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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신이란 무엇인가?
노무현 정신이란 무엇인가?
  •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 승인 2018.11.12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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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폴리스. 23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지난 지방선거 이후 조금 떨어졌다 해도 여전히 60퍼센트 가까이서 고공행진 중이다. 문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율은 참여정부 시절 혹독하리만큼 낮았던 노무현에 대한 지지율과 곧잘 오버랩된다. 인기 없는 대통령, 지지율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꼬리표는 참여정부 내내 노무현의 가장 아픈 지점이었다. 다른 비판에 대해서는 그 특유의 논리와 설득력으로 자신의 입장을 차근차근 변호하던 그도 낮은 지지율 앞에선 고개를 떨구고 말던 어느 대담 프로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렇게 어렵사리 대통령 임기를 마친 노무현은 서울에 남아 전임 대통령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경남 봉하의 촌로가 되기를 선택했고, 2008년 퇴임 후 언론에 간간이 보도되던 그의 모습은 참 행복해 보였다. 그러나 그에게 행복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2009년 벽두부터 수심 가득한 그의 모습이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 그러곤 곧 검찰 소환이 있었다. 검찰 소환 당일 상경 버스를 오르내릴 때 TV 화면에 잡히던 노무현의 얼굴, 내가 봤던 노무현의 얼굴 중 가장 슬펐던 그 얼굴을 나는 결코 잊지 못한다. 매스컴에서는 그를 힐난하거나 꾸짖는 보도가 연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러던 어느 날 비보가 전파를 탔다. 그해 봄이 끝나갈 무렵 그는 많은 지지자를 슬픔에 빠뜨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노무현이 한 명의 전임 대통령에 머물지 않고 한국 현대 정치사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소위 “친노”로 분류되는 정치인들이 대거 당선되고, 또 전통적인 지역 구도가 약화되면서 일부 호사가들은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무현 정신을 논하지 않고 노무현의 시대를 말할 수 있을까? 노무현의 시대를 말하기 전에 먼저 노무현 정신이 무엇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노무현 정신이란 무엇인가?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우리에게 다양한 정치적 가치를 표상한다. 지역구도 타파, 지방분권, 탈권위와 수평적 리더십,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 상식이 통하는 사회,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그들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정치적 가치들 하나하나 노무현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중한 유산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나는 노무현의 삶과 죽음은 그런 정치적 가치들보다 더 근본적인, 삶의 의미와 인간다움의 본성에 대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고 생각한다.  

인간 노무현 - 바보스러움이 인간다움이었던

대통령 노무현, 정치인 노무현, 변호사 노무현이 아니라, 인간 노무현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인간 노무현이 자신의 삶에 임하며 보여주었던 그 지극한 진지함과 치열함을 논하지 않고 노무현의 삶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노무현에게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안겨준, 삶의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의미롭게 만들기 위해 혼신을 다 바치는 그 진지함과 치열함, 나는 그것이 노무현의 삶을 관통하는 노무현 정신의 고갱이이자, 보수나 진보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다 떠나서 우리가 노무현이라는 한 사람의 삶과 죽음 앞에서 숙연해지는 이유라 믿는다.  

노무현은 인생의 중요한 국면마다 한사코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길, 남들이 다 가는 길, 평범하고 손쉬운 길을 거부했다. 부산에서 돈 잘 버는 세무변호사에서 돈과 거리가 먼 인권변호사로, 그리고 나중에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거듭날 때도, 1988년 13대 총선에서 당시 민정당 최고 실세 허삼수와 맞붙겠다고 부산 동구를 지역구 삼아 출마할 때도, 무명의 초선의원에 불과함에도 5공 청문회장에서 당대의 실세들에게 당당히 시대의 아픔에 대한 책임을 묻고 5.18 민주항쟁에 대해 변명으로 일관하던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질 때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을 따라 민주자유당에 가지 않을 때도, 영남 출신 정치인임에도 호남의 상징 김대중을 지지하고 그에 대한 신의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을 때도, 재선이 확실시되던 서울의 종로구를 두고 부산으로 내려가 지역주의에 맞서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겠다고 고집할 때도, 대통령이 된 이후 낮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무소불위의 조중동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을 때도 그는 남들 다 가는 탄탄대로를 버리고 고생이 뻔히 보이는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길로 자신을 떠밀었다. 그래서 그는 바보 노무현이 됐다.

