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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 4월 18일 하오 2시 30분경, 이승만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장병욱의 광장] 4월 18일 하오 2시 30분경, 이승만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11.05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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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⑩ 경무대 검증

위증, 배신, 궤변으로 점철된 이른바 '7월 법정'의 시간은 궁핍의 풍경 너머 가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학생들에 대한 발포 명령자를 가려내기 위한 경무대 현장 공판이 1960년 7월 29일 밤 9시까지 서울지법 형사 1부의 심리로 벌어졌다. 바로 7월 법정의 절정이다. 

경무대 앞 경비를 하던 이근 상사 등 헌병 6명의 증언도 청취됐다. 이 상사는 “하오 1시 30분경 분명히 군복 차림의 곽주영 경무관이 발포 명령을 하는 것을 보았다”고 오전 중의 증언을 다시 한번 다짐하며 ”바로 이분입니다“라고 손으로 곽을 가리켰다. 

포수(砲手)가 산짐승 다루듯 144명의 젊음을 앗아간 독재의 포수, 발포 명령자들은 온갖 뻔뻔스러운 잔꾀를 다 부리다 발뺌하기에 바빴다. 몇 달 전까지도 상관이요 부하며 동료이던 사이가 이제는 서로를 구렁텅이로 몰아넣어 자기가 헤어날 발판을 삼기에 별의별 꼴을 다 보였다. 그들의 말만 들어보면 혁명 법정 피고인석에는 단 한 명의 살인자도 앉아 있지 않았다. ‘민족의 소추’를 받고 끌려 나온 피고들은 모두가 “학생들에게는 총부리가 돌아가지 않게 했다”는 거짓말도 모자라 “그날 데모의 뜻을 알고 있었다”고 강변까지 했던 것이다.

‘경무대 앞 발포 사건’ 현장 검증의 발길이 경무대의 문턱을 넘어서던 날의 기록이다. “그토록 피를 쏟으면서 범접을 못 하던 경무대 문턱도 이날은 헤- 입을 벌리고 뭇사람이 지나치는 데 맡겨졌다. 지키는 사람도 몇 안 되는 경무대 안 권세의 자취는 전혀 찾아볼 길 없었고 본관으로 돌아가는 아스팔트 길목에 놓인 ‘일단정지’ 표지도, ‘경무대 경찰서장’이란 글씨도 과거의 기억을 되새겨 주었다.”   

현장 검증의 발자취는 “늙은 독재자가 자랑삼았던 경무대를 가로질러 본관 안까지” 이어졌다. 본관 현관을 들어서는 곽주영 경무관의 얼굴에는 뭔지 모를 복잡한 표정이 떠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계단 양옆에 활을 쏘는 우리나라 여인상과 물동이를 들인 촌부 상이 있는 넓다란 홀. ‘곽’은 이것들을 휘돌아보며 마치 박물관을 구경시켜주는 안내자마냥 “여기가 경비실입니다”라고 말했다.  

경비실은 바로 현관을 들어서며 왼쪽 방. 그 맞은쪽이 탈의실인데 바로 이 방에서 종일 방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발포 명령을 할 틈도 없었다고 곽은 발뺌하고 있었다. 그 방송실 옆방이 대기실. 4·19 때는 여러 장관이 이 방에서 이승만의 안색을 살피며 지새웠으며 그 장관들이 바로 ‘곽’의 알리바이였던 셈이다.   

그들의 진술에서 4월 18일에서 19일에 이르는 사이에 어수선하고 두려움에 잠겼던 모습이 선하게 드러났다. 그날 경무대 본관으로 들어가는 모든 문은 잠겨졌으며 오직 경비실을 통해서만 출입하게 해놓고는 그대로 이러쿵저러쿵 수선대기만 하다기 피를 볼 때까지 별 수를 꾸미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3등 열차 맨 뒤 칸의 승객들. 사진 저작권=한국일보 DB콘텐츠팀 

