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3:10 (토)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17. CEO(Chief Executive Officer) - 靑丘大學 18年(1)
[대학 秘史-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17. CEO(Chief Executive Officer) - 靑丘大學 18年(1)
  • 교수신문
  • 승인 2009.03.11 15: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위에서 言及한대로 也靑은 돌아가시기 一年前, 1976年에 回顧錄을 쓰시고, 나는 이것을 1987年 『靑丘有言』이란 題目으로 出版하여 要路에 配布했다. 靑丘의 시작과 18年의 자취는 本人의 입을 빌려 敍述하는 것 以上이 있겠는가. 따옴 표 없이  冊子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엮어 나가되, 때로 筆者의 註釋은 [ ]에 넣을 요량이다>:

[관련기사] 16. 훈수꾼들

[관련기사] ⑮ 정상화한다면서(2)

[관련기사] ⑭ 정상화한다면서(1)

[관련기사] ⑬ 判定勝

[관련기사] ⑫ 深宮에 갇힌 “行動하는 良心”(2)

[관련기사] ⑪ 深宮에 갇힌 “行動하는 良心”

[관련기사] ⑩ 國政監査와 判定勝

[관련기사] ⑨ 時代의 證言과 參與
[관련기사]
⑧ ‘工專’‘靑丘’ 이름에 집착한 사연 … 설립자, 구체적 설계 있었다

[관련기사] ⑦ ”20년 피땀어린 학교 되찾기 위해 百方으로 뛰었지만 ”
[관련기사] ⑥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 … “사학 설립자 노력 정당하게 대접해야”

[관련기사] ⑤ 大邱에서도 의아해했던 ‘청구-대구 합병’… 설립자 의사 무시

[관련기사] ④ 陶南 조윤제 박사 ‘다시 일어서자’ 권유해 희망 가졌지만

[관련기사] ③ 이사장 자리 비어있던 ‘진상 각서’ … 故人의 말을 직접 인용한 까닭
[관련기사] ② “1967년 6월 신축 校舍 붕괴 … 위기 몰린 신경영진, 惡手 던져”
[관련기사] ① “2代 理事長, 설립자 배신하고 靑丘를 청와대에 넘겨”

朔望會와 大邱時報社 獨立運動局

 大韓民國 政府樹立後 얼마 안된 李政權 時代의 이야기다. 미 國務省의 囑託으로 三週間 韓國敎育을 視察한 뉴욕 大學의 스타더드 (E. Stoddard) 博士의 報告書에 ‘韓國敎育은 집짓는 病(edifice complex) 에 걸렸다’ 는 말이 있다..... 무작정 建物로 겉치레만 하려는 傾向을 非難한 것이다..... 사실 解放後 數많은 學校가 雨後竹筍처럼 생겨났으니, 거기에는 ‘學園謀利’란 말이 流行할 만큼 不純한 動機도 많았다. 靑丘大學이 걸어 온 길은 順坦한 길도 아니었고, 過誤가 없는 길도 아니었으나, 그 由來한 精神에 있어서만큼은 자랑할 것이 있다고  나는 自負한다. 그런데 야릇한 운명으로 이 靑丘도 結局은 建築과 관계하여 그 一幕을 내리게 된다 - 設立者가 없는 사이에......[‘edifice(建物)complex’는 물론 Freud 의 ‘Oedipus complex’의 parody]

 大邱란 곳은 南北으로 慶州와 安東을 끼고, 옛부터 敎育과 文化의 都市로 알려져 있으며,  倭占때에는 光復運動과 思想運動의 嶺南의 中心地였다. 그래서 이 땅에 解放이 왔다면 이 곳에는 마땅히 民族의 魂이 結集하고, 先烈의 獨立精神이 자리 잡아야 했는데, 現實은 그렇지 못했다. 미軍의 通譯政治는 우리의 自主精神을 흐리게하고, 熾烈한 左右鬪爭은 社會를 昏迷속에 몰아 넣었다. 이것은 當時 全國的인 現像이기도 했지마는, 大邱는 1946年의 10.1 事件으로 解放後 맨 먼저 同族相殘의 慘劇을 치른 곳이라, 그 衝擊과 餘波는 크고 길었다. 光復이다, 建國이다 하던 解放氣分은 사라지고, 침울한 空氣가 天地를 덮었는데, 이 昏亂의 틈을 타서 日帝殘滓가 되살아 난 것이다......倭政時代가 되살아난듯한 憤痛이 새삼 치솟았다.

