학교가 거듭나기 위해서는 ‘換骨奪胎’ 해야 한다는 데 입을 모았다. 近者에는 당시 進上운동을 주도한 어느 간부 교수도 그때의 잘못을 반성하여, 1) 也靑이 구성한 理事會가 하로 저녁에 也靑을 해임한다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이고, 2) 校舍崩壞사건 직후에는 학교문제를 마땅히 設立者인 也靑과 같이 상의했어야만 했다는 것 3)대구대학(구)과 통합했을 때는 적어도 也靑을 理事會에라도 모셔야했다는 등 증언을 남겼다.
 작년에는 國會 白元宇라는 議員이 아직도 영남대학교의 定款에는 박정희씨를 ‘校主’로 삼고 있는 문제를  제기했다. 1988년에 벌써 통렬히 비판받은 사실을, 그 동안에는 무엇을 하고...하는 생각도 不無하나, 大韓民國이 이렇고, 봄은 오기는 오는데 걸음은 항상 이렇게 드디다. 과연 학교의 ‘정관’ 첫머리에는  “校主 박정희선생의 創學精神에 입각하여...운운” 적혀있다. 박정희 선생의 ‘쿠데타 정신’이라면 우선 말은 되는데, 난데없이 ‘創學精神’은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쿠데타에서 ‘創學精神’을 찾겠단 말인가? 우리 속담에 “하면 다 말인줄 아느냐”라는 말이 있다. 남이 장에 가니 볼일 없는 사람도 망태 들고 나오더라는 말도 있는데 바로 그짝이다. 그런데 이런 잠꼬대 같은 말을 大學의 看板글에 적은 사람도 그 大學의 틀을 잡은, 명색이 敎育者이거나 學者였을 것을 생각하니, 이 나라의 선비 精神이 서글푸고, 그 看板 밑에 놓여진 學校가 가여워진다. 

 박정희씨는 우리나라, 사회 전체의, 歷史的 話題의 인물이다. 이 글 테두리를 벗어나는 이야기가 되니, 여기서 긴 이야기는 타당치 않으나, 그를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功勞者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와 正反對의 의견을 가지는 사람도 많다는 것은 客觀的 사실이다. 영남대학교가 과연 그의 紀念館임을 自處 하는가? 1988년 國政監査의 叱咤(질타)를 잊었는가? 그리고 그의 多樣한 행적중에 嶺南大學校는 어디까지나 附隨的이고 偶然한 인연이오, 없어도 될 部分이었다. 오히려 負擔이 되는 部分이 아닐까한다. 그 偶發的인 要素를 말해주는 얘기로, 이런 에피소드 가 있다. 최석채씨라면 저널리스트 로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이고 也靑의 친구였다.  이분이 한번 박대통령에게 왜 也靑을 도와주지 않는가고 물으니, 그는 “그 사람 내게 ‘당신’이라 하더라” 하고는 고개를 돌려버리더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나는 최석채씨를 잘 아는 故김영달씨로부터 들었는데, 이 분은 지금은 역시 故人이 된 大邱日報社長의 丈人이시다. 과연 단 둘이 탄 車안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국내에서 ‘閣下’란 호칭이 통례가 되어 있는 것을 미국에 있을 때 처음 들어서 그런지, 國家的 羞恥(수치)로 들렸다.  周知하다싶이, 김대중씨는 就任하기 以前에 스스로 이 호칭을 폐지했다.

