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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⑨ 時代의 證言과 參與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⑨ 時代의 證言과 參與
  • 교수신문
  • 승인 2008.09.2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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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멀리 있는 자식으로서 歸去來辭를 薦擧하여 위안을 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답이 “나도 계속 귀거래사를 익히고, 老莊도 조금씩 본다. 그러나  염淡無爲도 상처가 없을 때는 모르겠으나…………현실참여를 일체 끊고 나니 존재 의의조차 모르겠다. 결국 인생은 투쟁이라, 無爲를 배우는 가운데도 끝까지 싸워보자는 생각이다.(편지 ‘68/11/30) ” ‘田園이 將蕪’란 응당 상징적으로 음미하는 것이 옳겠지만, 우선 形而下學的으로 逍遙山水하는 처지나 경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너의 현실참여 권고에는 용기를 얻었다. 세상이 매양 고정적인 것이 아닐진대, 새움 트는 생명조차 영영 체념할 수야 있겠나. 용기를 내면 어떤 새로운 방향도 나설 것을 생각해본다.”(편지 ’69/4/10) 사실 말이 좋아 귀거래사지, 상처를 안고 무슨 귀거래사냐, 이것은 거짓이다. 나는 말은 그렇게 했지마는
사실 그 말의 공허함을 느끼면서 죄송했다. 그래서 也靑의 그 투쟁정신에 오히려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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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직 정권유지를 위한 體制下에 핍박받는 대중. 부정, 부패 自由黨 때보다 심하다는 소리…… 毫末로서 중형을 받을 수도 있고, 중범이라도 묵과될 수도 있고, 아니 되는 일 없고, 되는 일도 없고…… 결국 영리한듯하면서 영리치 못한 민족? 가장 寒心한 것은 젊은 세대, 돈벌이, 취직에만 눈을 뜨고, 이기 안일에 흘러, 멀리 생각하고, 넓게 보는 버릇 아예 없다. 썩은 물.” (日記 ‘68/1/27) 1968年 당시는 미국의 越南戰爭 반대로 미국을 위시하여 구라파 학생들 사이에도 운동이 활기찼다. 나의 미국 통신에 대하여 “……콜럼비아 대학생 얘기…… 이곳의 극히 단편적 보도에도 구라파 각국의 청년, 학生, 노동자의 폭발은 尋常치 않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이 곳 청년학생들은 정반대 현상이다. 예를 들어 去年 靑大件으로 무기정학을 받은 학생의 구제를 위하여 학우들에게 連判을 받으려고 하니, 뭣하러 덤비느냐고 한단다. …… 그들도 일시 同調도 한 學生들인데 - 4·19 피 흘려 무슨 所用? 6.3 데모 무슨 소용? 그저 돈벌이, 취직뿐이다. ……사회 풍조는 姑捨하고 그들의 先生이 거의 썩었으니, 그들을 어찌 責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自由, 진리도 무슨 틈이 있어야 노출하는 법이다. 역사의 잠재력은 반드시 기회를 기다린다.“(편지 ‘68/6/15)

 8·15 날에 - “25년전 감개. 분열의 비극. 대세 앞에서는 불가피했는지. 좀 더 현명했다면, 준비가 있었다면. 혼란기, 10·1 사건, 6·25, 민족정기 퇴색, 私利私慾, 정치부패, 謀利 得勢, 부정 절정, 4·19, 5·16 여전히 같은 地盤, 미국 정책, 한일문제, 월남파병, 졸속근대화. 동원은 됐으나 같은 양상, 권력중심, 사치, 포악.”(日記 ’70/8/15) 奇異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8·15 날의 感懷가 어찌 그렇게도 같으냐는 것이다.

 시대의 證言은 계속된다: “…… 이곳 政治風土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다. 독재체제가 강화되고, 조직화되었을 뿐이다. 형식적으로는 兩黨制 같이 되어있지마는 동질적인 것이 나누어져 配當을 분배할 뿐이다. 진짜 야당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기관, 언론, 완전 與黨格이다. …… 良心이니, 正義니 하고 나서다간 즉각 두들겨 맞는다. 작년 全泰一 이란 노조원의 분신자살이 모든 것을 대변했다. 여기에 유사이래 처음으로 학생과 노동자, 서울 법대생이 동요하고 접근하려다 저지되었다. …… ‘五賊’이 露出되고, 眞野의 저변은 퍼져가는데……현재 유일한 大野(新民黨)에서는 金大中(40代)이란 후보가 遊說바람을 일으켜 全羅는 거의 그 一色이고, 전국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대상이 되어있다. …… 또 하나 眞野를 자처하는 군들이 尹潽善씨를 중심으로 나왔다. 이 역시 분열의 형태이나 …… 지금 이런 것을 標榜하고 나옴직한 일면 정세이기도 하다. 이 기회에 나서기를 慫慂하는 친구가 있으나 …… 정치의 政字도 모르고, 건강이 여의치 않은 지금 나로서 어찌 承諾할 수 있겠느냐. 항차 그 친구들이란 통일된 이념도 없고, 능력도 없어 보이니, 하나의 제물, 거름 역할일 수밖에 ……  헛수작이다.” (편지 ‘71/1/20)

