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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 자리 비어있던 ‘진상 각서’ … 故人의 말을 직접 인용한 까닭
이사장 자리 비어있던 ‘진상 각서’ … 故人의 말을 직접 인용한 까닭
  • 교수신문
  • 승인 2008.04.21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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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비사] 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 ③

1967년 6월 29일자로 된 이사들의 진상 각서에는 기이하게도 이사장 자리는 비어있다. 아무래도 따로 설립자가 있으니 그를 의식해서인지?  그러나 전 이사장 全基守 씨는 1억 기천만의 포상이 약속돼 있었다하니, 날인을 한 다른 이사들에게도 배당이 있었을 것은 가상이고, 사상피해에 대한 위문금도 타냈다. 그런데 全 씨는 약속받은 이 포상금을 받아내지 못해 鷺山을 조르니, 그가 李厚洛 씨에게 이를 재촉하는 편지를 써주어, 이 복사본이 지금 全씨 유족이 갖는 유일한 증거가 돼있다. 이 사진이 일전 신문에 공개된 것이다.

한편, 설립자 입장으로는 안이 달아 죽을 노릇이다. “나는 무엇보담 일방적인 말만 들어갔을 靑瓦臺에게 眞事實이나 경위라도 알리려고, 여러 차례 면회신청도 하고, 書狀도 냈으나 절벽을 대함과도 같았다. 李厚洛 씨라도 한 번 만나려고 그의 시내 각처 연락처를 통해 무던히 노력했으나, 그 역시 회피”로 일관한다(遺稿 「靑丘有言」). 이 애간장 타는 나날을 일기에는 더 생생히 적고 있다. “(『靑丘證言』 圖書出版 마당, 1997에서) [韓錫東 씨] 내일 9시 반 단독 입궐 해 3자 재의하잔다 … 그도 자칫했더라면 不正에 말려들 뻔 했다고. 새 사실 많이 들었다고. 내일 대통령 만나면 고하겠다하니, 약간 안심.”(日記 7/26) “韓 씨 靑瓦臺 면회 무기연기라 하고 화투만 치고 있다. 이때 왜 눈치를 못챘던가. 그들 배짱 陰謀 굳어있는 것을….”(日記 7/27) “李議長[孝祥], 崔學長이 모르는데 어찌 추진되었느냐고 놀랜다 … 자체 해결의 길이 있으면 當然 그 길이 옳다고 朴씨에게 말하겠다고 약속”(日記 7/31) “찌는 듯한 무더위, 찢어지는 가슴 … 어제 李議長과의 면담에 약간 용기를 얻어 김성곤, 이동녕 등 연락. 李室長은 만나주질 않는다.”(日記 8/1) “이동녕은 자기는 靑大를 모르고,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권상하 강요에 부득이 취임했다고 … 그들 강행 확실하다 … 문교부에 서류가 벌써 돈다는 소리도-화적행위다. 그의 숙소를 안다면 서류를 탈취하고 싶은 생각 … 몇 군데 전화 연락하는데 하루 해가 다 가고 … 靑瓦臺 면회 분명하면서 되지 않고, 서찰을 띄워도 캄캄 무소식이다 … 울분 절정 … 李室長 등 직접 대결하라지만 만나주어야지”(日記 8/3) 也靑과 朴正熙 씨는 朴씨가 대구에서 사령관일 때부터 잘 아는 사이었을 뿐 아니라, 5·16 직후는 고향 선배로 서울로 모시고 자문도 하는 사이었다. 주의할 점은 처음에는 박대통령 측근 사람들 조차 朴 大統領이 設立者를 안 만나주고 자기가 차지할 것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재경동창생들을 만나니 “당면 문제는 자체적 해결을 주장”하고, 아직도 친구들 중 에는 “대통령이 먹을 생각은 만부당”하다고 분개하고 “李 실장과의 면담을 알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日記 8/3) 그러다가 마침내 만나주겠다고 때와 장소를 말해 왔다. 8월 18일 반도호텔. “그 날 그 장소는 그들의 요리에 형식적 매듭을 짓는 곳이다. 當今 막상의 권력에 대항하여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그토록 회피하는 자를 만나 무슨 말이 통할 것이며, 욕위에 욕을 더 사는 것이 아닌지 … 그러나 사람은 말을 가두어놓고 토하지 못하는 것도 답답한 일이다. 남이 권하는 대로 나가 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李厚洛을 만난 반도호텔 별실은 회의실에 직통해있었다. 그는 이야기는 회의 후에 하자면서 앞에서 나를 끌고 金成坤 씨는 뒤에서 밀어, 나는 강제로 끌려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때 그 광경을 어찌 말로 다하랴. 거기에는 舊이사들이 늘어 앉아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하여 물잔을 던지면서 “이들이 부정은폐하려고 이 같은 짓을 한 것이다”고 호통을 치고, 방금 한 바탕 벌어지려 하는데, 좌우에서 金成坤 씨와 김인 씨가 만류해서 허탕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회의란 것은 韓錫東 씨가 이미 작성해온 취지서 같은 것을 읽고 거기에 서명하는 것뿐이었다. 내용은 대통령을 고문으로 하고, 大靑丘를 건설하는데 10월 18일 내로 ‘마스터 v플랜’을 작성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경리감사와 倒壞事件의 책임을 추궁할 것과, 내가 大靑丘 건설에 참여할 것을 조건으로 서명했다. 회의 후 이야기하자던 李 씨는 金成坤 씨에게 일체를 맡긴다하고 나가버렸다. 왜 내가 서명을 했느냐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으나,  나는 그것이 큰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합의나 동의란 하나도 없었다. 어차피 전부 일방적인 행위였다. 나의 전신경은 오히려 경리부정을 밝혀 달라는데 집중되어 있었다.”>(「靑丘有言」에서)

