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욱의 광장] 저 진한, 푸르고 육중한 바다로…
[장병욱의 광장] 저 진한, 푸르고 육중한 바다로…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08.06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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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Prologue

[편집자주] 이번 931호부터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이 '장병욱의 광장'을 시작합니다. 현재 <한국일보>는 1954년 6월 9일 창간호 기사부터 순차적으로 디지타이징(아날로그 기사를 디지털 형식으로 변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장 위원은 이 과정에서 현재 우리를 규정짓는 역사적 순간을 ‘다시’ 목도하는, 놀라움을 경험했다고 말합니다.그 놀랍고 안타까운 순간, 4·19혁명부터 5·16쿠데타까지의 시간. 하지만 계속해서 소환되는 이 시간을 23회로 나눠 소개합니다.  

절대 빈곤의 시대, 신년호 1면은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절대 빈곤의 시대, <한국일보> 1960년 신년호는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혁명 후의 우리 사회의 문학하는 사람들을 보면 예전에 비해서 술을 훨씬 안 먹습니다. 술을 안 마시는 것으로 그 이상의, 혹은 그와 동등한 좋은 일을 한다면 별일 아니지만 그렇지 않고 술을 안 마신다면 큰일입니다. 밀튼은 서사시를 쓰려면 술 대신 물을 마시라고 했지만 서사시를 못 쓰는 나로서는, 술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랑을 마신다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습니다.”

문청(문학 청년)이란 단어가 낭만의 치장을 한 채 현실성을 띠던 시절, 풍류깨나 아는 어느 애주 문필가가 했을 법한 언설 같다. 그런데 虛頭에 내건 ‘혁명’이란 말은 또 뭔가? 더 따라가 보자.  

“누가 무어라 해도, 또 혁명의 시대일수록 나는 문학하는 젊은이들이 술을 더 마시기를 권장합니다. 뒷골목의 구질구레한 목로집에서 값싼 술을 마시면서 문학과 세상을 논하는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지 않는 나라는 결코 건전한 나라라고 볼 수 없습니다. ”‘4·19 혁명의 시인’ 김수영이 혁명을 추억하며 쓴 산문 「요즈음 느끼는 일」(1963)에 보이는 대목이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글을 쓴 것은 5·16 쿠데타 이후였지만, 글에는 제2공화국이 남긴 심리적 풍경이 선명히 각인돼 있다.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한 문장이다. 술을 매개삼아 주권을 유린당한 나라 백성의 비애를 그린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1921) 속 착잡한 풍경에 비기는 것 자체가 모독이리라. 새삼 문제는, 시인이 일컬었듯 “젊은이들의 아름다운 풍경”이니까.

1960년 4월에서 1961년 5월까지는 우리 현대사에서 드문 매력적 공간이다. 그 공간의 풍경을 재현하고 싶었다. <한국일보>의 창간호부터 단 한 건의 기사도 빠짐없이 제목을 데이터베이스에 축적해 오면서, 제목 아래 펼쳐진 한문투성이의 기사 또한 읽어 가면서 옛 신문이 곧 보물단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컴퓨터 유저들의 검색을 돕기 위한 작업(디지타이징)이, 알고 보니 콘텐츠의 재발견이었던 셈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TV 프로그램 류의 회고적 흥미가 아니라 적극적 의미를 제2공화국의 텍스트들은 강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역사에 문외한인 필자가 감히 나선 까닭이다. 

예를 들어 허정은 4·19혁명 뒤 100일 동안 과도정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제2공화국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혁명의 열기를 반영하지 못해 군사정권이 일어난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아왔다. 그가 4·19혁명의 열기를 수습해 제2공화국으로의 길을 텄을 수도, 결과적으로 헛발질로 박정희에게 찬탈의 기회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이후 일련의 고통스런 궤적이 갖는 참의미는 한참 후에나 밝혀질 ‘역사의 간계’였을까….

잘못 건드리면 약간의 곰팡내와 함께 바스라지던 옛 신문들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일보> DB콘텐츠부의 꼼꼼한 데이터베이스 작업 덕분이다. 제목으로 그리피스의 무성 영화 「국가의 탄생」을 언뜻 생각했던 것도 같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겪어야 했던 몇 개의 통렬한 대목을 복기한다는 심정으로 봐 주셨으면 한다. 

그런데, 왜 '푸르고 육중한 바다'인가? 

제2공화국이 남긴 문제작 『광장』(1960)은 운을 뗐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그리고 말미에 이르러 “바다를 응시하던 그가 마카오 근처에서 행방불명됐다”고 전한다. 소설은 명준의 시대를 추적해 간다. 정치적 지향점을, 사랑을, 구체적으로는 공동체로서의 국가를 상실한 한반도의 한 사나이가 거대한 태평양 한켠에서 홀연 사라지기까지를 재구성해 본, 이를테면 특별한 行狀이다. 몹시 미안하게도, 그를 다시 꺼내 역사의 바다 속으로 투하해 따라가 보기로 했다. 혼돈과 가능성으로 교차 편집된 제2공화국이라는 저 진한, 푸르고 육중한 바다로….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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