 

어느날 학교에서
이 때 大邱時報社 社長 張仁煥 先生은 소위 民族陣營 團體代表를 召集하여
座談會를 열었는데, 이름을 ‘朔望會’라 짓고 朔望, 즉 초하로 보름 날에 만나 서로 걱정이나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모임이 흔히 그렇듯이, ‘47年 여름 처음 모였을 때는 8,9名 되던 것이 그 해 12月에는 張 社長과 當時靑年聯盟 代表로 나갔던 나, 단 두사람만 남게 되었다. 이 것이 오히려 親密한 對談의 機會를 만들어, 張 社長은 獨立運動의 生活化를 主張하면서, 言論機關보담 좀 더 積極的인 事業을 하고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或者는 解放을 마지했는데 무슨 獨立運動이냐 하겠지마는, 時代의 아이러니 는 社會의 現實이 이 말을 無意味한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解放後의 나날이 獨立運動의 延長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張仁煥 先生은 6.25 戰亂 속에 失踪되셨다.]

 나는 나대로 뜻한 바 있던 國民再敎育論과 거기 대한 여러 方案을 털어 놓으니, 卽席에서 共鳴한 張社長은 다음 날 新聞社 正門에 「大邱時報社 獨立運動局」이란 看板을 내 걸고 나를 그 局長職에 앉혔다. 나는 먼저 道內 先烈들의 遺蹟調査에 着手하는 한편, 學術講座 計劃을 세웠다.

大衆大學講座와 夜間大學期成會

 解放直後 左右翼 宣傳을 위한 講演會등은 빈번했으나, 차분한 學術講演이나, 講座 같은 것은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우리 社會는 들떠있었다고 할까. 이 때 獨立運動局에서 開催한 三週間의 大衆學術講座는 一大旋風이었다. 1948年 1月15日京鄕에서 招聘된 有能한 學者와 敎授陣으로 開講하니, 200名 예산했던 聽講生이 倍以上으로 모여들어, 中央國民學校 小講堂이 비좁았다. 거기서는 男女老少와 左右翼을 가릴 必要가 없었다. 때마침 校庭에 퍼붓는 白雪이 내게는 果然 淨化된 民族의 良心으로 보였다. ‘左니, 右니 할 때가 아니고 누구나 마음을 갈아 앉혀 배움으로써 참다운 生活과 建國의 길을 찾읍시다’고 趣旨文에서 내가 한 말이 虛辭가 아니었다. [中央國民學校 터는 지금 ‘2.28 紀念公園’ 이 되어있다.]

 第1次 冬季講座를 끝마치고, 春季, 夏季 講座로 이어지니(그 中에는 Esperanto 講座도 있었다), 그 동안 낯이 익은 聽講生들로부터는 講座를 繼續할 수 있는 常設機關을 希望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래서 나도 夏季講座가 끝나던 날, 成人과 勤勞人을 위한 夜間大學의 必要를 느낀대로 약간 披瀝했더니, 그들은 熱狂的인 呼應을 보였다. 卽刻 實現을 請하니, 그렇게 다그쳐도 困難한 일이었지마는, 나는 그들의 熱誠에 感動되어 外面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1948年 5月 30日 約 50名이 江邊에 모여 大邱夜間大學期成會를 組織하니, 마침 그 동내의 이름은 ‘無怠’요, 거기는 ‘無怠江邊’이라 불렀다. 會長에 張仁煥 社長, 副會長에 나, 幹事에 宋安濟씨등이 選出되었다. 白手 건달이 出物할 有志 한 사람 胸算이 없고, 看板 하나 걸 곳 없이 나선 것이니, 無謀한일을 背水陣을 치고 나선 셈이다.

