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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 어스름 낀 새벽, 어머니가 이웃 마을로 동냥 가는 줄도 모르고…
[장병욱의 광장] 어스름 낀 새벽, 어머니가 이웃 마을로 동냥 가는 줄도 모르고…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10.2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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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⑧ 보릿고개 혹은 굶주림의 기억

여기서 잠시 들녘으로 가 보자. 법정에서 희대의 진풍경이 펼쳐지는 동안 민초들은 조반석죽으로 적빈의 삶을 이어갔다. 1961년 5월의 시리즈 기사 ‘보리고개(당시 표기)’는 고관대작들의 법정 드라마가 자아내는 부조리를 민중의 핏빛 언어로 토해 내고 있었다. 물질적 과잉의 21세기 한국은 그 시절을 잊어버릴 권리가 있을까. 

보릿고개를 넘기는 농민들의 한결같은 고통 거리는 어린아이들을 굶기고 있는 일이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 또한 이 어린 것들의 끼니를 메워주어야 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이영춘 박사의 창안으로 학교 급식을 시작했다는 옥구군(현 군산시)의 개정(開井)국민학교. 이 학교는 결식아동의 실정을 근 20년 동안 연구한 김경제(농촌위생연구소 개정 보건소장) 선생의 지도 아래 급식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교생 955명 가운데 4할인 422명의 결식아동의 허기를 달래볼 도리가 없다고 깨달은 선생들은 드디어 방과 후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성미(成米) 운동에 발 벗고 나서게 됐다. 

당시 기자가 이 학교 교정에서 처음 만나 본 6학년생 김용현(14) 군은 아침 보리밥 한 끼 밖에 얻어먹지 못 하는 아이였다. 그는 ”오늘같이 구름 낀 날엔 빨리 보내줄 것이라고 점심도 안 싸 왔기에 배가 고파 죽겠다“는 것이었다. 흐린 날엔 아침도 보리죽을 먹어 왔느냐고 캐묻는 기자에게 마지못해 털어놨다.

그와 함께 교정 나무 그늘에 쪼그리고 앉던 박원길(14) 군도 똑같은 소리를 했다. “한 주일에 닷새쯤 아침엔 보리밥을 먹어요.” 성화경(13) 군은 또한 “점심을 써오는 아이들이 저렇게 저희끼리만 밥을 먹을 때 뱃속에서 더 주르륵 대요”하며 휴게 시간을 탓했다.

이렇게 굶주려 온 아이들이 제대로 자라날 리 없다. 누르끄름하게 탄 얼굴을 맞대고 웃음을 터뜨리며 천진난만하게 놀아볼 엄두조차 안 난다. 한 교사는 “일본 사람들을 왜놈이라 일컬어 온 우리의 아이들이 오히려 왜놈이 돼 가고 있다“고 걱정하며 그의 연구 결과를 보여줬다. 학위 논문으로 준비된 그의 조사에는 ”태어날 땐 일본 아이들보다 키와 몸무게가 크나 자랄수록 뒤떨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결식아동의 이런 발육 사정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학교 급식이 가장 이상적인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 실적도 이 학교에서 쉽사리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아이들에게 주는 강냉이죽조차 그릇(컵)이 없어 못 타 먹는 불쌍한 아이들이 많았다.

학교에선 한 반에 다섯 개씩 컵을 마련해 주었으나 완력 센 아이들이 뺏어 저희끼리 나누어 먹고 감춰버리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점심을 싸 온 아이들은 “부자라서 저희끼리만 노니 밥그릇을 빌려주지도 않는다”는 얘기들이었다. 박 군과 김 군은 “컵이 없어 강냉이죽마저 못 얻어먹는 아이들이 한 반에 20명은 더 되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4·19혁명 이후 진행된 지리멸렬한 싸움만 반복된 법정 바깥에는 굶주린 아이들로 가득했다. 사진 저작권=한국일보 DB콘텐츠부
4·19혁명 이후, 지리멸렬한 싸움만 반복된 법정 바깥에는 굶주린 아이들로 가득했다.
사진 저작권=한국일보 DB콘텐츠부

본시 ‘절량농가(絶糧農家)’란 끼니를 거른다는 뜻이라기보다 제집에서 농사지은 양식으로 끼니를 메우지 못하는 집을 가리켰다. 이 말뜻을 새기는 데 따라 ‘절량농가’가 많다느니 적다느니 따지는 시비가 곧잘 벌어지게 된 모양. 그들은 끼니때를 세 번으로 꼽지 않고 있다. 절량농가의 끼니때는 아침과 저녁으로 줄어들었다. 시간도 달라졌다.

아침은 새벽 3시에서 8시 사이의 적당한 시간을 가려먹었고 저녁은 5시에서 밤 9시 사이. 부안군 행안면 대벌리에서 열세 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오동업 씨 집의 끼니때를 살펴보고 그런 줄 알 수 있었다. 아침 밥상엔 해초와 보리 이삭을 섞은 보리밥과 된장, 그리고 풋김치 한 접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점심을 먹는 이는 보리죽을, 저녁은 보리밥이었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 아침에 보리밥이나마 먹을 수 있는 집은 불과 3할 정도로 절반 이상이 밀가루나 강냉이 가루를 섞은 보리떡을 먹었다. 그리고 굶는 집이 2할은 더 될 것 같았다. 점심에 보리죽이라도 끓이는 집은 3할미만. 저녁 끼니는 거의 죽으로 때웠는데 굶는 이가 3할쯤이나 됐다.  

그런데 아침이나 저녁이나, 아이들이 시장해서 울음을 터뜨리고 보채는 것은 다섯 시경이었다. 밥상을 차려오면 수저를 먼저 들었으며 밥사발도 먼저 비워버리고 빈 그릇만 자꾸 긁적거렸다. 그래도 밥을 퍼주는 기척이 없으면 부모의 얼굴만 쳐다보는 것이었다. 배가 차지 않는지 된장국을 퍼먹고 김치라도 씹어야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밤에는 으레 물그릇에 물을 떠다 놓았다. 짜게 먹은 탓으로 목이 말라 물을 들이켠다는 것. 저녁때엔 그보다 서글픈 얘깃거리가 더 많았다. 

어느 날은 어린아이들이 저녁을 짓기 전부터 솥을 둘러싸고 부엌 안에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다 아버지가 이웃 마을에라도 가면 잔칫집이나 가는 줄 알고 숟가락을 호주머니에 넣고 따라붙었다. 새벽 서너 시쯤 돼서 몰래 어머니들이 낯선 이웃 마을에 밥을 동냥하러 가는 줄도 모르고 따라나서려고 발버둥 칠 때면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든다”는 것이었다.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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