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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 "종로4가 네거리 일대는 아우성과 파괴의 도가니로..."
[장병욱의 광장] "종로4가 네거리 일대는 아우성과 파괴의 도가니로..."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08.1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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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① 1960년 봄날의 하드보일드

“....오늘은 또 어디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 아무도 예측 못 한다......사태가 악화된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에 있다고 지적하는 데 우리는 주저하지 않는다.” 1960년 4월 19일자 한국일보 사설은 썼다. 거기에는 진영 논리도, 사회 과학적 잣대도 없었다. 있다면 원형질의 분노 혹은 정의감, 아니면 시쳇말로 의리였을 것이다. 

질곡의 역정 속에서도 훼손되지 않았던, 남산 위의 소나무 같은 가치를 신문은 일깨웠다. “3-15 부정 선거 후에도 민주 공화국을 욕되게 하는 정치 궤도를 버리지 못한 정권”의 작태를 우리는 이명박의 후안무치에서, 박근혜의 파렴치에서 확인한다.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을까. 당시 6년차의 젊은 신문 한국일보가 격류를 헤치고 나온 궤적을 따라가며 동시대를 기록한다는 것의 의미를 좇아가 보고자 한다. 

[한국일보 저작권][한국일보 DB콘텐츠부]

“어젯밤 마산서 사상 초유의 불상사”. 3월 16일자 1면 머릿기사의 대형 컷 제목은 시선을 낚아챘다.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마산의 데모 소식 중 최루탄이 눈에 박힌 시위대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마산 사건 조사단의 발표였다 

“김주열군의 시체를 바다에 버린 유력한 용의자로 부산형무소에 수감중인 박종표 경위를 지목, 수사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18일 하오 10시경 마산경찰서 교통 주임으로부터 마산지검 앞에 최루탄이 박힌 시체가 발견됐다는 보고를 받은 박주임은 서장에게 보고, ”적의(敵宜)처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한다. 박 경위는 현장에 달려가 시체를 찝차에 실어 마산소로 돌아왔다가 다시 마산세관 앞에 이르러 찝차 운전수의 조력을 얻어 김군의 시체를 바다에 던졌다고 자백하였다. 그런데 박은 왜정 때 혹독한 고문 헌병으로 알려졌던 일군 헌명 伍將)으로서 수많은 애국지사를 고문 치사케한 사실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팩트를 내세운 전형적 스트레이트 기사다. 한맺힌 주검은 일파만파의 울부짖음으로 이어졌다.

4월 19일자로 돌아가자. 기사는 당시 이승만 정부를 고삐 풀린 열차로 표현했다. “급행 열차처럼 정부는 전후좌우를 돌보지 않고 일로 3-15 선거로 돌진하였다.....그렇게도 고문 경관의 처벌을 요구했는데 시간만 끌어가려다가 마침내 김주열 소년 참시(慘屍) 인양으로 사태는 중대 단계에 돌입하고 말은 것”이라며. 

신문은 사태의 인과적 추이를 중시했다. 악의 축은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3-15 부정 선거였다. 4-19는 격발점이였던 것이다. 19일자를 보자. 직전의 3-15 부정 선거를 언급하며 4-19의 직접적 도화선 역할을 한 사건을 등장시킫다, 시작은 평온했다.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데모는 18일 하오 6시 40분 경찰 당국과의 합의로 국회의사당 앞에서의 연좌 데모를 끝마치고 다른 대학교생 및 중고등학생의 홍을 받아가며 평화적 데모로 귀교하려고 하였으나 대모대가 종로4가 천일백화점 앞을 지날 무렵 난데없이 쇠뭉치등을 들고 날뛰는 정체 불명의 괴한 3십여명의 집단 폭행으로 드디어 유혈의 참극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학생 행인 및 경관등 39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부근 일대의 상가가 형편없이 파괴되는 등 어둠이 짙은 종로4가는 삽시간에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객관적 사실 報道를 전가의 寶刀로 삼는 스트레이트 기사에서 ‘드디어’라는 자못 감정적 단서가 개입된 점이 주목된다. 스트레이트 기사의 관례로 볼 때 희귀한 경우다. 바로 다음 이어지는 기사가 서술하는 풍경은 손에 잡힐 듯 하다.

“난데 없이 정체 불명의 괴한 30여명이 쇠뭉치 쇠사슬 곤봉 등을 휘두르며 선두에 선 신문사차를 부수기 시작하며 학생들을 무자비하게ㅡ갈기기 시작하였다.. (중략)극도로 흥분된 학생들은 길가에서 손에 닥침는대로 들고 고함과 함께 돌진하였다. 수에 열세를 느낀 괴한들은 순식간에 행방을 감추었으나 주동이 된 고대생보다 어린 학생풍의 소년들이 돌멩이 몽둥이로 무차별 보복을 감행하는 바람에 천일백화점으로부터 종로4가 네거리 일대는 아우성과 파괴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신문이 전하는 정리의 풍경은 일견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고대생들은 폭력을 하지말라고 상호 견제하며 동재문쪽으로 학교를 향하여 계속 데모하기 시작, 일단 학교에 들른 다음 8시 50분 해산했다.” 미증유의 사태를 바라보는 편집자의 심리 상태를 반영한 것일까, 제목은 미래파 시인의 시만큼 감각적이며 긴박하다. “歸途(귀도)에 유혈의 아수라. 폭력배 기습. 후퇴–반격–동료 규합–귀교”

