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22:05 (금)
궁궐을 박람회 전시장으로… 권력성의 토폴로지로 점철된 공간
궁궐을 박람회 전시장으로… 권력성의 토폴로지로 점철된 공간
  • 변광석 부산대 HK전임연구원
  • 승인 2012.06.20 13: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5> - 경복궁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 기념일 행사는 유달리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식민지권력의 심장부였던 구조선총독부의 중앙돔 일부 첨탑을 크레인으로 철거하는 장면이 국민들에게 중계됐기 때문이다. 오욕의 현장을 버텨온 세월의 더깨를 벗겨내는 순간이었다.

총독부 건물은 조선왕조 오백년의 正宮인 景福宮의 복판에다 의도적으로 터를 박았다. 궁궐의 정문인 光化門과 국가의 의식을 치르는 중요한 공간인 勤政殿사이에서 역사의 숨통을 조이면서 제국의 위용을 과시한 건물이다. 오늘날 이 광장에 당시 총독부가 있었다고는 쉽게 연상되지 않을게다. 과거 문무백관이 朝服을 입고 근엄하게 드나들고 외국사신이 국왕에게朝賀를 올리기 위해 예를 다해 출입하던 광화문과 근정문이 아니던가.

1900년대 광화문의 모습

조선은 개국하면서 서울이 지닌 도읍으로서의 풍수지리를 잘 활용했다. 북악산 앞에 펼쳐진 평원이 왕궁의 기틀을 머금고 있으며, 이를 감싸고 흐르는 한강은 득수의 조건에 부합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장엄한 궁궐을 축조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전에는 법궁이었고 창덕궁과 창경궁이 이궁으로 사용됐다. 왜군의 침략으로 서울 궁궐이 파괴됐다가 인조 대에 궁궐을 보수했으나 경복궁만은 재정부담 때문에 복원되지 못했다. 대신에 중건된 창덕궁을 법궁으로 삼으면서 경희궁과 함께 동궐과 서궐로 불렸다.

그 후 1863년 고종이 즉위하고 생부인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경복궁의 중건을 시작해 5년 만에 완성됐다. 이마저도 온전하진 못했다. 두 차례의 큰 화재로 慈慶殿과 交泰殿등 여러 내전이 소실됐고 고종은 경복궁과 창덕궁을 자주 옮겨 다니는 신세가 됐다. 급기야 명성왕후가 시해된 사건 후에 고종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 정동에 있던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기까지 했다. 국가의 자존심은 무너졌고 경복궁은 더 이상 왕이 거주하지 않는 빈 궁궐이 돼 버렸다.

일제는 施政 5년을 기념하려는 목적으로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했는데, 장소는 바로 경복궁이었다. 총독이 새로 즉위한 천황에게 진상하기 위해 2년 전부터 계획한 것이었다. 전시회장 마련을 구실로 궁궐 내부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근정문 앞을 지키던 홍화문과 양쪽 옆에 서있던 유화문, 용성문, 협생문 등여러 건물들이 한꺼번에 헐렸다. 이젠 궁궐이 아니라 박람회 전시장에 불과했다. 개장식장에 총독, 정무총감, 중추원 고문관 및 주차군 사령관 등이 국화를 가슴에 꽂고 참석했다.

畜舍 들어서고 건물 일부 일본으로 반출되기도

근정전의 용상에는 총독의 군화발이 차지했고 강녕전과 교태전은 떠들썩한 귀빈실로 사용되는 수모 속에 식민지 권력에 의해 경복궁 장소성이 변질돼 갔다. 심지어 공진회장에 소와 돼지 등 가축의 품종개량 상태를 보여준다는 명분으로 牛舍, 豚舍따위가 궁궐 한가운데에 의도적으로 지어졌다. 아예 일부 건물을 해체해 민간에 불하하거나 부재를 사적 용도로 전용하기도 했다. 세자와 세자빈의 침전이었던 資善堂도 일본인 상인재벌 오쿠라가 반출해 도쿄의 개인 호텔에 버젓이 세웠다.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불타버리자 기단부의 일부를 정원석으로 사용해왔는데, 1995년 기단석과 주초석 잔해를 문화재관리국이 인수받아 80년만에 경복궁으로 다시 가져왔다.

공진회가 끝난 다음에는 경복궁의 역사와 전통을 은폐시키기 위해 식민지 통치기관인 조선총독 데라우치에 의해 총독부가 계획됐다. 하늘에서 봤을 때는 일본을 상징하는 日字로, 정면에서 봤을 때는 중앙 돔이 제국군인의 투구모양, 양 옆 건물이 어깨가 되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양식으로 설계됐다. 독일인 게오르그데 라란데가 기초설계를 하고 일본인 노무라와 구니에다가 뒷부분 설계를 완성했다. 그들은 근정문 앞뜰에서 地鎭祭를 그들의 神道式으로 시행했다.

결국 궁궐 누각과 흥례문 등 4천여 칸이 사라지면서 경복궁은 산산이 유린당했다. 광화문 광장은 ‘조선총독부 광장’이 되면서 조선왕조의 심장부를 도려내고 ‘식민권력의 심장부’를 이식시켰으며, 일제의 식민지배를 광고하는 선전공간이 됐다. 이제 총독부는 단순한 근대식 건축의 표상이 아니라 한민족을 영원히 식민지배 하려는 총본산이었다. 순종이 머물던 창덕궁대조전에 화재가 났을 때도 복구 명분으로 일제에 의해 경복궁 강녕전·교태전의 건물 부재가 강제로 이건되는 등 능욕을 당했다.

경복궁 공간은 권력성의 토폴로지에 의해 점철됐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해방 후 미군정이 통치하면서 군정청으로 재생산됐고, 총독부광장도 군정청 홍보광장으로 환치됐다.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 집무실 등 주요 부처가 배치되면서 중앙행정관청으로 기능하게 돼 외형적으로 권력의 심장부는 지속됐다.

복원된 광화문 그리고 남는 과제

그 후 일제침략의 표상인 총독부를 정부기관의 집무실로 사용할 수 없다는 여론으로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임시 사용하다가, 1995년 해방 5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 해부터 침전인 강녕전이나 동궁영역 자선당 등 개별 건물도 많이 복원돼 궁궐경관이 어느 정도 재생됐다. 특히 위치와 구조문제로 논란이 많던 콘크리트 광화문이 2010년에 원래의 모습으로 제자리를 찾았고, 거기서 수문장 역할을 하던 해태 두 마리도 돌아왔다.

이제 경복궁은 모든 국민과 외국 관광객을 위한 문화의 공간이 됐다. 요즘 광화문과 흥례문에서의 수문장 교대식은 명품 볼거리로서 경복궁 공간의 문화소비 양식의 하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궁궐 대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에 세계문화유산의 자격에 미달하고 있다. 식민지권력에 의해 포섭된 경복궁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회복하는 사회적·문화적 사업이 시급하다. 

변광석 부산대 HK전임연구원ㆍ역사학

변광석 부산대 HK전임연구원ㆍ역사학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임진왜란 이후 동래부사의 동래지역 인식과 기억사업」,「 한말~일제강점기 동래지역에서의 공간포섭과 지역세력의 대응」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