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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代 理事長, 설립자 배신하고 靑丘를 청와대에 넘겨”
“2代 理事長, 설립자 배신하고 靑丘를 청와대에 넘겨”
  • 교수신문
  • 승인 2008.03.20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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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비사]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①

올해는 정부수립 60주년의 해다. 정부수립을 중심에 놓고 본다면, 한국 대학사회의 역사도 이 정부수립과 함께 공식화된다고 볼 수 있다. 해방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학문의 요람과 인재 양성의 터전이 된 한국 대학의 역사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값진 성과를 축적해왔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성장 이면에는 교육 報國의 기치를 내세우면서 私學을 건립, 인재 양성에 주력해 온 사학 주체의 노력이 실로 지대하다. 그러나 이들의 建學은 왜곡되거나, 망실된 경우도 적잖아, 이의 온전한 회복이 필요한 때다. 교수신문은 정부수립 60주년의 해를 맞아, 한국 대학의 설립 역사를 증언하는 기획의 일환으로, ‘靑丘大學’ 秘史를 싣는다.  

청구대학은 1948년 대구에서 설립된 사립대학이다. 당시 경북청년총연맹위원장이었던 崔海淸 씨는 독립의 길은 배움에 있다고 생각해, 1948년 1월부터 대중강좌를 개최한 것이 계기가 돼, 40여명의 인사들이 뜻을 모아 대구야간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張仁煥 씨를 회장으로 선임한 뒤, 9월 대구문리과전문학원으로 인가를 받고 법학과 문학과 이과 180명의 학생을 모집, 같은 해 11월 임시교사에서 개교했다. 초대원장에 崔海淸 씨가 취임하고, 이사장으로 鄭宗壽 씨를 모셨다.  

1949년 3월 포정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4월에 ‘청구대학’으로 교명을 개편, 1953년 3월에 제1회 졸업생을 輩出, ‘54년에 제2대 이사장으로 全基守씨를 임명, ‘55년 8월에 문화동 신축 교사로 입주함으로써, 본격적으로 대학의 위용을 갖추었다. 1961년 대학원을 설치한 데 이어 1962년에 병설실업초급대학, 1963년 병설공업고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1964년에는 대학본부를 30여만 평의 효목동 교사로 이전했다. 1967년까지 총 14회 3,459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1967년 12월 大邱大學과 통합되면서 영남대학교(학교법인 영남학원)로 개편되었다.  

‘청구대학’은 과연 자의로 ‘영남대학교’로 거듭났는가. 교수신문은 올바른 대학사의 정리와 이해 차원에서 과거 역사의 망실된 틈을 재조명하기 위해 최해청 씨의 차남 崔瓚植(80) 씨의 기고를 실어, 사학 ‘설립자측’의 증언을 기록하고자 한다. 
 
※ 격동기의 대학 설립과 관련된 세밀한 역사를 회고, 증언해주실 분은 교수신문 편집국(editor@kyosu.net)으로 제보해주기 바랍니다.

 

그동안 긴 세월을 嶺南大의 “어둠과 거짓 물리치려고” (校歌에서 - 鷺山 李殷相 작사) 어지간히도 애써왔건만 매양 메아리 없는 광야의 외침이오, 울리지 않는, 찢어진 신문고였다. 요즘에 와서 조금은 변동이 있는 것 같으니, 이것이 다 민중의 진실과 정의를 渴望하는 피어린 노력의 덕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봄은 언제나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오는지, 여러 모로 未備하고 不滿한 점도 많다. 그래도 지금은 국가 차원에서 ‘過去事’를 들먹이고 나섰다. 이게 어디냐. 오래 기다리던 甘雨의 첫방울을 맞은 기쁨을 形容할 길이 없다.

그러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진실’에 잇달아 숨가쁘게 ‘화해’를 내세워야하고, 과거사의 糾明과 事必歸正을 강조하기도 이전에 ‘정리’를 말해야하는 데서 이 긴 간판이 탄생하기까지의 정치적 産苦를 엿볼 수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교수신문>에서 귀한 지면을 割愛해 이 글을 싣게 된 것도 可謂 단비의 첫 방울이다. ‘密雲不雨’라 하더니, 하늘 한 구석을 쑤셔 작은 비나마 내리게 해 준 것이다. 나는 지금 그 고마운 비에 붓을 적셔 이 걸 쓰고 있다. 

