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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낙후된 지역에서 민중 소비생활의 메카에 이르기까지
가장 낙후된 지역에서 민중 소비생활의 메카에 이르기까지
  • 김희연 기자
  • 승인 2012.05.09 1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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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왜 명동ㆍ충무로를 추천했나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으로 명동ㆍ충무로를 추천한 학자는 참여한 44명 중 3명이다. 한국근대사에서 미술사, 사회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공의 학자들은 명동ㆍ충무로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대적 이유가 나왔다.

김백영 광운대 교수(사회사ㆍ역사사회학)는 명동ㆍ충무로를 서울 근대화 과정에서 격변한 곳으로 꼽았다. 명동 일대는 “과거 한양이던 시절에 땅이 질어 다니기 어려워 ‘진고개’라 불릴 정도로 가장 낙후된 지역 중 하나”였다. 진고개 일대 남산골에는 “나막신을 신고 다니는 가난한 선비가 살아 ‘남산골 딸각발이’라는 말도 나왔던” 곳이다.

그러던 곳이 “일본인들의 서울 재편 과정에서 대대적인 상업중심지로 성격이 급격히 바뀌었다”. 급변한 장소성은 해방 이후에도 이어져 70년대 이후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한국인들이 자본주의 상품 문화를 접하고 익히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김영나 서울대 교수(미술사)도 비슷한 이유를 들었다. 무엇보다도 명동ㆍ충무로 일대가 “일반 사람들의 역사, 미시사에서 중요했던 곳”이라고 봤다. “독립문 같은 거대한 정치적 장소도 중요하지만 일제시대부터 70년대까지 쇼핑과 패션의 화려한 중심지였던 명동ㆍ충무로 일대는 생활, 특히 민중 소비생활의 중요한 장소였다”는 것.

뿐만 아니라 지식인과 예술인들이 음악감상실 등에 모여 문화를 소비하고 만들어내는 장소기도 했다. 실제로 추억의 장소기도 하다는 김 교수는 “소비와 유행을 주도했던 명동은 지금의 압구정과 비슷한 위상이었다”고 덧붙였다.

이민원 원광대 초빙교수(한국근대사)는 임시정부 인사들이 머물던 한미장을 연결고리로 삼았다. 한미장은 한미호텔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지금의 명동 신한은행 자리에 있었던 숙소다. 그 한미장에는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인 조한구, 조소항, 이시형 등이 머물렀다.

이 교수는 “근처 백범 김구가 살던 경교장과 교류하며 근대적 대학을 구상한 인물들이 한미장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말했다. 그밖에도 워낙 활발한 중심지였기 때문에 종로 중심의 김두한과 명동 중심의 시라소니의 결투 등 재밌는 일화도 많다고 전했다.

김희연 기자 gomi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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