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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 구천 길의 동생마저 배웅할 수 없었던 어느 판사 이야기 
[장병욱의 광장] 구천 길의 동생마저 배웅할 수 없었던 어느 판사 이야기 
  •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 승인 2018.11.12 19: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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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욱의 광장_⑪ 판사의 설움

염천 아래 펼쳐진 7월 재판의 와중인 1960년 7월 22일 특별한 돌발 기사가 게재됐다. 공교롭게도 재판 진행 중 아우의 상을 당한 판사가 있었다. 친형제의 상을 당하고도 전혀 내색 없이 재판을 진행한 어느 판사를, 신문은 “혁명의 행진은 혈육의 정을 넘어”라는 제하의 사회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7월 재판을 맡은 장준학(서울고법 형사 제1부 부장 판사) 재판장은 실제(實弟)의 상을 당한 슬픔마저 법복 속에 가려두고 이 역사적 사건을 예정대로 진행해 법조계에 감명을 주었다.” 요즘 감각으로는 다소 늘어진 리드(lead: 도입문)임에는 틀림없는데···. 따라가 보자.

“지난 6월 30일 장 부장 판사는 가장 아끼던 막둥이 동생 현택(29) 군을 심장 마비로 여의었다. 그러나 그는 ‘7월 재판’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 이 사실을 외부에 부고(訃告)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눈물을 삼키며 그 산더미 같은 공판 기록을 검토해 왔다. 이 사실을 알아낸 법원의 몇몇 직원들은 몰래 ‘공판 기일 연기’를 고려해 왔으나, 그는 사흘 동안의 기고(忌故) 결근이 끝나자 다시 법원에 나와서 매일 밤 9시나 10시가 넘도록 공판 기록과 씨름, 지난 6일의 첫 공판을 예정대로 개정했던 것이다.”

한참 늦은 21일 이 부고가 인근 주민들을 거쳐 법조계에 비로소 전해졌다. ‘4월 의거 정신’을 받들어 혁명적인 심판을 내리려는 법관들의 굳은 다짐에 새삼 머리를 수그리게 한다는 얘기가 꽃피었다. 부고를 듣고 찾아간 기자에게 육순의 자당(慈堂)과 부인은, 그러나 눈물지을 뿐 끝내 아무 말도 전해 주지 않았다. 재야로부터도 가장 강직하고 전형적인 법관으로 존경받은 그는 7월 재판에서 ‘발포 명령 관계’ ‘대통령 상해 음모 조작 사건’ 등 중요한 사건을 심리 중에 있던 터라 가족들에게 철저히 입단속 시켰던 것이다. 막둥이 동생에겐 무슨 일이었을까? 

“강원도 울진(현 경북 울진)에 본적을 둔 장 판사의 막둥이 동생 현택 군은 지난 6월 30일 새벽 2시 고등 고시 수업 준비 때문에 과로한 나머지 심장 마비로 가족들도 모르게 작고했다. 아침 6시 반경 이 사실을 안 온 가족은 당황했다. 장 부장 판사가 서울로 전근 온 지 불과 2년밖에 안 된데다가 친척은 울진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새 그는 집이 좁고 가족이 많아 언제나 밤 10시까지 법원에 혼자 남아 기록을 검토했고, 아이들이 잠든 뒤에야 집으로 돌아와 밤이 이슥해지도록 공판에 대비하는 일 처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비극을 외부에 일절 못 알리게 했다. 5남매는 독신으로 죽은 아우를 고향의 선친 묘 곁에 묻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를 돌봐 줄 후손도 없는데다가 하루라도 이 슬픔을 씻는 것이 낫겠다고 눈물을 머금고 2일 홍제동에 화장을 해버리고 유골도 그대로 버렸다. 상중의 3일간 그는 밤이 깊어지면 공판 기록을 검토하며 슬픔을 씻어왔던 것이다.”

어찌 저리 해맑을 수 있을까. 각박할수록 아이들의 웃음은 더욱 절실한 희망이었다. 사진=작가 최민식의 사진(1965)

아니, 실상은 장 재판장이 사감(私感)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리라. 당시 사람들의 눈에 비친 7월 법정이란 오히려 죄인들이 큰소리치는, 이상한 곳이었다. 바로 저들 고관대작의 후안무치함 때문이었다. 피고들의 후안무치가 세간의 화제일 수밖에 없었다. 연일 화제가 쏟아졌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가십(gossip)성 기사의 보고(寶庫)였던 셈이다. 

“증인과 피고의 말싸움으로 시종일관한 어느 날. 증인이 자신에게 유리한 발언을 하자 대놓고 파안대소하는가 하면 불리한 증언이라도 들을라치면 ‘푸푸-’ 소리를 내며 좌불안석하다 극한점에 이르면 설전을 벌이곤 하는 식이었다.

비교적 조용하던 경찰 이덕신도 예외는 아니었다. 변호사의 보충 심문에서 불리하다 싶으면 대번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종애사를 읽은 분은 알겠지만, 이 이덕신이가 무죄라는 건 10년 후에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하더니 방청석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퇴장했다. 또 변명에 급급하던 김상봉은 김종원과 언쟁이 벌어지자 ‘비양심적인 피고를 위해 증인 서기를 거부한다’고 선언하며 일시 법정을 소란케 했다. 진술 중 ‘대한민국 만세’ ‘하느님’ ‘인간’ ‘정의’ 등의 단어를 곧잘 쓰던 김은 퇴장 전 ‘임희순 피고인이 나를 저놈의 새끼라고 욕하는 걸 들었다’고 재판장에게 호소했다.”

망발을 늘어놓던 권력층을 세운 소위 ‘7월 법정’은 ‘4월의 피’로써 정죄하는 자리였다. 적반하장을 일삼던 그들과 추종 세력을 두고 한국일보 사설은 개탄했다. “과거 그들의 그늘 밑에서 수족으로 충성과 아부를 서슴지 않던 수많은 군상이 혁명의 정신을 비웃듯 난무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전 국민은 앞으로 누가 정권의 자리에 앉든 다시는 지난날의 고난을 되풀이하기를 원치 않으며 독재 부패의 씨가 또다시 이 땅에 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머잖아 공염불에 그칠 비원(悲願)이었다. 

장병욱 <한국일보>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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