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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과 무악재 사이 그 곳 … ‘파놉티콘’ 공간을 흔든 것은?
독립문과 무악재 사이 그 곳 … ‘파놉티콘’ 공간을 흔든 것은?
  • 장세용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ㆍ서양사
  • 승인 2012.08.27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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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7> - 서대문형무소

 

▲ 시민 품으로 돌아온 서대문형무소 내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수형자 5천여명의 인적자료를 전시한 방일 것이다. 축조한 사형장에는 독립을 위해 생명을 던진 민족 지사들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사진은 두 장면을 편집한 것이다. 사진 최익현 기자

 

1975년 4월 9일 새벽 주로 대구·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민주화운동 관련 인사 24명 가운데 8명이 서대문형무소에 일년 정도 갇혀 있다가 1~2심 군법회의에서 국가보안법, 반공법, 긴급조치위반의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당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난지 18시간만의 일이었다. 한국현대사의 손꼽히는 사법살인으로 유명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당대의 유신권력자가 자신의 지역적 세력기반인 대구·경북의 반대세력들을 일망타진해 영구집권의 토대를 마련하려던 야심의 발로였고, 서대문형무소는 그것을 실현하는 도구적 장소로서 통한의 피눈물로 젖어든 공간이다. 현대사에서 서대문형무소는 민중들의 온갖 삶이 만화경처럼 전개되는 공간이며, 일제강점과 독재시기를 거치며 끊임없이 반대자들을 억압하여 권력의 영구화를 꿈꾸던 자들이 생명을 희롱하던 세계극장이며 디스토피아였다. 서대문형무소의 장소성은 식민제국과 독재의 권력자들에게는 참으로 절묘했다.

무악재를 넘어가는 서울-의주 교통로에 자리 잡고서 오가는 민중들이 지레 주눅 들게 만들고, 獨立門을 세운 정신을 마음에 새기는 이들이 갈 곳은 감옥뿐이라고 은근히 협박하는 위치이기에 그렇다. 서대문형무소는 본래 1908년(순종 2년) 10월 21일 일본인 건축가이며 간수출신인 시텐노 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로 대한제국 탁지부 시공으로 인왕산 기슭 금계동에 500명 수용을 목표로 세운 최초의 근대식 감옥, 경성감옥이었다. 일제 무단통치의 강력한 도구 그러나 일제강점으로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치안수요를 감당하고자 1912년 마포 공덕 세운 새감옥을 경성감옥으로 삼고 ‘서대문’이라는 지극히 조선적인 장소명을 감옥에 붙여 위상을 낮추되 내용은 강화시켜 무단통치의 은밀하고도 강력한 도구성을 부여했다.

감옥 규모를 계속 확장해 1916년에 女舍를 건립하고 3·1운동 당시 시위관련자 1천600명을 비롯해 3천여 명을 수용하고, 1923년에는 새청사를 세우고 사형장도 설치하며 1935년 6개 옥사를 신축해 3천500명을 수감하게 만든 것 등이 그 증거다. 이것은 전국적인 감옥의 증설과 함께 식민지 백성의 삶이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고 감시와 처벌로 점철된 현실을 증언한다. 80년간 35만 명을 수감해 온갖 恨을 묻은 서대문형무소는 사소한 개인의 한없이 비루한 삶에서부터 독립지사와 민주화운동가들의 숱한 절개와 기개, 오욕과 좌절 그리고 피맺힌 수난까지 낱낱이 지켜본 현대사의 진정한 증언공간이다.

권력의 도구로써 서대문형무소가 수행하는 구체적인 역할은 죄수의 수감에 그치지 않고 敎誨를 빌미로 인간성을 모독하는 고문과 노역 곧 徵役을 자행한 것이다. 그 출발점에 105인 사건이 있다. 1910년 11월 27일~12월 2일 사이에 압록강 철교개통식에 참석하는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을 빌미로 일제는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 신채호 등 주로 서북지방과 서울의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전국적 비밀결사조직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대한매일신보를 발간하던 新民會의 일망타진을 목표로 관련자 600여명을 수감하고 고문해 허위자백을 받아내어 기소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는 수많은 민족독립운동가와 애국자들을 수감해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이불이나 돗자리도 없는 시멘트 바닥에 수갑을 채우거나 몸을 묶어 내던져두고 용변도 방한구석에 파놓은 홈에서 처리하도록 만든 징벌방인 ‘먹방’에서 고문하고 처형하는 고문기계로 작동했다.

