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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욕의 역사가 새겨진 상징투쟁의 공간
오욕의 역사가 새겨진 상징투쟁의 공간
  • 이명수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2.04.23 13: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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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1> - 장충단 공원

공간의 운동과 생성의 ‘장’은 사람의 행위를 담는 ‘터’, ‘곳’으로서 장소다. 장소는 인간들의 사건을 수용한다. 장소는 공간의 하나지만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어딘가 그곳, 장소에서 사람들은 존재자 자신의 현재성을 표상으로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유의미의 공간, 장소성을 생성하는 것이다. 장충단공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문자 그대로 충성한 사람을 칭송하기 위해 만든 제단, 장충단공원은, 남산이라는 공간의 한 곳에서, 특히 근현대 격동기에 수많은 사건들을 담아냈고, 사람들은 그곳을 둘러싼 장소 만들기에 나서 그들 나름의 의식을 형상화했다.

도성의 안산인 남산 기슭 경복궁에서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 장충단공원에는 ‘장충단’비가 놓여있어 여기가 조선 고종 때 만들어진 사당 장충단이 있던 자리를 알려 준다. 그 옆에는 몇 년 전 청계천의 복원 시에 제자리를 잃은 수표교를 옮겨놓았다. 또한 동국대학교를 등지고 사명대사를 비롯한 이준, 이한응, 유관순의 동상도 서 있다. 장충단공원은 기념물로 가득 찬 기념공간으로서 탑골공원, 독립공원과 함께 도성 안 공원으로 자리매김 된다. 이들 기념물 앞 길 건너에는 장충체육관이 지붕을 드러내고 있다. 그 우측으로 신라호텔이 치솟아 있고, 저 너머에는 무학대사가 한양의 궁터를 암시받았다는 왕십리와 한강의 동호대교가 지근거리에서 서울의 역사성을 드러낸다.

장충단은 조선의 심장부 가운데 하나이면서 외세에게 끊임없이 굴욕을 겪어온 우리의 역사를 상징하는 공간이다. 장충단의 건립부터가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 민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된 을미사변의 산물이다. 이때 궁내부 대신 이경직, 시위 대장 홍계훈 등 많은 충신들이 그들에 맞서다 죽자 고종은 그때 죽은 영령들을 기리고자 1900년 9월 19일(양력 11월 10일)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완공했다.

장충단 입구는 소나무로 虹如門을 세우고, 큰 나무에 대한국기를 걸어 사방에 세우고, 제단의 제일 위부터 홍계훈, 이경직을 비롯해 국모를 보위하다 생을 마감한 무인들을 배치했다. 고종은 장충단에 대한제국 제일의 추모공간으로 위상을 부여하고, 1908년까지 해마다 봄, 가을 그곳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이 공간은 고종이 대한제국의 안위를 보우하는 軍神의 반열로 승격시킨 충신을 기리는 숭고한 장소인 동시에 애국계몽단체들이 참배하는 장소기도 했다. 그것은 이 장충단을 관리하던 권한이 군부에 주어졌고, 당시에 애국자강을 열망하는 진명부인회를 비롯한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모인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장충단은 비록 그 역량은 미흡했지만 계몽군주를 지향하던 고종과 시민으로 자각해가던 신민들의 시선이 함께 모이는 합의공간이기도 했다. 바로 그것이 장충단의 운명을 재촉했다.

일제는 장충단을 군용지로 편입시킨다든지, 1908년에는 봄ㆍ가을에 열리던 위령제를 금지하면서 장악 술책을 벌였다. 마침 1909년 가을 이토오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하자 11월 4일을 국장일로 삼고 황족과 관료, 특히 조선인 관료와 조선인 학생들을 모아 놓고 장충단이 더 이상 조선의 공간이 아닌 일본의 공간임을 분명히 했다. 일제는 장충단이 지니고 있는 군주와 신민의 합의공간으로 더욱 발전할 여지를 억압하고 1919년에는 장충단공원이라는 위락공간으로 개장했다.

장충단이 겪은 굴욕의 역사에서 더 압권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1932년 이곳에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이름을 딴 ‘博文寺’라는 절을 세우고 공원을 조성한 사실이다. 박문사는 1932년 4월 23일 기공해 이토오 23주기인 같은 해 10월 26일 완공된다. 기금은 일본과 조선 등지의 독지가와 지역별 할당액으로 이루어졌다. 박문사 건립 때 본당은 경복궁 선원전을 떼어다 쓰고, 경희궁 정문인 興化門을 뜯어와 문짝으로 삼고는 景春門이라 했다. 임진왜란 기에 남산에 왜성대를 새우고 경복궁을 능멸하려던 일본의 야욕이 최종 승리하는 순간이었다.

일제는 또 절의 종파를 曹洞宗에 두고 이토오의 아호 ‘春畝’를 써서 ‘춘무산 박문사'라는 이름을 삼았다. 박문사 건립에는 친일파 이광수, 박영효, 윤덕영 같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했고,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은 1939년 만선시찰단의 일원으로 박문사에 와 향을 피우고 이토오의 아들에게 사죄했다. 충신을 추모하던 장소가 정복자의 추모공간이 되고 거기에 자발적으로 굴종하는 역사가 전개된 데서 장충단은 지금도 이어지는 우리 민족 굴종의 역사를 표상하는 공간으로서 손색이 없다.

장충단이 건립 때부터 가지는 또 다른 속성이 있다. 비록 1919년에 공식적으로 공원으로 개장했지만 장충단은 처음부터 독립공원이나 탑골 공원과 같은 위락공원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말에 여가공간으로서 공원이 출현한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한편으로는 독립공원처럼 신민을 각성시키는 집회공간의 성격을 가졌다면 다른 편으로는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배를 관철시키고자 회유하는 공간으로서 성격을 가진다.

장충단공원 역시 그런 이중적 속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1960~70년대 박치기 왕으로 유명했던 김일의 레슬링과 김기수, 유제두의 권투 경기가 열렸던 것도 그런 역사의 연속선상에 있다. 장충단공원은 또 한편으로는 정치활동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7년 5월 25일에는 자유당 독재에 맞서 서울 시민 20여 만 명이 운집해 이승만에게 경고했다. 1971년 4월 25일 박정희는 “이번 한번만 대통령으로 뽑아주면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구걸하지 않겠다”고 하고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길을 갔다. 그보다 며칠 앞선 4월 18일 김대중은 100만 명의 청중 앞에서 박정희의 총통제를 예언했다.

장충단공원의 역사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 벌어진 조선과 일본 또는 친일파들과의 공간투쟁이 있었다는 점이다. 언제나 조선은 패배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장충단공원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조선의 심장부 중 하나인 것이다. 

 

 

이명수 부산대 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박사를 했다. 「동아시아 사유에 나타난 로컬리티의 존재와 탈근대성」 등의 논문과, 『담사동-소통과 평등을 사유한 사상가』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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