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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세월의 기억 內藏… 한국 정치의 ‘중심의 주변’ 공간
77년 세월의 기억 內藏… 한국 정치의 ‘중심의 주변’ 공간
  • 장세용 부산대 HK교수
  • 승인 2012.06.05 1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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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4> - 서울시의회 건물
일제강점기 시기의 부민관

서울시청 광장 서쪽 건너편 성공회 주교좌 성당으로 들어가는 골목 입구, 고층 건물들 사이에 겸손한 듯 고즈넉하게 1995년 6월 27일 지방자치제 실시로 서울특별시의회와 사무국이 사용하는 3층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은 1954년 제 3대 국회부터 흔히 태평로 국회의사당으로 불리며 한국의회정치의 성장기에 중심 공간 역할을 해왔지만, 그와 동시에 모독, 협박,변칙통과 그리고 농성으로 점철된 의회정치사의 말없는 증인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농락되던 입법공간

1966년 9월 2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삼성그룹계열사 한국비료공업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두고 대정부질문을 진행하던 김두한 의원은 정일권 총리 등 국무위원이 앉은 자리로 다가서더니, 오물을 와락 끼얹었다. 아수라장이 된 의사당은 역한 냄새로 가득 찼다.

1971년 12월 6일, 정부는 중국의 유엔 가입에 따른 국제정세의 급변과 북한의 남침을 비롯한 안보를 이유로 비상사태를 선포하며 6개항의 특별조치를 발표했다. 12월 23일 박정희는 백두진 의장에게 공한을 보내 비상사태 하에서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비상대권을 부여하는 전문 12조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 법안’의 조속한 국회통과를 촉구했다. 그것은 협박이었다. ‘만일 이번 회기 중에 통과되지 않으면 비상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비장한 각오로 임하지 않을 수 없다’.

12월 27일 새벽 3시, 땅! 땅! 땅! 공화당과 무소속만으로 국회 제4별관 외무위원회에서 법사위와 본회의를 열고 3분 만에 전격 작전으로 법안을 변칙통과 시켰다. 이때 야당인 신민당의원들은 법안들의 본회의보고와 발의부터 저지하고자 본회의장 및 국회 제 2·3·4 별관에서 철야 농성하고 있었다.

이 나라 모든 도로의 원점인 도로원표 비각이 서 있는 광화문 앞에서 시작돼 서울시청을 거쳐 남대문까지 세종대왕과 이순신장군 동상이 서 있는 태평로는 국태민안 태평성대의 꿈을 최고도로 현시한 국가적 상징성과 공적 공간을 표상하는 중심도로이다. 동시에 여러 언론사가 자리 잡은 이 공간에서 국회의사당은 국민의 여론을 전달하고 입법하던 공론장으로 존재했다.

지금도 일천만 서울시민을 대변하는 시의회 역할을 감당하는 이 공간은 단순한 장소성을 넘어서 여론형성과 입법공간의 위상을 여전히 유지한다. 그러나 이곳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는 것보다 더 실현되기 어렵다고 조롱받도록 취약했던 민주주의를 농락하던 역대 권력자들의 무력에 맞서던 피와 땀의 투쟁공간이었다. 아울러 정책과 담론보다는 물리적 억압과 육체적 투쟁이 앞섰던 미숙한 의회정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 현장이었다.

역사적 현장으로서 이 건물은 본래 조선의 국내 전기·가스 사업을 독점하고 서울의 전차를 운영한 일본인 소유기업 경성전기주식회사가 100만원을 기부해 조선총독부가 건축한 본격적인 근대식 건물이다. 여기서 1937년 6월 23일 예술성과 상업성을 절충한 중간극을 표방하던 극단 중앙무대가 박영호 작 「까치우는 섬」과 송영 작 「바보 장두칠」을 창단공연 했고, 신파극단과 악극단의 공연도 잇따랐다.

그러나 일제강점말기 부민관의 두드러진 역할은 일제를 찬양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친일예술과 정치의 집회장소로 변질됐다. 1941년 3월 16일에는 대표적인 친일 극단 현대극장이 ‘국민연극’ 이론 수립과 실천을 표방하며 「흑룡강」을 창단공연 했고, 자원징집과 물자 헌납을독려하는 크고작은 시국강연회도 연달아 열렸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거, 부민관 폭파

대표적인 친일파 모윤숙, 이광수 등이 이곳에서 조선청년들의 태평양 전쟁 참여를 독려하며 친일 활동의 정점으로 치달았다. 친일파의 이런 행태는 결국 애국청년들의 공분을 샀고, 1945년 7월 24일 친일파 박춘금의 주도로 친일어용대회인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리자 항일비밀결사단체 대한애국청년단 소속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은 박춘금의 친일연설 도중 다이너마이트 사제폭탄을 터트려서 연단을 폭파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의거였고, 건물 앞의 부민관 폭파 의거비는 이곳이 변절과 저항의 공간이었던 사실을 단순명료하게 말한다.

이 건물은 1954년 국회의사당으로 전환됐지만 한국정치의 중심이 아니라 ‘중심의 주변’ 공간이었다. 이승만 자유당 정권 아래서는 온갖 친일파들이 냉전을 등에 업고 친미파로 변신하면서 민의를 우롱하는 장소였다. 그런가하면 1960년 4월 18일 이 건물 앞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고대생들이 귀가 길에 반공청년단 정치깡패들의 피습을 받으면서 4·19 혁명이 시작됐기에, 이 공간은 또한 민주화 운동의 이정표를 세운 장소기도 하다.

한때 4·19 혁명 이후 의원내각제가 실시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면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된 국가의 중심공간으로서 새로운 국가 건설의 담론이 분출하던 담론 투쟁 공간이었지만 그것도 한순간의 영광에 불과했다. 5·16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는 이 건물을 국가운영의 부속공간으로 전락시켰다. 

1961년 5월 16일 쿠데타 당일

60년대 중반에는 어느 정도 입법공간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오물 투척사건에서 보듯 외부와 내부가 경쟁적으로 모독을 감행하고 있었다. 1969년 9월 14일 7대국회에서 민주공화당이 대통령 3선 개헌안을 국회별관 3층 특별위원회 회의실에서 통과시키면서 의회정치는 위기에 직면했다.

거기에 71년 ‘국가보위 법안’통과는 별관이 본관을, 변칙이 원칙을, 권력이 국민을 능욕하는 시기의 도래를 상징했다. 1972년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안이 통과되고 대통령을 간접선거로 뽑으며 국회의원 3분의1을 대통령이 지명한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채우면서 국회는 독재권력의 보조공간으로 전락했다. 검열기계가 작동하는 국회는 국민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입법 생산의 공장에 불과하게 됐다. 1975년 9월 국회가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이 건물은 오욕과 충돌의 장소 역할을 마감했다.

장세용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ㆍ서양사
필자는 영남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18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사형제도 비판론의 전개(1760-1795)」「1990년대 이후 영국 노동당 정부의 로컬거버넌스 정책」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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