 그러다가 결국 “徐道源, 姜昌德 來訪, 民主守護에 날인 …… 자격, 능력없이 이름만 걸어놓는 것이 되래 멋쩍다 할 수 있어. 그러나 젊은 세대의 희생을 보고도 초연한다는 것은 너무나 안일에 빠진 것이 아니냐하는 마음의 가책.”(日記 ‘71/4/7) 金成坤씨를 만났더니 이걸 비난하더란다.(日記 ’71/6/28) 徐道源씨는 나중에 人革黨 사건 희생열사로 역사에 남는다. “……某某側에서 선명 야당을 같이 하자고 무척 졸러 왔는데, 이것은 굳이 사절했다. 그후 政黨아닌 人士들이 「民主守護 國民協議會」를 조직하게됨에 여기에 말려들어버렸다. 별 성과를 기대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볼때 아직도 정의파가 남아 있다는 표시가 되어 의의가 없지않다고 생각했다. …… 선거후에 역시 유야무야가 되겠지만, 뿌리는 계속 살아있으리라 믿는다.” (편지 ‘71/5/22) “밤에 보석된 呂正男이 來訪. 선배를 도리어 격려한다. 과연 부끄러울 정도다. 다 썩었다하나, 역시 면면히 살아있다. 可愛.“(日記 ’71/9/2) 이 慶北大 학생도  위의 徐씨와 함께 장차 人革黨 烈士의 班列에 오른다. 그날 밤에 그것을 어떻게 알았겠느냐마는.

 "Oni diras ke la registaro ne povus dauri gis sia limtempo……" 이렇게 也靑은 어떤 이야기는 조심스레 에스페란토어로 적어 보냈다. 그는 이 소위 국제어를 서양사람들과 통신하고, 그 문물에 접하는 창구로 사용했다(2004年, Korea Esperanto Asocio [한국 에스페란토 협회]는 ‘韓國 에스페란토 運動後見人’으로서 『야청 최해청 선생』기념 책자를 출판했다).  번역하면:
 
 “모두들 政府는 任期를 못채우지 않을까 하고 있다. 그들은 정말 지난 10年동안 화려한 쇼를 해왔다. …… 그러나 안팎으로 좋지 않은 일들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정부는 더욱 더 狂態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어떤 極端的인 사건이 학교에서 일어났단다.
 어느 학교에 흡사 戒嚴令下와 같이, 거의 한 部隊의 重武裝한 軍人들이 쳐들어가서 수업중인 학생들을 무차별 구타하여, 많이 逮捕되고, 몹시 다쳤다. …… 며칠이 지나서야 입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恐怖에 떨고 있다. ……
 너도 알다시피 여기는 아직도 대중들의 조직된 힘이 없고, 옳은 저널리즘도 안 생겼고, 야당 또한 썩어 있다. 그러니 저항하는 것은 학생뿐이고, 그러다가 매맞는 것이다.
 主義의 시대는 지났다고들 한다. 공산주의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싶다. 정말 문제는 누가 나라를 독립으로 이끌고, 사회를 고루고루 잘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나가는데 더욱 健全하고, 正義롭고, 有能한가하는 데 있다. ……
 統一의 眞正한 障碍는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의 地位를 오래 유지하기 위하여 현상태를 연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다.……
 그리고 더욱 큰 障碍는 모두의 惰性과 무의식에 있다. 그들은 너무나 오랫동안 억압 속에 살아왔기 때문에 이미 느끼는 기능조차 상실한 것이다.……" (편지 ‘71/11/5)