 요먼저 寄稿文에서는 ‘嶺南’이란 校名의 유래가 靑丘大學에서 치르던 ‘嶺南義烈祭’ 라 했는데, ‘嶺南大學校五十年史’ 에는 이후락씨가 자기의 ‘私案’으로 제안한 것으로 나와있다(p. 279). 만약 鷺山이 과연 義烈祭 精神과 박정희씨를 한투로 묶었다고 한다면, 이것은 되뢰 鷺山의 辱을 가중시키는 것이 안될까 한다. 義烈이 무엇인데? 朴씨의 功을 아무리 추켜들진데, 亡國時期의 ‘義烈’하고는 거리가 먼 人物이 아니었던가? 阿附(아부)에도 요령이 있는 법으로, 조금은 인연이 있어야 말이 된다. 너무나 맞지 않는 이야기를 하면 되뢰 본인에게 모욕이되고, 이 경우, 先烈에 대한 모독이 된다.  ‘嶺南’이란 이름이 죄가 아니다. 그것은 자랑스러운 우리 고장 이름이다. 지금 이야기는 어찌해서 그것이 대학에 붙혀졌느냐의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도처에 ‘過去事眞相糾明’을 말할 만큼 어두운 凍土에서 햇빛 속으로 막 걸어 나온 상태다. 이것이 다 그 동안 피땀흘린 民主鬪爭의 결과이오, 민족의 勝利인데, 어찌하여 이 바람은 유독 嶺南大學校 울타리만 비켜가는가? 이 울타리 속에서는 모두 사실은 외면하고 역사는 왜곡하는데 한 뭉치가 된 인상을 받는다. 이제는 교육부마저 학원의 ‘正常化’를 추진하여, 앞으로는 일체 말이 없도록 연구하라고 독려하는 마당에, 왜 그 학교의 ‘問題의 起源‘ 에 대한 발언은 한 마디도 없는가?  앞으로 누구에게 학교를 맞기느나를 두고 씨름을 하고 있다. 設立者側에서 볼 때는 大統領에게 빼앗기든, 그 누구에게 빼앗기든 빼앗기는데는 마찬가지다. 거기서는 1988년 國政監査때 文公委가 소리치고 간 일은 아예 없던 일로 置簿하고 있다. 지금 와서 ‘正常化’를 말한다면, 지금까지는 ‘非正常이었단 말인데, 무엇이 非正常인가 하는 것 부터 檢討하는 것이 상식이 아닐까? 或 지금 학교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마음으로는 ‘校主 朴正熙씨’가 非命에 가고, 民主바람이 불은 것 자체가 ‘非正常’이었다고 答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든다.....그 분이 存命하고 校主행세를 하고 있으면 모든 것이 ‘正常일 터인데’ -- 이 점은 내가 백번이라도 틀렸으면 좋겠다. 

 그 학교가 생겨나게 된 緣由를 대충이나마 보아왔다. 이제는 그 큰 학교의 덩어리가 하늘에서 떨어지거나, 땅에서 솟아난 물건처럼 말하지 말지어다. 그래서 앞으로 이 물건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의 화제를 가지고 신문지면을 채우게 하고, 대중을 誤導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학생들에게 도둑을 가르치는 것과도 같다.  大邱大學(구), 靑丘大學을 합쳐서 종합대학을 만든 일은 이미 그렇게 된 일이다. 그 이전에도 兩大學사이에는 그런 접촉이 있었다고 하니 이것은 是認을 하되, 먼저 통합과정에서의 ‘不條理’를 是正하는 것이 ‘正常化’의 軌道(궤도)에 오르는 첫 단계가 아닐까.  위에서 지적한대로 兩大學은 그 탄생과 成長過程이 자못 다르다. 통합과정에 있어서의 ‘不條理’는 主로 靑丘大學의 몫이었다는데서도 경우가 다르다. 大邱大學을 일컫을 때마다 (구)라는 註를 달아야하는 사연도 大邱의 독자들은 잘 아는 터이다. 그러나 이 대학의 과거 공로자를 기념하는데 가서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이름이 무엇 그렇게 중요하냐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름이 百마디 말을 대신한다. 이름이 얼굴이오, 이름이 ‘메시지’를 傳한다. 그래서 孔子님도 ‘正名’ 을 가르치셨다. 也靑의 경우 ‘靑丘’라는 이름 하나가 그의 18년 功드린 塔을 가르키게끔 되어있다. 1987년 8月 그 憤怒의 會議室에서도 ‘大靑丘’를 만들겠다하니, 박정희씨를 고문으로 삼는다는 것마저 甘受하고 승낙을 해주었다. 그 해 末 大邱大學(구)과 靑瓦臺版 統合이 이루어지는 판국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마당에도, 이후락씨로부터 ‘靑丘工專’만은 남겨주겠다는 言約을 받고 위안으로 삼았다. ‘靑丘’의 움씨라도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친구(趙潤濟박사)도 “우리 이것 하나만이라도 쥐면, 곧 키워나갈 수 있다“도 격려했다. 그런데 당시의 권력에게 이런 言約 하나쯤 默殺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이상의 참혹한 일도 無所不爲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지금 ‘正常化’를 말하면 正名의 復原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嶺南’으로서 이만큼 커왔는데... 하는 사람이 있다면 묻고 싶다. 일제강점기에 그들은 엄청난 量의 근대사회적 시설을  깔아놓았다. 그렇다고, 그 功으로 하여 우리는 그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포기해야했는가? 시계를 돌려 같은 時日을 우리가 가졌더라면, 우리도 우리 힘으로 떳떳하게 같은 시설을, 혹은 더 이상을 이루었을 것이다, 라고 答 할 것이 아니겠는가? 赤手空拳으로 시작했다지만 통합당시 靑丘大學은 상당한 資産도 축적해 놓았다고 也靑은 自負했다. 經理不正으로 因한 그 危機에 處하고도,  건물이건 땅이건, 資産 뭉치에는 손을 대기 싫었을뿐이다. 統合後에 靑丘大學의 빚을 갚는데도, ‘嶺南’의 그 超大級 캠퍼스를 짔는데도 靑丘 자체의 資産을 판 돈으로 충당했다고 한다. 그 넓은 땅을 경작하던 그 많은 농민들을 졸지에 퇴출시킨 것은 과연 당시 최고 권력자의 힘이 아니고는 불가능했다고 하지마는...... 