사실 이 날의 데모를 촉발한 것은 서울대 문리대였다. “이 날 대학생들의 데모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부터 터져나왔다. 상오 9시 20분 서울대 문리대 음대 법대 약대 수의대 2천여명 학생이 문리대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이 놈 저 놈 다 글렀다. 국민은 통곡한다.’ 라는 초라한 플래카드를 앞세운 학생들은 교문앞광 이화동 입구 등에서 경찰의 몽둥이 세례를 받았으나 그대로 강행, 원남동을으로 돌아 종로로 향하였다.” 대학생들의 관념을 배제한 구호에 어떤 격정마저 느껴진다. 기자들은 그러나 냉정히 기록해 갔다. 그들은 꼬치꼬치 보고했다.

“9시 50분 데모대 선두는 종로 4가 전매청앞에서 경창 피켓 라인에 부딪혔다. 그러자 약 2백 미터에 뻗힌 데모대 옆 골목마다 약 50명의 경관이 나타나 경찰봉과 막대기를 휘두르며 데모 대열 한가운데로 달려들었다. ”와-“하는 경찰의 함성, 학생들의 아우성 선두에서 터져 나오는 애국가, 그 가운데서 무자비한 난타, 난타. 5분만에 학생들은 전매청 공장과 법원 관사쪽으로 쫓겨 들어갔다.”  

[한국일보 저작권][한국일보 DB콘텐츠부]

십중팔구는 시위대를 따라가며 수첩을 마구 넘겨가며 뭔가를 내갈겼을 기자들의 심장 박동은 어떠했을까.  그 초미의 상황을 기술하는 태도가 그러나 매우 하드보일드하다. “학생들은 붕대를 간고 재집결하기 시작했다. 그 때 데모대 뒤쪽에서 또 뭇매가 일어났다. 정복 경찰관의 몽둥이가 부러져 달아났다. 학생 하나가 머리를 싸쥐고 주저앉았다 메를 피해 학생들은 소 몰리듯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선두는 매가 빗발치는 경찰 저지선을 뚫고 달아났다. 그 뒤를 매가 따랐다. 발을 다친 학생 하나가 낙오했다. 정복과 군복 10여명이 달려들었다.”  단문과 단문의 배치가 자아내는 긴장감으로 폭발할 것 같은 문장이다. 기사를 쓴 기자는 시위대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 같다. 아니면 그것은 데스크였을까? 중요한 점은 그것이 당시 한국일보의 입지점이었을 것이라는 개연성이다.

무자비하게 봉을 내갈기는 기사는 이렇게 그렸다. “매가 떨어졌다. 학생들은 길가에 주저앉아 버렸다.  계속해서 떨어지는 매. 인도에서 노파 한가 ”사람 죽인다“고 외치다 사람에 밀려 쓰러졌다. 쓰러진 채 노파는 엉엉 울고 있었다.” 목젖을 콱 누른다. 

신문 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기사는 팩트로 진실을 대변한다. 그 날의 대미. “10시경 경찰은 파고다공원 앞에 강력한 저지선을 쳤다. 낙오했던 약 7백여명이 대열을 바로 집고 다시 달려온 500명과 합류했다. 한 발 두 발 경찰은 최루탄을 쏘아댔다. 흰 연기를 꿇고 대열은 움직이기 시작, 2가에서 을지로쪽으로 향했다. 뒤따른 5백여명은 종로 4가에서 3가쪽으로 행진해 오고 있었다.” 이제 승부를 정리할 때다.  

“경찰은 손을 들어버린 셈이었다. 10시 30분 서울대학 데모대의 주류는 의사당 앞에 도달, 눌러 앉아버렸다. M1 소총으로 무장한 정복 경찰이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중부서장이 여러번 해산을 권고했으나 끝내 불응했다.”

기자의 시선은 이색적인 풍경을 놓치는 법이 없다. 그 날 그 기자들에게는 현장에서의 여대생들이 유독 눈에 띈 모양이다. "여대생 참가로 열기 올려"라는 제하의 박스 기사다. “서울대 데모대가 세종로 로터리에서 국회앞으로 꼬부라질 때 단발 머리 숙대 학생–김종자(가명)양이 선두에 뛰어들어 ‘정부통령 선거를 다시 하자’는 플래카드를 양손에 치켜들고 목이 메도록 울부짖었다. 데모대의 선두는 그녀를 높이 치켜들고 만세를 외치고 연변 시민들도 박수를 아끼지 않아 데모대의 의기는 충천했다. 그녀는 또한 의사당 정문앞 계단 높은 자리에서 여왕처럼 떠받들리어 박수 갈채를 받았다.” 그 용감한 아가씨가, 굳이 가명이란 말로 자신을 가린 것을 안 뒤 본인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 하는 호사가적 생각이 두서없이 치민다. 

4.19혁명 첫 발포 동판 설치. 4.19혁명 당시 경찰이 시민을 향해 첫 실탄을 발포한 자리에 설치된 ‘인권 현장 바닥 동판’. 서울시가 4.19 혁명 59주년을 맞아 종로구 청와대 분수대광장 바닥에 설치했다. 당시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저작권 한국일보][한국일보 DB콘텐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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