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빠’와 ‘박사모’의 결정적 차이
‘문빠’와 ‘박사모’의 결정적 차이
  •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 승인 2018.01.0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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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호-김명석의 필로폴리스_ 7.문빠에 대한 철학적 변론 IV

많은 이들이 ‘문빠’(열성 문재인 지지자)가 문재인에 대한 정당한 비판도 무시하고 그를 맹종할 뿐이라고 우려한다. 그러면서 문빠가 박근혜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박사모와 다를 게 뭐냐고 따져 묻는다. 결국 문빠나 박사모나 정치적 훌리건이기는 마찬가지 아니냐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우려가 문빠와 박사모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간과한 데서 비롯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문빠를 문재인 정부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더 잘 실현할 것이라는 신념에 근거해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문재인 정부를 돌보고 보살피며 그에 전략적 지지를 보내는 정치참여형 시민이라 규정한 바 있다. 문빠가 박사모와 다를 게 없다는 지적이 온당한지를 따지기 위해선 이 규정에서 ‘전략적 지지’가 무엇인지가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 이와 관련 토마스 쿤(Thomas Kuhn)의 철학은 훌륭한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의 철학에서 정상과학 시기 과학자들을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그 정상과학의 지배적 패러다임에 전략적 지지를 보내는 이들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배적 패러다임에 보내는 지지는 문빠가 문재인 정부에 보내는 지지와 흡사하고, 이는 전자에 대한 연구성과를 참고하며 후자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발전적 연구 프로그램과 퇴행적 연구 프로그램

쿤에 따르면 정상과학 시기 과학자들은 그들이 공유하는 과학적 가치, 방법론, 세계관 등의 총합으로 이해된 패러다임을 확장하고 정교화하는 작업에 매진한다. 그런데 쿤은 패러다임이 그런 정상과학적 활동에서 단순히 피동적 연구대상에 머물지 않고 그 활동을 능동적으로 통제하고 지배한다고 강조한다. 정상과학에서 패러다임은 과학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절차를 통하여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에 도달해야 할지, 과학자사회에 의해 수용가능한 해결책이 무엇인지 등을 배타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쿤의 통찰은 그가 정상과학 시기 과학자들의 활동을 수수께끼 풀이(puzzle-solving)에 비유하는 대목에서 한층 구체화된다. 당신이 직소퍼즐을 푼다고 가정해 보라. 퍼즐을 풀기 전 당신은 그 퍼즐을 푼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 바로 그림조각들을 맞추어 하나의 큰 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또한 당신은(‘그림 조각에 변형을 가하지 말아야 한다’와 같은) 특정한 규칙을 따라 퍼즐을 풀어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쿤은 정상과학 시기 과학 활동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강조하며, 정상과학의 활동을 패러다임이 제시한 퍼즐을 패러다임이 제시한 규칙에 따라 풀어내는 것을 목표로 수행하는 일련의 과학 활동으로 규정한다. 뉴턴 이론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이던 그 초기 지지자들은 뉴턴 이론에 기초하여 수성의 궤적에 대한 연구에 매진했는데, 그것은 뉴턴의 패러다임 하에서 이루어진 정상과학적 활동이었다. 물론 이러한 정상과학적 활동에서 늘 성공이 보장되진 않는다. 수수께끼 풀이에 실패할 수 있단 말이다. 그러나 그 경우 과학자들은 지배적 패러다임을 곧장 포기하지 않는다고 쿤은 역설한다. 뉴턴 이론이 수용된 이후 오래 동안 물리학자들은 수성의 근일점이 이동한다는 사실을 설명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뉴턴 이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상과학 시기 과학자들은 지배적 패러다임의 불완전성과 결함을 용인하고, 지배적 패러다임의 부분적 실패로부터 곧장 그것을 폐기하는 선택을 하진 않는다. 과학이론의 예측이 실패할 경우엔 언제나 그 과학이론이 반증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칼 포퍼(Karl Popper)의 과학관이 현실과 맞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설혹 패러다임에 부분적 실패가 발생하더라도 정상과학자들은 그것을 용인하고 패러다임에 대한 지지를 쉽게 철회하지 않지만, 그러한 실패가 과학자들이 패러다임의 핵심이라고 여기는 부분에서 누적되면 패러다임에 대한 과학자들의 지지가 흔들리기 시작한다고 쿤은 말한다. 이와 관련해선 포퍼의 철학적 통찰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쿤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임레 라카토스(Imre Lakatos)의 말을 따라가 보자. 포퍼의 과학관에서 수성의 근일점이 이동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뉴턴 이론을 고수한 그 초기 지지자들은 나쁜 과학자라 할 만하다. 마찬가지로 포퍼의 과학관은 물질이 연소할 때 질량이 감소한다는 예측을 내놓은 플로지스톤 이론이 연소 과정에서 금속의 질량이 오히려 증가한다는 명백한 반박사례에 직면했음에도 불구하고 플로지스톤 이론을 끝까지 고수한 조셉 프리스틀리 역시 나쁜 과학자로 분류한다. 뉴턴 이론의 초기 지지자나 프리스틀리 모두 반박사례에 직면해서도 자신의 이론(뉴턴 이론과 플로지스톤 이론)을 고수했고, 때문에 포퍼의 과학관에서 그들의 선택은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쿤의 영향을 받은 라카토스는 이러한 포퍼의 과학관에 반대하며 뉴턴 이론의 사례와 플로지스톤 이론의 사례는 서로 구분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라카토스는 수성의 궤도가 뉴턴 이론의 예측치와 다름에도 불구하고 뉴턴 이론을 포기하지 않은 그 초기 지지자들은 합리적이었다고 보는데, 그 근거로 뉴턴 이론이 부분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과학이론으로 성장할 희망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제시한다. 라카토스 자신의 표현을 사용하면, 당시 뉴턴 이론은 ‘발전적(progressive) 연구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한편 라카토스는 연소 과정에서 금속의 질량이 감소하기보다는 오히려 증가한다는 관찰과 같은 결정적 반박 사례에 직면했던 플로지스톤 이론을 고수한 프리스틀리의 선택은 불합리한 것이라 판단한다. 연소 현상에 대하여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이 플로지스톤 이론에 비하여 우월한 설명을 제시한다는 것이 명백했을 뿐만 아니라 플로지스톤 이론이 라부아지에의 산소 이론에 필적할 성공적인 이론으로 성장할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퇴행적(degenerative) 연구 프로그램’이었다.

