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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工專’‘靑丘’ 이름에 집착한 사연 … 설립자, 구체적 설계 있었다
‘工專’‘靑丘’ 이름에 집착한 사연 … 설립자, 구체적 설계 있었다
  • 교수신문
  • 승인 2008.07.0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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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秘史] 최찬식의 청구대학 증언]⑧

嶺南大學校 理事長 李東寧 貴下

 國事 多端한 이 때, 귀하의 淸勝하심을 仰頌합니다.

 本人은 귀하가 운영책임을 맡고 계시는 嶺南大學校의 前身, 靑丘大學의 設立者로서, 지난 3년동안의 침묵 끝에 지금 不得已 입을 열게 되었습니다. 靑丘를 창설하여 18년동안 심혈을 기울여 육성해 온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로 諒解해 주시리라 생각합니다.

[관련기사] ⑦ 20년 피땀어린 학교 되찾기 위해 百方으로 뛰었지만 ”
[관련기사] ⑥ 대통령에게 보낸 진정서 … “사학 설립자 노력 정당하게 대접해야”

[관련기사] ⑤ 大邱에서도 의아해했던 ‘청구-대구 합병’… 설립자 의사 무시

[관련기사] ④ 陶南 조윤제 박사 ‘다시 일어서자’ 권유해 희망 가졌지만

[관련기사] ③ 이사장 자리 비어있던 ‘진상 각서’ … 故人의 말을 직접 인용한 까닭
[관련기사] ② “1967년 6월 신축 校舍 붕괴 … 위기 몰린 신경영진, 惡手 던져”
[관련기사] ① “2代 理事長, 설립자 배신하고 靑丘를 청와대에 넘겨”

 

 靑丘는 엄연히 한 私學이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私學은 創設者나름의 創設精神이 있어 이것을 펴볼 의지로 창설을 보게 되며, 이것을 통하여 민족에 이바지한다는 것도 再論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느 정치권력도 이 정신을 犯할 수가 없습니다. 私學이 무슨 利權團體인양 임의로 주무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5·16 措置의 어떤 차질로 인하여 학교가 곤경에 처하게 되매, 本人은 이 打開를위하여 바깥 일에 골몰하던 틈에 몇몇 배신자들이 학교를 송두리째 권력에 떠넘기고, 권력은 이것을 奇貨로 嶺南大學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떳떳하지 못한 출발이었습니다. 교육계의 이런 사태는 온 세상의 빈축을 샀습니다. 靑丘大學은 통합을 하기 前에 자체내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윤리적, 事理的 문제가 너무나 많이 있었습니다. 지금 언필칭 대통령 학교운운하는데, 이것이 과연 그 분의 뜻일까도 의아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사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상의 善後策을 講究하는 것이니, 아래에 몇 項의 조건을 제시합니다. 本人은 이것이 비단 本人의 입장에서 본 요망일 뿐 아니라, 嶺南大學의 건전한 발전과 우리나라 교육계의 앞날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라 생각하오니, 귀하께서도 그 건설적인 의미와 가치를 음미해 주시기를 간곡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1. 靑丘, 大邱 兩大學 관계인사를 같은 비례로, 각 3인 이상 理事陣에 영입할 것.
 2. 통합당시 靑丘工業專門學校만은 本人에게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이행할 것.
 3. 學校 인수당시 당연히 정리되었어야 할 學校負債 한 건을 가지고 本人을 괴롭히는 일을 당장 중止할 것.
 4. 靑丘大學을 18년간 피땀으로 육성해 온 設立者에게 응분의 보상을 해 줄 것.

 이상, 조속한 시일내에 回示를 해 주실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1970年  4月 5日
                      靑丘大學 設立者
                        崔 海 淸  

                                                                                                                               
청구대학을 위한 변론의 요지
 이상 진정서, 청구서등 같은 내용의 되풀이에도 불구하고 공개하는 이유는 靑丘大學을 위한 변론의 요지가 여기에 다 담겨있기 때문이다. 卽 설립자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 靑丘大學은 巷間에서 흔히 말하듯 負債에 倒産한 것이 아니며, 여느 紛糾學校처럼 내분에 갈라진 경우가 아니다.

- 理事들과 設立者/學長 과의 관계도 일반 槪念과 달랐다. 名目뿐인 理事長의 進上覺書 하나로 팔아 넘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위에서 우리는 그 進上覺書에 理事長 자리는 비워 있으며, 前 理事長 全基守씨는 平理事로 되어 있는 것도 보았다) 그 종이 한 장으로 학교가 무슨 이권단체인양,  남의 18년 심혈의 결실을 橫領하는 것에 대하여, 재판소나 등기소 언저리에 득실거리는 사기꾼을 보지 않았느냐는 강한 표현을 하고 있다.

