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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 이승만 별장에서 벌어진 희한한 사건들
[장병욱의 광장] 이승만 별장에서 벌어진 희한한 사건들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11.26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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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⑬ 독재자의 별장, 화천별장

“3-15 부정 선거의 원흉들을 다스리는 7월 재판이 5일 드디어 그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이날 흰옷들을 입고 쇠고랑에 손이 묶인 채 줄지어 법정으로 들어가는 그들의 초췌한 모습은 새삼스럽게 과거 그들이 저지른 가지가지의 반민족적 죄악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중략) 전 국민은 앞으로 누가 정권의 자리에 앉든 다시는 지난날의 고난을 되풀이하기를 원치 않으며 독재와 부패의 씨가 또다시 이 땅에 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원흉 심판의 날을 맞아 우리는 모든 정치인이 숙연히 머리를 수그리고 과거를 되살펴 혁명의 결실을 위해 그 결의를 새로이 하기를 촉구해 마지않는다.” 7월 재판의 시작에 맞춰 <한국일보> 사설은 썼다.

재판이 염천의 날씨보다 뜨거운 관심 속에서 한 달가량 되고 있던 때, <한국일보>는 시리즈 ‘대통령 별장 비화’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독재 12년 선물 누각(樓閣)’이라는 부제를 단 일련의 기사는 각지에 숨어 있던 이승만의 별장 5곳에서 자행된 희한한 사건들이 망라돼 있었다. 부패한 권력의 속살을 이렇게 헤집어 일약 장안의 화제로 떠올랐다. 

제1호가 화천별장이었다. 휴전 다음 해 봄. 파로호의 산장 터를 닦아 판자로 구관을 지었던 곳이다. 그 후 이승만 박사가 이곳에 홀려 “원더풀하다”는 감상을 말하자 당시 참모총장 정일권 대장이 곧 신관을 짓기로 결정, 육군 공병감의 직접 지휘하에 한식 별장을 또 세워 풍치를 어울려 놓았다.

“목재가 흔한 강원도 산골 멀리 ‘회양목’을 실어다 아름드리 재목으로 한식 건물을 세웠다는 것이나, 육로 하나 없는 이 무인지경에 건축 재료를 전부 서울 방면서 운반해 내렸다는 지성만으로도 먼저 이 박사의 환심을 충분히 살 수 있었을 것 같다.

로비에서 굽이지는 호수를 파로호(破虜湖)라 일컫고 짙푸른 솔숲이 수면에 산수화 마냥 얼크러져 청풍과 명월을 부르며 정숙한 위치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파로호란 6·25 당시 청성 사단(6사단) 부대 용사들이 이 저수지에서 중공 오랑캐를 크게 격파했다는 데서 붙은 이름이다. 

이 박사는 항상 헬리콥터로 별장 옆 특설 착륙장에서 내려 전후 다섯 번 이 신관에 유(留)했다. 그 경우 대체로 1주일 전부터 인접 사단이나 경찰을 통해 ‘체류 준비령’이 내렸고, 도착하기 몇 시간 전부터 헌병과 경찰 및 정보 기관원으로 구성된 정사복의 경비병이 널려져 밀림의 초선(哨線)이 사방 주위를 감쌌다(빽빽한 수풀에 잠복해 있던 보초들이 사주 경계를 서고 있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수행원이나 부름을 받은 장성들은 화천에서 묵으면서 통통선을 타고 30여 분의 물길을 달려가 그를 조석으로 받들었다.

그는 이 속에서 낚시질을 몹시 즐겼다. 그때마다 백 미터가량 되는 늪 기슭에 잔교(棧橋)를 걸어 터전을 만들고 낚시에 걸리도록 그물로 잉어를 몰아넣어 비위 맞추기에 여념 없었다는 풍설이 돈다.

전선 지구의 별저(別邸)이니 만큼 중요 군사 정책이나 고급 장교의 인사 안배를 구상한 일도 있었을 거라지만 별저에선 이 박사 부처의 ‘한가한 마음’을 또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침실에 일용품이 골고루 갖춰진 중 명묵양연(名墨良硯)과 대필(大筆) 몇 자루는 그의 운치 깊은 필체를 연상케 해주었다. 명묵은 백자령(白子鈴)이란 금박(金箔)이 들고 양연은 옹진석(鷹津石)같았다. 연심(硯心)에는 마묵(磨墨)한 자취가 지금도 흑명(黑明)해서 그 무슨 역사를 말하려는 듯도 하다. 

서랍에 든 <아메리칸 머큐리>지 1955년 4월호는 어느 갈피가 접혀 있었다. ‘서방 안전의 관건-아프리카’라는 제목의 갈피였고 그 밖에도 ‘텔레타이프’의 외신 카피가 네댓 종 팽개쳐져 있었던 것은 역시 국내외 정세를 살핀 흔적이리라.

‘원데이’라는 비타민제를 비롯해 네댓 종의 내복용과 외상용 약품, 귀이개에 이르기까지 무척 몸을 아낀 흔적도 남았고 염낭에 든 골패나 손길이 번진 트럼프는 부부 사이에 오락의 정이 간혹 섞였음을 뜻하는 것일 터. 지금은 장병들의 가족이 소풍 차 간혹 찾아드는 집으로 변했다.”

축출된 권좌 주위를 감싸는 애잔함이 기사에 묻어난다. 한편, 며칠 뒤 사설.

피난 생활과 거반 같았던 1960년대 부산 판자촌의 삶. 사진 저작권=한국일보 DB콘텐츠팀

“죄는 미워하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원흉들에 관한 한 죄를 미워함은 물론 사람도 미워한다. 왜 그러냐 하면 그들에게 있어서는 죄와 사람이 동일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몇 해 동안을 두고 범죄 의식을 고지(固持)해 왔으며 옥중에서까지 제대로 그 죄의식을 씻으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 때문에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억압에 짓밟혀, 사는 보람조차 느끼지 못했음은 수십일 전 일이다. 그들은 선량한 인간 사회의 독수리와도 같았으며 소심한 시민에게 있어 이리와도 같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영화와 학정 밑에서 위축 고척(枯瘠)해 가던 지난날을 생각한다면 아직도 모골이 송연해짐을 금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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