생각해 보면 그의 죽음까지도 정말이지 바보스러웠다. MB 정부의 검찰이 노무현에게 제기하였던 혐의는 법률적 다툼의 여지가 충분히 있었고 또한 (전두환, 박근혜, 이명박이 검찰 조사를 전후해 그랬듯이) “정치탄압” 운운하며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한 번쯤 얘기해 볼 법도 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달랐다. 지지자들에게 노무현을 보호해 달라고 말하기는커녕 노무현을 버리라고 간청했고, 끝내 자기 자신마저 노무현을 버리는 선택을 하고 말았다. 바보 노무현은 그 죽음까지도 그렇게 바보스러웠다. 

한 인간의 인간다움이 어떻게 우주적 관점에선 티끌보다도 더 하찮은 것처럼 보이는 그 인간의 생물학적 생을 진실로 가치 있고 의미로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하여 성찰하는 철학자에게 바보 노무현의 삶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먼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자의 말을 한번 들어보시라. 인간도 결국 생물학적 개체인 이상, 배고프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고, 졸리면 잠잔다. 그런 점에선 인간이나 동물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통제되지 않은 욕구와 충동에 무반성적으로 반응하는 동물들과 달리 인간에겐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반성적으로 뒤돌아보고,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할지 숙고하여 나름의 자아상(self-conception)을 만들며, 그러한 자아상에 따라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설계하는 인간의 능동적 모습을 뜻한다.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에 따라 혼신의 노력과 성정을 바쳐 자신의 욕구와 충동을 제어하며 자신만의 인생을 구현하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이다. 

세무변호사로, 그것도 부산에서 알아주던 세무변호사로 오랫동안 일했던 노무현이 이해타산에 밝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게다. 노무현에게도 정치적으로 평탄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민자당에 가고 싶은 마음이, 편안히 국회의원 한번 더 할 수 있는 종로구에 머물고 싶은 유혹이, 조중동과 적당히 타협하며 무난한 정치자영업자로 살아가고픈 욕구가 왜 없었겠는가? 남들은 다 그렇게 살아가는 마당에 말이다. 그러나 노무현은 그러한 유혹과 욕구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했다. 노무현 자신이 주체적으로 설계한, 자신의 자아상을 능동적으로 실현하는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욕구와 충동에 그저 맹목적으로 반응하는 방종체(wantons)가 아닌, 스스로 입법한 “원칙과 소신”에 따라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설계하고 긍정하며 실천하는 인격체(persons)라는 사실을 그의 삶을 통해 증명하였다. 노무현의 바보스러움이란 그의 인간다움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민자당에 가기 싫지만, 영남 정치인으로 살아남으려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조중동이 싫지만 조중동 중심의 언론 환경에서 정치인으로 살아남으려면 다른 방도가 없었다고. 다른 방도가 없다는 말은 자신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에게 명백히 주어져 있던 자유의 존재를 기만적으로 부정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가 맹렬히 비판했던 자기기만(mauvaise foi)의 사례이다. 

김영삼을 따라 3당 합당에 합류하기를 거부한 노무현은 고생이 뻔히 보이는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을까?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시던 부산에서 “김대중”을 외치며 다시 선거에 임하던 노무현에게도 가끔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픈 때가 있지 않았을까? 2002년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당시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던 조선과 동아를 대놓고 비판하던 노무현의 마음 한편은 얼마나 불안하고 위태로웠을까? 

사진 출처=노무현재단 홈페이지

그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특히 그 길이 눈앞의 이익에 반할 땐, 늘 두렵고 위태롭다. 때문에 그런 길을 가는 이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고, 그 과정에 형성된 자아상을 한없는 진지함으로 긍정하고 또 확신해야 한다. 원칙과 소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노무현이 왜 “원칙과 소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 납득이 가는 대목이다.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삶은 불편하다. 자신이 천명한 원칙과 소신에 어긋난 선택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 돼 버리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인에게 지역감정에 기댄 정치, 조중동에 아부하는 정치는 상황에 따라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살아있는 옵션이었지만 노무현에게 그런 정치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 정치에 몸담는 것은 노무현 자신의 원칙과 소신에 반하는 자기부정이자 자기배신이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 정치인에게 원칙과 소신이란 가장 이로운 선택을 함에 있어 방해만 되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예속이나 속박에 불과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정치인은 사고가 유연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분명 원칙과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과업이 아니다. 그러나 그 원칙과 소신의 원천이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 예속과 속박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에 의해 부과됐다는 점에서, 원칙과 소신을 지키는 삶은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삶이다. 자신 안의 무수한 유혹을 이겨내고 원칙과 소신에 따라 어떤 작은 일이라도 성취를 해 본 사람은 안다. 그런 성취를 통해 내가 내 삶의 능동적 주인공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변덕스러운 욕구나 충동에 내맡겨진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이유로 원칙과 소신을 지킬 때 우리는 타율적 존재가 아닌 자율적 존재로, 억압된 존재가 아닌 해방된 존재로 거듭난다. 배고플 때 밥 먹고 졸릴 때 잠자는 것처럼 단순히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것은 진정한 자율,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다. 내가 스스로 입법한 원칙과 소신이 바로 나 자신의 일부임을 진심을 다해(wholeheartedly) 긍정하고 지극한 진지함과 치열함으로 그 원칙과 소신을 실천할 때, 그렇게 나의 자아상이 내 삶 속에서 온전히 실현될 때, 그때 나는 진정 자율적이고 해방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은, 특히 그 길이 눈앞의 이익에 반할 땐, 늘 두렵고 위태롭다. 때문에 그런 길을 가는 이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고, 그 과정에 형성된 자아상을 한없는 진지함으로 긍정하고 또 확신해야 한다.  사진 출처=노무현재단 홈페이지

