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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 정치인이 곧 깡패요, 깡패가 곧 정치인이었던 시대
[장병욱의 광장] 정치인이 곧 깡패요, 깡패가 곧 정치인이었던 시대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08.27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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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② 1960년 7월, 치욕의 정화

“7월은 혁명의 달. 미국과 필리핀이 독립을 이룩하고 프랑스의 혁명이 터진 날이다. 이달 새 공화국의 사직(司直)은 3-15의 부정을, 3-15의 치욕을 이 땅 위에 빚어내고 ‘4월의 분노’를 즈려 밟으려던 원흉들의 죄악을 법으로 가리는 것이다.” 1960년 7월 1일 자, 역사의식으로 충만한 기사다. 그와 함께 신문은 “7월 혁명”이라는 제하의 박스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요즘의 눈으로 봤을 때 다소 정제되지 않은 당시 신문의 레토릭을 보자. “옥중 원흉 중에는 전 국민의 분노를 비웃듯 거리낌 없이 총선 입후보 등록을 자행하고 있다. 과거 그들의 그늘 밑에서 그들의 수족으로 충성과 아부를 서슴지 않던 수많은 군상도 고귀한 혁명의 정신을 비웃는 듯 난무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전 국민은 앞으로 누가 정권의 자리에 앉든 다시는 지난날의 고난을 되풀이하기를 원치 않으며 독재와 부패의 씨가 또다시 이 땅에 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사실 7월의 법정 드라마(7월 재판)는 혁명이라기보다는 구체제 인사들에 대한 일련의 사법적 정죄 절차였다. 4·19혁명을 의식적으로 계승한다는 사실을 암시한 언론 특유의 限時的 용어였다. 사설의 지적대로 “피로 물들인 4-19 의거(당시 용어)가 일어난 지 3개월 남짓한 오늘 전 국민의 시선은 서울지법 대법정으로 집중된 가운데 그들에 대한 민족의 심판은 드디어 내려지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30여명의 피고인과 열 두 사람의 검사 그리고 또 30명의 변호인이 서울지법 대법정에서 ’벌을 주려고‘ ’벌을 피하려고‘ 피 말리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두목급에 속하는 정치 깡패인 이들 29명의 죄상을 검찰 측의 기소장을 통하여 다시 한 번 보면서 우리는 어느새 국민의 승인도 없이 거의 국가의 명운이 이들 깡패들의 수중에 위임되다시피 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스러이 전율을 금할 수 없고 다시금 그들의 조직이 얼마나 뿌리 깊고 대규모의 것이었던가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자존심을 몇몇 인간들이 쥐락펴락했던 일이 지근의 과거였던 한국인에게 저 같은 진술(1960년 7월 7일 자 논설)은 항상 유효한 명제다. 

유지광(오른쪽)은 제1공화국 당시 유명한 정치폭력배다. 1957년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을 테러한 것(장충단집회 방해사건)으로 악명을 떨쳤다. 또한 3·15부정선거로 전국에 시위가 일자, 제1공화국의 청탁을 받아 자신이 이끄는 화랑동지회를 이끌고 시위대를 테러하기도 했다. 왼쪽 사진은 1988년 그의 영결식 모습. 사진 출처=한국일보 DB콘텐츠부
유지광(오른쪽)은 제1공화국 당시 유명한 정치폭력배다. 1957년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자들을 테러한 것(장충단집회 방해사건)으로 악명을 떨쳤다. 또한 3·15부정선거로 전국에 시위가 일자, 제1공화국의 청탁을 받아 자신이 이끄는 화랑동지회를 이끌고 시위대를 테러하기도 했다. 왼쪽 사진은 1988년 그의 영결식 모습. 사진 출처=한국일보 DB콘텐츠부

그러나 정의는 작동하고 있었다. “소장에 나타난 부정 선거 관리, 부정 선거 모의, 부정 선거 지령 등등 열거된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지난 3-15 정부통령 선거 당시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들의 모습과 과거 수년간 그들의 폭고와 학정 아래 시달렸던 그 시절이 다시 한번 생생하게 눈앞에 떠올라 오는 것을 금할 길 없다.” 

온·오프 매체는커녕 미디어조차 거의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 이 초유의 이벤트에 쏠린 관심을 통제해야 했던 당국의 고심과 대처 방식은 요즘 눈으로 보아 이채롭기까지 하다. 일반 시민에게 나눠질 방청권은 50매로 제한되었는데 공판 전날 아침 선착순으로 배부되었다. 한여름 열기 속에서 장사진이 펼쳐졌다. 방청권 배당 요령은 다음과 같았다. 피고인 가족 78매, 사건 담당 변호인 78매, 외국인 공보 관계자 50매, 각 대학교와 고등학교 135매, 4월 혁명 부상 동지회 3매, 일반 신문 통신사 50매, 나머지 50매가 일반 시민에게 돌아갔다.

한편 공판에 있어 혼잡을 피하고자 서울시경 당국은 법원으로 통하는 길을 모조리 차단하였다. 시경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공판이 진행되는 당일은 덕수궁 입구, 배재중 입구. 정동입구 등 통로가 일제히 막혔다. 

한편 국가의 기초가 미약했던 당시 ‘깡패’에 대한 정의는 조직과 권력을 탐하는 이 시대 폭력배들 비겼을 때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문제의 본질은 깡패의 정치화다. “경제, 행정, 정치, 문화 등의 각 방면에 그렇게도 깊숙이 침투하여 마침내 국가를 제압하려는 단계까지 발전 팽창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들은 “시민에 대한 ‘테로’는 다반사이고 야당의 집회를 공공연하게 방해하였고 평화적 데모를 마친 적수공권의 대학생들을 흉기로 습격하여 수많은 사상자들을 내게 해놓고서도 태연했던 자들이다. 사람이면서 이미 사람의 피도 눈물도 없는 이들 정치 깡패가 얼마 동안의 철창 생활을 마치고 다시 사회에 나왔을 경우를 생각만 하여도 국민의 마음은 우울해진다.” 저 진술이, 지금 깡패 혹은 조폭이 영화 등 오락물의 소재로 변형된 우리 시대에 보내는 경고는 혹시 아닐까.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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