“그동안 늙은 독재자는 2층 거실에 있었다. 거실은 대기실 옆의 회의실을 지나는 복도 끝 계단을 올라간 모퉁이 방이었다. 그 옆이 침실. 다음은 화장실. 그다음은 이기붕의 장남 강석 군 방이었는데 이 방들은 지금 두꺼운 커튼이 드리운 채 곰팡이 냄새만 풍길 뿐 가구도 없어 어수선하기만 했다. 2층 거실에 있던 이승만은 18일 하오 2시 30분경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계엄령을 선포하기로 하고 박 비서가 결재받기 위해 아래로 모셔 내린 것이었다. 저런 얘기를 늘어놓으며 곽은 “왜 저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웁니까”하고 자못 비감(悲感)한 듯 우겼다. 본관을 나서다가 그는 현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뉴스에서 흔히 이승만이 자유당 지방 간부들에게 곧잘 일장 훈시를 하던 그곳이었다. 4·19 당일 늙은 독재자는 만약의 경우에 달아나려고 자동차를 대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하던 그는 엉뚱한 한마디. “경무대 동산은 그냥 꽃장판인 줄로만 알지만···. 보십시오, 잘 가꾼 나무들은 우리가 손이 벗겨지도록 일한 것입니다.”

본관 검증으로 검증은 일단 끝맺고 그 뒤로는 줄곧 증인 신문만이 있었다. 심문 내용은 검증 때의 사실과 대동소이. 증인으로 나온 남태우 전 경무대 서장이 바깥 그늘에서 쉬는 동안 물통을 든 순경 1명이 머뭇대던 끝에 “고생되시겠습니다”라고 되뇌며 경례를 붙이는 것이 보였다.

또 다른 구경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5-18 민주화 운동 무력 진압에 대한 사법적 판결의 경우와 같이 4-19 당시 발포자 색출 역시 지난했던 것이다. 서로서로 모략했다.

백남규도 같다. 위로는 홍진기 조인구에 밀고 유충렬 이상국을 악착같이 끌고 든다. 그는 그냥 경무대와 효자동 종점을 왔다 갔다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발포 명령을 조에게서 받았다고 되뇌었다. 조도 같다. 마냥 유와 백남규에게 민다. 18일에 벌써 각 서장에게 (발포 여부를) 맡겨버렸다고 잡아떼기도 한다. 그것이 발포할 것을 전제로 책임을 미리 전가한 것 아느냐는 추궁에는 “그렇기도 하다”고 뻔뻔스레 긍정도 해 보인다.

물론 홍진기는 홍대로 모든 것을 유에게 민다. 자기는 마산 사건 때부터 발포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세웠다는 항변이다. 그 원칙은 “이 대통령께서도 찬성하셨다”며. 처지가 구차해지니까 하찮은 발뺌 수까지도 끌어대 본다. 경찰에서는 “쏘시오, 쏴요”라고 했다지만 그런 말을 경찰에서 흔히 쓰는지는 몰라도 자신은 ‘발포’라는 말만을 쓴다는 것이다. 홍진기는 아래로 밀었다. 조인구는 시경에 민다. 유츙렬 백남규는 치안국에 민다. 그날 피고석에 발포 명령자는 한명도 없었던 셈이다. 그저 파리하게 질린 여섯 사나이가 옛 세도를 등지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손목에는 피로 물든 수갑이 채워져 있고.

그러나 핏발이 선 눈으로 악을 쓰는 유충렬, 핏기 가신 이마에 비지땀 맺힌 곽영주, 마른 침만 삼키며 타버린 입술을 할딱대는 백남규, 연신 손톱만 뜯고 있는 홍진규, 태연한 듯 차리고 연신 입을 뒤틀고 있는 조인구, 표정이 창백하게 죽어버린 이상국. 여섯 얼굴의 행색을 두고 신문은 “시체나 다름없는 사상(死相). 사형 집행인의 얼굴에서나 찾아볼 납덩이 같은 흉상(兇相)”이라 썼다. “혁명 재판을 말없이 배심하는 백마흔 넷 원령(怨靈)이 지켜 보고 있었다”며.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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