죽음에 임하는 노무현

사람들은 스스로 죽음을 택한 노무현의 마지막이 불행했다고 말한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살 직전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고 그것이 그를 자살로 이끈 원인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말에 전혀 동의할 수가 없다. “내 인생의 실패는 노무현의 것일 뿐, 다른 누구의 실패도 아니다. 진보의 실패는 더더욱 아니다. 내 인생의 좌절도 노무현의 것이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민주주의의 좌절이 되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의 자서전 『운명이다』의 일부이다. 노무현의 자아상에서 민주주의와 진보라는 가치는 인간 노무현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특성, 그야말로 인간 노무현의 본질이었기에 설혹 대통령 노무현의 실패, 정치인 노무현의 실패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민주주의와 진보의 실패를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건 인간 노무현을 부정하는 자기부정이자 자기배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 노무현을 지키기 위해 그는 끝내 생물학적 노무현의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생물학적 노무현이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 노무현이 표상하는 민주주의와 진보라는 가치에 짐이 되고 걸림돌이 된다는 고통스러운 자각 때문이었다. 이렇게 생물학적 노무현은 죽음을 맞이하였지만, 그 죽음을 통해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간 노무현을 긍정하고 실천할 수 있었다. 

분명 노무현의 죽음은 슬프고 가슴 아팠다. 그러나 그는 검찰 수사에서 오는 수치심, 좌절, 우울과 같은 통제되지 않는 감정과 충동에 굴복하여 자살을 선택한, 자신의 삶에 대한 수동적 방종체가 아니었다. 만약 그런 수동적 방종체의 이미지가 많은 이들이 공유하는 노무현의 이미지라면 나는 그에 반대한다. 노무현은 생의 마지막까지 자신의 자아상을 삶 속에서 능동적으로 실현하고자 노력한 원칙과 소신의 열혈남아였기 때문이다. 그게 노무현다운 모습이고 그게 노무현 정신의 핵심이다. 삶에 대한 온전한 주인공이 되어 의미로운 삶을 성취하고자 했던 노무현의 죽음이 결코 불행하지 않았다고 내가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날 새벽 봉화산을 향하던 노무현의 발걸음은 결국에는 산 아래로 다시 굴러 내려올 돌을 밀어 올리는 시시프스(Sisyphus)의 무의미한 발걸음과는 달랐다. 노무현의 발걸음 하나하나엔 그가 자신의 삶에 임하는 지극한 진지함과 치열함이 담겨 있었고, 그렇기에 그의 발걸음은 진정으로 자율적이고 해방된 한 인간의 발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좌절과 우울 속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자신을 방임하는 노무현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주인공이고자 혼신을 다한 노무현을,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원칙과 소신을 지키고자 전력했던 노무현을, 그런 비장함으로, 간절함으로 봉화산을 향하는 노무현을 상상해야 한다. 

해가 바뀌면 노무현이 우리 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회만 되면 고인의 죽음을 능멸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자유한국당”이라는 당명에서 “자유”는 어떤 뜻일까? 아마도 그것은 내가 지난 교수신문 기고문에서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의 자유 개념이라 부른, 개나 돼지와 같은 방종체들의 자유일 것이다. 허기진 돼지가 아무런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이 자신의 식욕에 그저 무반성적으로 반응할 때의 자유이다. 자신들의 삶에 대한 아무런 반성이나 성찰 없이 무절제한 탐욕과 이기를 마음껏 추구할 때의 자유이다. 그래서 그들에겐 부끄러움이나 염치란 것이 없다. “부끄러운 줄 알라”고 노무현이 그렇게 호통을 쳤건만. 그런 그들 눈에서 인간 노무현의 그 지극한 진지함이, 그 지극한 인간다움이 불가사의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빨리 인간들의 세상에서 사라지길 바랄 뿐이다.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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