 「民主守護」에 一旦 가담했으나, 也靑에게는 그 운영 방법이 못마땅했다. “…… 처음 사무실 설치를 반대한 나의 豫見그대로. 할 일 없이 책상 늘리는 꼴 같이 보기 싫은 것 없어. 잡지발간이라도 하든지, 아니면 대행사무라도 얻든지. 財政없고, 일거리 없고, 사회적 활동분야도, 성격도 분명치 않으면서도 衆意 거절치 못해 해본 것이기는 하나, 이제는 찍소리 못하는 이 판국에 野黨籠城도 쇼에 불과. 결국 保衛法 통과하고, 대권 發動하고 말 것이니 자진 환원이 如何. 만약 지속을 하려면 행동 覺悟하고, 아니면 사회적 행동 담당분야를 명확히 해야지. 삼개월 試圖 결과가 이렇다. 누구의 舍廊房 …… 너무나 sekto[sect, 宗派的]이다.” (日記 ‘71/12/25)

 “10月 維新 支持 야단 …… 하늘이 노햇는지, 무섭고 세찬 바람이 분다. 橫幕이 떨어지고, 아치가 넘어지고. 그러면서 마이크車가 거리를 누빈다. 또나 개나 500餘 단체가 지지. 4·19 世代까지. 농촌에서는 투표 안하면 죽는 걸로 알고 있단다. …… 알맞은 民度…… 우선 무슨 힘이든지, 힘이 決定. 그러나 그 힘의 歸趨, 轉換, 更迭, 豫測은 컴퓨터나 할 수 있는 일. 그래도 원칙은 남아있다. 역사가 증명한다. 알맞은 民度. 그렇게끔 되어있는 현실. 그러나 現代版에는 거기에 對峙하는 現代版이.” (日記 ‘72/11/16)

 “뜻밖에 MBC에서 전화…… 明 11時에 좌담회에 나와주겠느냐고. 시장과 慶大 總長 이태재와 鼎談. 제목은 ‘民主主義의 土着化’. 謝絶. 어찌해서 나를 지명했는지 알 수 없다. 쥐나 개나 다 끄집어내는 판이라서인지. 환장했다면 어차피 이것도 하나의 기회라 할지도. 보이는 의미에서, 존재 알리는 의미에서. 可笑롭다. 난 환장 안 했다. 숨통을 막아놓고 민주주의가 어디 있으며, 토착화란 또 무엇인가. 남의 나라 민주주의가 아니고, 한국적이란 것인데, 한국적이란 강권 앞에 順從하는 것…… 이 體制 하는 꼴, 民主가 아니라 專制暴君.”(日記 ‘72/11/2)

 1973년에 신문 인터뷰에는 應했다. “每日新聞 李實 記者 사진반을 데려왔다. ……과거는 여러차례 回顧談등 요청이 있었으나 일체 辭退햇다. 그런데 어쩐지 마음이 끌린다. 더욱 記者 云, 先生은 憂患 때문에 오래 서울 계셨지만, 一般은 정치적으로 무엇을 하시는 줄 안다고. 그래서 승낙, 시불어 주었다. 자연 靑丘 이야기. 보내고 나니 未洽……” (日記 ‘73/1/19) ‘나의 現役時節’이란 연재물의 하나로, ‘無에서 有 創造한 過程’이란 題下에 실린 이 기사는 끝 부분에 “눈앞의 현실을 보지말고, 다가오는 현실을 더욱 注視해달라는 부탁을 後進에게 잊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매일신문 1973 1/26)
 