-  소위 새 理事陣은 돈 한 푼 투자하지않고, 靑丘大學 자산을 팔아서 嶺大의 敷地를 사는데 불만이었고, 특히 靑丘大學으로서는 由緖깊은 시내 중심지, 文化洞 校舍를 처분한데 대하여 애석했다.

- 그리고 처음에는 大靑丘를 만든다고 했다가 過去抹殺主義로 나가는 것, 私學인지, 官學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어가는 데 대하여 분노했다.

- 지금 엎지른 물과 같은 상태에서 피차간에 수습할 수 있는 길로, 최소 兩大學이 等分의 理事配席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世論과 다를 바 없다. 

- 靑丘工專만은 통합에서 제외할 것을 끈질기게 要求한 것은 이 약속만은 받아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 대한 當時 同窓幹部의 證言등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이걸 키워서 「靑丘」란 이름의 움씨라도 남기기 위해서, 간절한 마지막 소망이었다. 

 靑丘大學은 돈으로 시작한 학교가 아니고, 문자 그대로 적수공권으로 平地에서 일어 선 경영체였지마는 항간에서는 곧 잘 재정문제로 귀착시킨다. 여기 대하여 也靑은 “내가 最後段階에 마련한 土地만 해도 地價昻騰으로 二十億 以上이 되어, 負債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 證明되고도 남는다”고 말했다(편지 68/5/7). “그냥 두었더라면 去年에 數十億 벌어 富者學校 되었을 것이다.”(편지 68/1/31) 그러니 嶺南大도  “순전히 남의 피땀어린 재산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 現在 慶山에 … 建設한다고 … 이것도 文化洞 校舍판 돈으로, 官權을 動하여 郡民을 울리면서 土地를 매수 … 孝睦洞 校舍를 15億에 흥정中 … 言必稱 大統領學校”(편지70/5/23) “순전히 靑大 可動財産, 文化洞 校舍팔아 노름하는 것이다. 道路編入때 6千餘 받아 舊債 가리고, 韓銀에 3億5千에 팔아 (韓銀은 國稅廳과 交換, 그 후 大宇에 팔고, 大宇는 다시 Migliore(밀리오레)에 팔아, 현재는 Migliore 건물), 慶山에 土地를 强制로 廉價買入하여…王立大學을 만든다는 것도 모두 그 돈이다.”(편지 70/8/10)

 
국문학자 조윤제 박사의 아이디어

 文化洞 校舍에 대해서 애착을 가진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침  趙潤濟씨를 말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趙潤濟씨는 … 前後 사태에 대하여 가장 원통하게 여긴 분들中 하나이기도 하다. 그도 靑大로 올때는 나름대로 꿈이 있었다. 나는 靑大에 만족하지않고, 二部 文化洞 校舍를 시민에게 제공하여 「文化센터」로 사용케 할 구체 설계를 가지고 金仁 道知事, 姜啓元 市長, 金判永 敎育監등을 舍宅에 불러 半公式的인 추진을 하! 고, 또 그 밖에도 「桐華寺 서머스쿨」, 陶山?學會등 기획이 있었는데, 그는 이것을 알고 의기투합한 것이다. 靑大 敎授들에게 배은망덕과 그들의 망상을 峻烈히 責한 것도 그였다. 官에서 侵入한데 대해서도 정면으로 반대했다 … 韓日會談 반대로 정치교수 제1호로 묶였다가 마지막으로 풀려나기는 했으나, 당국과는 不好感이다. 내 주변이 모두 이런 黨類라해서, 이번 일의 總原因을 거기 두는 사람도 있다…”(편지 ‘68/1/12)

 

 工專과 靑丘 이름에 대한 執着: “去夏 會議場所에 나가지 말라는 사람, 나가서 그들을 안고 돌라는 사람, 意見이 紛紛했는데, 나가라는 사람에게 둘러쌓였다. 卽  나가서 경리부정과 倒壞事件을 들고 李厚洛의 체면만 세워주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 그후 倒壞, 不正 캐는 약속도 이행 안되고 … 統合 소리가 … 기정사실화되고 말았으니, 이름이나 하나 남기도록 工專말이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 개편한 同窓들도 兩大 전통을 살리면서 어찌 設立者를 제외하느냐는 주장을 앞세우고, 다음은 工專 찾는 일을 전개해보겠다는 것이다 … 嶺大理事 加入을 시켜준다해도 탐스러울 것도 없지만, 靑丘大學으로서 해결지워야 할 일은 모두 未決인양 넘어갔으니 …工專案은 사실 趙潤濟 博士, 鄭晩敎씨의 案!이었다.” (편지 ‘68/2/3)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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