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7:40 (목)
‘을사늑약’ 체결·헤이그 특사 파견 … 해방후엔 美蘇공동위원회 회담 장소로
‘을사늑약’ 체결·헤이그 특사 파견 … 해방후엔 美蘇공동위원회 회담 장소로
  • 변광석 부산대 HK전임연구원ㆍ역사학
  • 승인 2012.07.05 12: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6> - 덕수궁(정동)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 1948년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UN한국임시위원회(미소공동위원회) 최초 회의 광경. 그러나 이 회담은 원칙만 확인하고 결렬되고 말았다. 이 결렬로 인하여 한반도에 새로운 비극이 싹트기 시작했다.

 

서울시청 앞 정동 일대는 한말-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침략과 민족의 저항이 맞부딪치던 격동의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 德壽宮이 있었다. 덕수궁은 서울의 한복판에 있으면서 조선의 궁궐 중에서도 규모가 매우 작았고, 역대 왕실에서 별 관심을 갖지 않아 궁궐다운 전각도 제대로 없었다. 원래 이곳은 조선전기 예종의 조카이자 성종의 형이었던 月山大君의 사저였다.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는 경복궁과 창덕궁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여기에 임시 행궁을 마련해 전란 후의 조선을 재건한 곳이었다. 비록 좁은 행궁이었지만 국난극복의 상징공간이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은 행궁에서 즉위했다가 창덕궁 복원이 마무리되자 옮겨가면서 이때부터 행궁을 慶運宮이라 불렀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이다.

19세기 말 열강의 위협 속에 격동의 역사가 요동치고 있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일본으로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현 경향신문 사옥 동쪽)으로 거처를 옮겨(아관파천), 친일내각을 타도하고 친러파가 정부를 구성했다. 특히 이 일대는 당시 서구 열강들의 공사관이 모여 있었으므로 국제적 역학관계상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러시아로부터 벗어나라는 압력이 커지자 고종은 환궁하게 됐지만 일본의 위협 때문에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덕수궁으로 와서 대한제국을 수립했다. 환구단을 쌓아 천지에 제를 올리고 칭제건원함으로써 자주국을 선포하며 군제개혁과 산업진흥 등 근대화를 향한 光武改革을 실시했다. 덕수궁은 곧 근대개혁의 산실이었다.

광무개혁 단행했던 자주자강의 장소 당시 덕수궁은 현재의 공간보다 3배나 컸다.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행하던 정전인 중화전 영역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함녕전·덕홍전 영역이며, 서쪽에는 석조전 일원, 그리고 그 뒤쪽은 선원전·돈덕전이 있던 터이다. 그 중에서 역사적 사건과 맞닿아 있는 건물을 간단히 소개해 본다. 중화전 뒤에 자그마한 즉조당 건물이 있는데 임란 때 선조의 임시 거처건물로 덕수궁의 모체가 되는 원공간이다. 힘든 시절 고통을 감내하며 왕실을 보전한 궁궐로 인식돼 왔기 때문에 영조는 직접 즉조당을 참배해 옛기억을 회상했으며, 고종도 즉위 후에 이곳을 방문해 절을 올렸고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1902년 중화전을 지을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했다.

편액은 고종이 직접 쓴 것인데 건물은 지금 보수 중이다. 함녕전 뒤에 있는 靜觀軒은 궁궐 후원의 정자 기능으로 한식과 양식을 절충해 지었다. 여기서 고종은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겼다. 1898년 러시아공사관 통역을 지낸 金鴻陸이 국정을 농단하다 발각되자 원한을 품고 고종의 커피잔에 아편을 넣어 독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은 유명하다. 덕수궁에 서양식 건물을 세운 것은 근대화의 표상이었다. 석조전이 영국인 하딩에 의해 설계돼 돌로 지은 것이나 건물의 축을 다른 전각들과 달리 한 것에는 서구문물을 수용해 근대국가로 나아가려는 고종의 의지가 담겨있었다.

정관헌이나 석조전은 대표적인 혼종적 건축물이었다. 덕수궁미술관 뒤 포덕문을 나서면 重明殿이 있다. 1904년 대화재로 인해 고종은 이곳을 집무실로 사용했다. 지금은 궁궐 담밖에 있으며 예원학교와 정동극장이 인근에 있다. 大安門은 동쪽 문이었는데 도로가 나고 환구단이 서면서 새 중심지가 돼 정문 역할을 했다. 대안문은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로 불렸는데 고종의 명령에 의해 大漢門으로 바뀌었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에 의하면 ‘대한’은 ‘ 漢’과 ‘雲漢’ 즉 ‘큰 하늘’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주독립을 향한 대한제국의 몸부림이 느껴진다.

환구단과 대한문 광장은 대한제국의 원중심이었다. 일제는 많은 전각을 철거하고 궁궐을 축소해 공원으로 둔갑시켜 1933년 일반에게 개방했다. 식민권력에 의해 덕수궁의 원형이 말살돼 그 장소성이 훼손된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덧씌워진 덕수궁의 장소성은 어떻게 전개됐는가. 1904년 러시아와 일본간에 전쟁 조짐이 일자 대한제국 정부는 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이 서울에 입성해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요했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할 권리의 시작이었다.

 

 

제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가 실시됐고,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으로 대한제국의 주권이 박탈당했다. 바로 이 비운의 조약이 체결된 곳이 덕수궁 重明殿이었고, 1907년 늑약의 부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한 장소도 이곳이다. 한일병합 후 중명전은 외국인에게 임대돼 경성구락부로 사용됐고, 해방 후에는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 여사의 소유였다가 개인에게 매각된 것을 정부가 구입해 사적 124호 덕수궁에 포함 지정됐다. 단독정부 수립과 UN한국임시위원회 결국 덕수궁은 대한제국 출범이후 격동적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을사늑약과 대한제국의 멸망이라는 가장 치명적 전환점을 찍었던 곳이 됐다. 이로 인해 1919년 1월 22일 고종의 죽음은 대한문 앞에서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독립만세를 외치는 3·1운동을 이끌어냈다.

해방후 한반도의 통일국가 건설과 남한단독정부 수립의 갈림길에서 석조전에서는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돼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신탁통치문제 논의였으나 양측의 입장만 그대로 확인한 자리였다. 이렇게 덕수궁은 역사 속에서 국난극복과 자주자강에 진력한 상징공간이면서, 동시에 열강에 의해 포섭되고 이용된 장소성의 공간이었다. 오늘날 덕수궁 공간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한국전쟁 직후 육군공병단이 석조전 일부를 수리했고, 덕수궁 사무소 설치 이후 사적 지정이 돼 개방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청춘남녀들이 들어와 사랑을 속삭이던 추억의 장소였다. 지금도 중화문 앞길이나 준명당과 즉조당 뒤뜰의 오솔길은 사색하기 좋은 곳이다. 대한문 앞에서는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매일 세 차례 열리고 있으며, 덕수궁미술관에서는 한국근대 미술전을 비롯한 기념전, 우리음악듣기, 명사초청강연 등 문화행사를 통해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 이제는 일제에 의해 훼손된 덕수궁의 장소성 회복을 통해 시민들에게 대한제국 멸망의 슬픔이 아닌, 도심속 일상의 편안함을 누리는 공간으로 거듭나야겠다.

 

 

변광석 부산대 HK전임연구원ㆍ역사학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주요 논문으로 「임진왜란이후 동래부사의 동래지역 인식과 기억사업」, 「한말~일제강점기 동래지역에서의 공간포섭과 지역세력의 대응」 등이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