 嶺南義烈祭를 말하면서 물에 물 탄 얘기는 하지 말자. ‘義烈’은 그런 談論에서 생기지 않는다. 두루뭉술하게 생각하고 사는데서 義烈은 나지않는다. 無政府主義者로 臨時政府 國務委員으로 귀국하신 柳林 先生은 자기 친자식이 日帝時 糊口之策으로 敵과 약간 타협했단 이유로, 6.25 때 전장터로 나가는 길에 인사를 하러왔는데도 돌아 앉아 외면하셨다고 한다. 먼저 번 寄稿者 신성구 동문의 선친, 申宰模 先生의 사상도 삶도 그런 土壤에서는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두루뭉실하게 생각하고 사는데서 소위 ‘民族反逆者’도, 附日者도 쉽게 나올 수 있다는 것을, 日帝時代를 살은 사람 같으면 잘 알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善意의 친구도 本人의 속 마음을 대신하지는 못 할 때가 있다.  당시 세력권의 한 사람, 李孝祥씨를 만나보고 와서는 야청은 日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아직도 자기에 맡겨달라는 것. 그리고 졸업식, 개교기념 등 참석해 달라고. 내 心情 알 理 없고, 事件자체도 모르고 있지만 장황설 늘어놀 수도 없어. 그저 참석할 형편이 돼 있느냐고만. 그리고 훗날 學校자체에 變動 있을 때 그 때 보자고만“(1976 5/1, 『靑丘證言』p. 299) 사실 敵의 욕설보담도 친구의 무심한 말 한 마디가 몇배 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英語에 이런 말이 있다.  “God save me from my friends, I can take care of my enemies." - ”主여 나를 내 친구로부터 보호해주소서. 敵은 내가 감당할 수 있나이다.”

 그러나 正論이고, 빗나간 理論이고간에 담론은 활발하게 나오는 것을 환영한다.   이렇게 訂正할 기회도 제공해주지 않았는가. 더욱 중요하게는, 196,70 代에는 若年이었을 지금의 主役들에게 당시의 일은 생소하고 實感이 안난다 해도 이해할 수 있으니,  그들의 啓蒙을 위해서도 필요한 작업이다. 옳은 知識이 있어야 옳은 判斷을 할 수 있다.  그들은  嶺南大學校의 그 수많은 학생들을 啓導해야할 위치에 있다. 可謂 나라의 將來가 그들 손에 있다. 지금의 嶺南大學校는 隱蔽를 일삼고 있는 것이 보기에 안타깝다.  敢히 말씀하건데, 鷺山 作詞의 校歌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지 않도록! “어둠과 거짓 물리치려고, 밝음과 참됨 가르치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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