大邱文理專門學院과 財團形成

 다음 날 나는 靑年 몇 사람을 帶同하고 市內 各 機關長과 有力者를 歷訪했다. 趣旨는 다들 贊成이라, 모두 한 자리에 모시고 方案을 摸索하려고 招請을 했으나, 세 차례의 鄭重한 招待 끝에 단 한 분만 出席했다. 果然 表裏가 다른 實社會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炎天에 다시, 이번에는 實業家들을 巡訪햇으나 역시 虛事였다. 不得已 나의 親知中心으로 18名 의 期成會 理事會를 構成하고, 그들을 學事, 財務 兩組로 나누어 實務推進을 催促했다.

 

학교전경
兩組가 활동한다지만 聲援에 不過한 것이고, 결국 나는 시작이 半인 學事 推進에 拍車를 加했다. 옛 鐘路國民學校 자리에 선 農大假校舍 一部를 빌려 夜大期成會 看板을 걸고, 우선 「大邱文理專門學院」이란 이름으로 道의 認可를 받아 開講을 서둘렀다.

 그런데 好事多魔라던가, 出帆과 동시에 難關에 부닥쳤다. 道의 認可는 9月16日付로 받고, 農大學長이 承諾, 捺印한 假校舍 使用을 그 곳 敎授들이 反對하고 道學務局長이 加勢한 것이다.....2個月餘의 승강 끝에 마침네 靑年聯盟의 힘을 입어 落着되었으나, 그 동안 苦楚는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11月28日, 近 200名 學生들과 많은 京鄕 來賓과 더불어 感激的인 開講式을 가지게 되었다. 초라한 校庭이나마 “混亂莫甚한 이 고장 어느 구석에 고여있던 한 줄기 獨立精神이 이 날을 가져왔다”고 해서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사실 이 날의 式辭에서 나는 靑丘의 創學精神과 將來抱負를 闡明(천명)했다고 생각한다.

 講義는 法, 國文, 理工科와 思想特講등이었는데, 狀況은 누구보담 當時 敎授들과 學生들이 산 證人일 것이다. 學生들 대부분이 지난번 大衆大學講座時의 聽講生들이라 그 熱誠은 알고 있었지만, 그 가난한 校庭에서 그들이 자아낸 晩學雰圍氣란 果然 놀라웠다..... 이런 光景은 晝間大學에서는 볼 수 없다고 모두들 했다. 그 무렵 晝大들은 校內 左右싸움과 出席과 無關한 學點制로 하여 講義가 充實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出講敎授들이 異口同聲으로 所屬하는 晝間大學은 缺講할 수 있어도 夜大만은 遲刻도 할 수 없다 했다.

 開講이 多少늦은 대신 放學을 없애고, 進度를 맞추었더니 成績도 좋았다. 高等考試가 學校의 成績을 말해 준다고 볼 수는 없겠지마는, 靑丘大學이 初期부터 每年 잇달아 合格者를 낸 것도 그 때의 勤勉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대개 成熟한 學生들이라, 師弟間의, 또 學友間의 禮節과 情誼도 他學校에서는 볼 수 없는 氣風을 造成하였고, 難關을 克服하려는 그들의 意志가 學風을 이루었다. 그 때부터 이 勤勞靑年의 배움 터는, 남들이 불러 주는 대로 “夜間大學”으로 行世하였다.

  1949年 여름 靑年聯盟의 崔一幸 君의 斡旋으로 그의 親戚 鄭宗壽 씨가 關與하던 大邱布靴組合으로부터 大邱와 釜山에 있는 兩大고무 工場을 寄贈받고, 靑丘財團이 構成되었다. 그 布靴組合은 倭占末期 놈들에게 對抗하기위하여 처음 33人의 韓人이 뭉쳤는데, 全基守씨등 7,8名이 끝까지 지켜온 것이라 하니, 이 事緣만도 마음에 들었다. 迂餘曲折 끝에 當時로서는 상당히 큰 財團이 형성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