[註: 이 원고는 지난 7월에 이렇게 시작했다. 해가 바뀌고 지금에 와서는 위에 언급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자체에도 이런 저런 딱지가 붙어 흔들리는 상태다. 요지경 같이 도는 세태에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과거사 정리 자체가 어느 정권의 정치적 ‘제스처’였던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매기는 것은 방금 등장한 정권을 위해서도 利로운 발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害가 되는 말이 아닐까 염려된다. 과거 역사에 壁을 쳐발라버리는 정권이라면 그 정권의 冒瀆이 됐으면 됐지, 자랑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역사바로세우기는 그 동안 오랜 국민운동의 결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것을 무시하고 든다면, 가스 냄새가 거리를 덮던 그 과거의 망령이 또 되살아난다. ‘정권이란 배는 百姓이란 물위에 떠 있는 물건이다’라는 말은 古來의 격언이지, 지금 운동가들이 지어낸 말이 아니다. 그래서 上段에서 언급한 약간의 'anachronism'을 그냥 두기로 했다. 훗날에 이것은 2007~2008年 사이의 政界變化를 증언하는 생생한 증거가 될 것이고, 지금 당장으로는 變하는 중에도 변치 않는 역사의 바른 흐름이 지켜지기를 기대하는 念願이기도 하다.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작년 7月 당시 매스컴에 반영된 바 영남대 事態에 겨누어 쓴 것이다. 독자는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읽으면 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했는지, 그 후의 구성이 왜 이렇게 됐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작년에  <교수신문>은 ‘密雲不雨’ 란 社會寸評을 내놓아 都下의 각 신문에서 인용을 하더니, 올해는 ‘自欺欺人’이란 成語를 게시했다. “남을 속이는 것은 自身을 속이는 데서 비롯된다.” 무서운 말이다. 개인을 위한 座右銘이 될 뿐 아니라, 막 들어 선 정권이 자기감시를 하는 잣대로도 적격이라 생각한다.  

이글을 게재하기 직전에 이 나라는 崇禮門을 燒失당하는 통곡할 손실을 입고, TV 에서는 연일 국민적 반성의 토론이 벌어졌다. 그 중에는 防災에는 물질보다는 사회적 시스템 상 요인이 중요하다는 말도 들렸다. 나도 往年의 金大中 대통령 앞으로 보낸 陳情書(다음 어느 回에서 등장할 예정)에서 이 나라의 ‘事故 共和國’이란 불명예스러운 별명에 언급했다. 구조상 원인에는 꼭 사고의 결과가 따른다고 단언하면서, 물리적 구조 못지않게 사회적 구조의 결함이 내포하는 후탈에 대해 경고했었다. 마침 작년은 설립자 也靑 先生 서거 30주년이더니, 올해는 靑丘大學이 始源을 둔 1948년부터 60주년에 해당한다. 晩時之歎과 恨. 그러나 事必歸正이랬다. 그 첫 門을 열어 준 <교수신문>의 勇斷을 다시금 치하한다.] 

2007年 7月, 영남대를 둘러싼 얽히고 설킨 상황은 이랬다. 첫째 청구대학의 前 理事長 全씨의 아들은 빈번히 매스컴을 타며, 주로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씨를 상대로 그가 영남大 이사직에 있을 때의 운영비리를 문책했다. (舊)대구대학의 대표 설립자의 長孫 역시 朴후보의 학교자산 관리상의 비리를 공개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영남대학은 여전히 ‘校主 박정희’를 定款 제1조에 모시고 있다. 작년 교육부에서는 임시이사회에 학교 정상化 방안을 제시하라는 公文을 示達했는데, 신문보도에 의하면 이사회는 여전히 과거 靑丘, (舊)大邱 兩大學의 설립자측은 묵살한채, 학교를 장차 어떻게 요리하느냐에만 鳩首會議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 동안 오랜 세월을 내가 청구대학 설립자를 代辯해 呼訴해온 데 대해서는 아직도 시종일관 한 마디 반응도 없다. …… 이 상태는 2008년 3월 현재,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변함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바깥으로 불거진 일련의 事緣들을 청구대학 설립者 也靑의 입장으로 보면 이렇다. 청구대학의 前 理事長 全씨의 遺族은 학교를 청와대에 갖다 바친 대가로 약속받은 褒賞金을 아직도 못 받아, 지금 그것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것은 일단 수긍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以上 청구대학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여느 다른 학교의 경우와는 달리 全씨를 제2대 理事長으로 앉힌 것은 설립자 也靑 先生이었음에도, 그는 설립자를 배신해 그에게는 일언반구 상의 없이 학교를 청와대로 넘겼기 때문이다. 進上을 받은 사람으로부터 褒賞을 받을 자격은 있을는지 몰라도 그 밖에 또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인가. 
(舊)대구대학은 우여곡절 끝에 財閥 이병철씨의 손에 있을 때에, 그의 ‘不得已’한 事情으로 進上을 해야만 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교를 계승할 때 元來 設立者團中 筆頭이셨던 崔 浚 선생의 학교의 장래에 관한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상의없이 그랬다고 하니, 그의 長孫 역시 통합과정에 있어서의 권력의 남용을 주장하고 있다. 거기에다가 기부한 조상전래의 땅을 임의로 매각한 데 분노하고 있다. (舊)대구대학은 그러나 처음부터 여러 地主들(日帝下 中樞院 參議를 포함)이 자금을 모아 세워졌고, 주도하는 사람이 여러 번 갈린 데 반해, 적수공권으로 始終 한 사람의 CEO가 이끌어 온 청구대학과는 범주를 달리한다. (舊)대구대학이라 (舊)자를 달아야 하는 이유도 도중에 다른 학교가 ‘大邱大學’이란 이름을 襲用해, 지금은 그 학교와 구별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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