 “세상은 漸入佳境이다. 李씨 때는 民主의 흉내라도 냈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다. 순전히 히트[히틀러] 式이고 赤式이다. 이러다간 eksplodi[爆發] 않을런지……”(편지 ‘74/12/19) 4·19 날에 -  “4·19 날 氣勢는 해마다 흐려만 간다. 만약 靈魂이 있다면 통곡할 일. 역시 강력히 눌리니 되는가봐. 3,4월 위기운운 하던 것이 이렇게 잠잠할 줄이야. 그러나 영혼이 영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무서운 침묵 속에 무엇이 뒤끓고 있는지도 알아야 할 일.
咸씨 연행 報道만 보았더니……그래도 ‘씨알’ 主催로 강연회. 水踰里나 거기나 갈 걸…” (日記 ‘75/4/19) “民樹와 같이 5·16 광장에 소위 30주년 전시구경을 갔다. 寫眞 宣傳術이 발달되었을뿐. 低俗 對象. 民樹와 만약 民主黨이 계속 執權했더라면 하는 假想比較.“ (日記 ’75/10/25)  “신문, TV 흥미 없어 제목만 훑어보는 정도이지만, 有心히 보면 모두가 충격적이 아닌 것이 없는데, 오늘은 경찰이 摘發한 10代 少年 學生 … 그들을 罰한다면 속으로 비웃을 것이다. 그들은 旣成世代의 生態를 잘 알고 있다 … 殺人, 强盜, 獨寡占 財閥들의 橫暴, 國會도 막가는 세상이다.” (日記 ‘75/12/17)
   “徐鏡普씨가 嶺大 沿革史 편찬한다고 靑丘資料 달라기에…… 머릿속에 되살려 끄집어내자니 새삼 憤痛터질 대목이 나올 땐 몇몇일 몸치를 앓을 뻔했다. 언젠가 한번은 記錄이라도 남겨야겟다고 생각은 가지고 한 것이지만, 그렇게 고통을 줄주는 몰랐다.…… 學閥, 才幹云云해도 정신바로 서고, 행동 옳게 하는 者  보기 어려웠다. 그 시기 나같은 赤手空拳 病骨이 자기도 모르고 生來의 잠재의식만 가지고 덤비게끔 되어있었다.” (편지 ‘76/2/27, 日記 ‘75/10/24) 이 고통의 述懷가 내가 1987年『靑丘有言』이란 이름으로 配布한 遺稿이다.

 “이번 靑丘述懷는 參考로 靑丘의 顚末을……아무 자료 없이, 기억나는대로, 내 고생한 經路와 천치노릇한 것을 솔직히 기술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嶺大 沿革編纂에 기대도 안한다. 行事時 沿革報告에 靑丘大學 設立을 누가 한 것도 말이 없었다 한다. 그들은 종시일관 抹殺主義. 그래야만 그들이 산다.” (日記 ‘76/5/12) “嶺大에 대해서……그들이 나의 요구대로 기록해줄지도 의문이고, 내가 臟物學校를 상대하기도 싫다.” (편지 ‘76/8/6) 李孝祥씨는 “아직도 自己에게 맡겨달라는 것. 그리고 졸업식, 개교기념등 할 때 참석해달라고. 내 심정 알리 없고, 사건자체도 모르고 있지만 張皇說 늘어놀 수도 없어. 그저 참석할 형편이 돼 있느냐고만, 훗날 학교자체 變動있을때 그때 보자고만.”(日記 ’76/5/1)

 1976年 4月9日, 趙潤濟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5월초순 嶺大 沈등 제자들의 고희논문집을 준다해서 대구 가게 되었다고. 이왕이면 동행하자고. 神經痛이 심해졌다기에 尹裕善 관계하는 電子治療品 얘길 하니 매우 반가워했다.” 그런데 그 이튿날 “夕刊 ……趙博 今朝死亡. 衝擊. 어제아침 전화한 것. 壽城못둑에서 놀던 것. 月前 점심 같이 먹으면서 人生論하던 것……志氣相通한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는 그 괴팍한 성질로 명예직을 얻지 못했으나, 그것은 괴팍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경상도 사나이 기질이었다.” (日記 ‘76/4/9,10)

 也靑은 그 이듬해 1977年에 친구를 따라갔다. “내 죽어있더라도 문제는 남는 것. 소위 嶺大는 되지 않는 것. 國立은 국가가 있지마는, 私立은 무엇이 있느냐” 라는 말을 남기고.(日記 ‘70/2/21)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Morto estas ne morto, plue, pli potenca……”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 아니, 죽음은 더 强하다.” (日記 ’73/5/7)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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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찬식 2008-09-28 13:17:22
윗 글 둘째 줄의 "염淡無爲" 의 '염' 字는 computer 에 저장이 없는 字라 漢字 변환을 못햇는데, '마음心편'(快 의 왼편)에다 舌字를 쓴 글짜입니다 = "마음평온할 '염.'
"염淡" 이란 담담하게 마음평온하단 뜻...그래서 "염淡無爲"는 초월한 자세로 마음 편히 있는 老子的 자세를 말합니다.
이렇게 漢字없이는 표현 못할 말들이 많은데 하롭빨리 漢字 사용이 日常化 되엇스면 좋겟습니다. 이제 서울 강남구 교육청에서도 漢字를 초등학교에서부터 가르치겟다하니, 朗報입니다. 漢字는 일상생활에 잇서서 의미전달을 정확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는 것이 됩니다... 人文學의 再活을 부르짖는 요새 더 이상 말할 필요 없겟지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