이날, 이 상황을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반도호텔 927호실. 왜 출석여부를 재고 안 했던가 … 尹 말대로 실장 체면만 세워주면 될 줄 알았더냐. 不正, 倒壞事件만 규탄하면 그것을 그들은 대단히 생각할 줄 알았더냐. 당대 최고권력자가 旣爲 먹자고 강행해서 기정사실로 나섰는데 … 이왕 나갔으면 혈투를 하든지, 뿌리치고 나오든지, 컵 물만 엎지르고 고함소리만 … 결과알려고 모두 모여 있다 … 모두 탄식. 이 교수는 울면서 돌아가고….” (日記8/18) 이 애간장이 타고 피가 마른 인간고뇌를 상기한 『嶺南大 50년사』는 “최해청 학장의 용퇴를 가져왔다”는 말 한 마다로 처리하고 있다(p 192). 역사서술에 이런 곡필이 있을까. 也靑의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것도 바로 이런 호도였다. 그는 자식에게 하는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8월 29일자 발표문을 보니 분통이 터지고 숨이 가빠, 활자가 바로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자기들 살기 위해서 남을 이렇게 죽일까. 내가 언제 바톤을 주었으며 … 모든 것을 정식 물려받은 것처럼 가장하고.....”(寄瓚書 이하 ‘편지’ 1967년 11월 25일 別記) 위에서 장황하게 고인의 말을 직접 인용한 것은 이 곡필 곡설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이 안건을 심의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강탈의 증거’ 운운 시비의 여지를 일소해주기 위해서다.

이어서 12월 통합이 있을 때까지 也靑이 겪는 일들과 심경도 일기에서 抄錄하겠다. “雖 젓더라도 멋지게 한번 싸웠더라면. 한갓 양심이 모든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까 … 이미 대통령에게 가지고 갔으니 不正이나 캐달라고 淸書翰을 썼지만은 … 한석동에게 답 - 善心政治에 不正 캘 수 있겠느냐고…”(日記 8/20) - 去年부터 사태의 시발이 경리직원의 부정행위로, 서울에서 계리사를 불러와서 장부 검사 중이었다. 항간에서는 하기 좋은 말로 ‘재정난’으로 운운하는 것을 반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선심책을 쓰고 있는 정부가 부정척결을 감행하겠느냐는 말이다. “申씨 … 본격적인 감사가 아니고 채무확인 대조라고 … 감사는 장기간 걸려야하는데 한석동 不願. 雖 하더라도 자료제공 여의할지…”(日記 9/10) “金成坤 씨에게 세 번째 심정 토로 약간. 그도 창설자 손잡고 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 주장”(日記 9/14)

“不正, 倒壞件등 [조사약속] 이행 아니 하고 … 명분, 사학전통 운운도 지나간 일 … 창설자 운운은 더욱 그들의 본 기획이 아닌 것 … 이것은 최고위 정치적 문제 … 하층 소란 야기는 비효과적일 뿐 아니라, 오히려 자극이 되어 적진 단속만 재촉 … 잠 못 이루어 라디오를 만졌더니, 그간 중단될 뻔했다던 ‘Colombo project’가 정부 협정을 보았다고.”(日記 9/24) -‘Colombo project’를 靑丘大學으로 유치한다고 也靑은 무던히도 애를 써왔기에 남다른 감회가 치솟은 것이다. “언론뿐. 그러나 무자 불가능인데. 몸부림해야 할 것인지. 그냥 죽은 채 해야 할 것인지, 옳은 삶을 찾아야 할 것인지. 석양바람 쌀쌀한데 한강 물안개에 덥혀 속 답답한 산상”(日記 10/8) “李淳熙, 예상 이상의 호의. 동감. 靑丘와 영남내외방직 일환으로 상호제휴, 동귀를 확약. 내외주면 200여, 약5천만. 영남은 무자 무방이라고. 윤전기 약 3만불…” (日記 10/9) - 李淳熙 씨는 대구상공회의소장이었다. 아직도 그와 재단강화를 꿈꾸고 계신 모양이다.
                                                            <계속>

※‘대학비사’1회(3.17)의 ‘아나키즘’은 ‘anachronism’으로, 2회(4.7) 표제의 ‘1966년 12월’은 ‘1967년 6월’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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