감시와 통제의 공간을 비틀어버린 힘 동시에 서대문형무소는 工作舍에서 하루 10~14시간 노역으로 전국의 감옥이나 군대에서 필요한 관용물품을 만드는 강제노동 생산공간이기도 했다. 해방되고 나서는 수많은 간첩, 사상범, 민주화운동가들이 거쳐 간 이곳은 가히 한국현대사의 절규와 핏방울이 벽돌마다 배어 있는 고통과 통곡의 장소이기에 민족해방의 燔祭의 제단이며 지성소(sanctuary)이다. 군집형태 건축물로 구성된 서대문형무소는 일찍이 공리주의자 제레미 벤덤이 제안했고 미셸 푸코가 설명한 감시와 통제를 구현하는 근대 공간 파놉티콘(panopticon)을 잘 표상한다. 붉은 벽돌 담장에는 수감자들의 탈옥을 감시하고자 1930년대 후반에 설치한 10m 높이 망루가 6개가 있었고, 부채살처럼 생긴 운동장인 隔壁場을 비롯해, 3구역으로 나눠진 T자형 부채꼴 옥사 중앙에 간수가 앉아서 보면 넒은 감옥이 고개만 살짝 돌려도 한눈에 모두 들어오고 뚫린 복도천정 철망 사이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서대문 형무소는 一望監視 체제를 수용한 근대감옥의 견본이었다. 이러한 공간 배치는 일본이 프랑스와 벨기에의 근대감옥을 모델로 삼고 1870년대부터 세운 자신들의 제국 안에 근대감옥을 모방 설치한 결과였다. 거기에는 감방 외에 한 평 남짓한 특수한 감방으로 구성된 일상적 감시와 통제 공간과, 수감자를 전향시키는 敎誨와 개조를 명분으로 온갖 고문이 자행돼 단순히 신체적 후유증만이 아니라, 자백과 허위자백이 가져오는 정신적 內傷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반인륜범죄가 일상화된 억압과 폭력의 공간이 공존했다. 뿐만 아니라 형무소 옥사에는 별도의 화장실을 설치하지 않아 나무통에다 용변을 처리하는 비위생적 환경과 혹독한 추위로 말미암은 동상과 피부병이 수감자들의 육체를 갉아 먹었고 급기야 출옥하고 나서도 여독과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감시와 통제 그리고 끊임없는 노역과 처벌만이 관철됐던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가들이나 민주화운동가들은 서로 다른 감옥에서 미리 정한 암호로 벽을 두드려서 통신하는 도산 안창호의 사례에서 보는 타벽통보법이나 3·1운동 수감자들에게 보듯 통방을 개발해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도 했다. 어윤희, 유관순의 3·1운동 1주년 기념만세 투쟁이나, 대한독립공명단원들의 태업이나 파업이 가능했던 이유도 여기 있다. 결국 강고해 보이는 파놉티콘의 감시와 통제의 공간을 비틀고 변주시키는 저항공간은 항상 존재했다. 그런 점에서 서대문형무소는 감시와 통제의 일상공간, 노역과 제조의 생산공간, 억압과 폭력적 고문과 처벌공간 그리고 그 내부에 민족해방과 민주화운동 전략을 고심하는 反-감시 공간이 존재하는 4중 구조 공간이었던 것이다.

 

 

장세용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ㆍ서양사
필자는 영남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 「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사형제도 비판론의 전개(1760~1795)」, 「1990년대 이후 영국 노동당 정부의 로컬거버넌스 정책」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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