이러한 쿤과 라카토스의 철학은 일인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무엇인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이에게 있어서 합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학 활동의 맥락에서, 답변을 시도한 경우라 하겠다. 대상 X와 객관성의 거리를 유지하는 무심한 삼인칭적 방관자가 아니라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의 관점에서 X를 돌보고 보살피는 행위에 적용될 수 있는 합리성 말이다. 나의 연인에게 작은 문제가 발견됐다는 이유로 그에 대한 사랑을 접는다면 나는 합리적이라 보기 힘들다. 그에게 그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면, 혹은 그런 문제들보다 더 나은 장점이 있다면 그와의 사랑을 지속하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나 나의 연인이 매번 나를 속이고 나 몰래 다른 이와 외도를 하고 심지어 나를 폭행하는 상황에서도 내가 그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한다면 분명 나는 정상인이 아니다.

쿤과 라카토스의 철학은 이러한 우리의 상식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정상과학자는 지배적 패러다임의 부분적 결함이나 오류가 발견된다고 곧장 그것을 폐기하지 않는다. 이는 연인들이 서로의 불완전성과 결점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한편, 패러다임의 핵심적인 부분에서 치명적인 실수나 오류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면 그 패러다임은 발전적 연구 프로그램에서 퇴행적 연구프로그램으로 전이되고, 과학자들은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다. 이는 연인에게 도저히 개선될 희망이 없는 문제가 있고 그로 인해 그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될 땐 사랑의 마음을 두말 없이 접는 것이 최선이라는 우리의 상식과 궤를 같이한다. 

공정, 법치, 정의, 민주주의라는 가치

나는 문재인 정부의 활동을 기본적으로 공정, 법치, 정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로 대표되는 “문재인표 패러다임”을 우리 사회 곳곳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마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제시한 퍼즐을 그 패러다임이 정한 규칙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정상과학자의 주요 과업이듯, 문재인표 패러다임이 제시한 국가적 퍼즐을 그 패러다임이 정한 규칙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현 정부의 주요 과업이라는 뜻이다. 현 정부 초기 신고리 원전 건설을 지속할지 여부를 공론 조사를 통해 큰 혼란 없이 결정한 것은 그런 퍼즐을 성공적으로 해결한 사례라 하겠다.

그런데, 정상과학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재인 정부가 그런 과업을 실행함에 있어 실패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 정부 초기 박기영, 이유정, 박성진 등을 주요 요직에 발탁하려 한 시도는 현 정부가 문재인표 패러다임이 제시한 퍼즐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대표적 사례들이다. 그런 경우 문재인 정부의 실패를 실패로 깨끗이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재인 정부가 무오류·무결점의 신적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 문재인 정부가 문재인표 패러다임이 제시한 퍼즐을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실패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는 전략적 지지자라기 보다는 맹목적 지지자에 가깝기 때문이다(물론, 문빠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문재인표 패러다임을 돌보고 보살피는 이들인 만큼, 그런 실패에 대하여 얼마나 공세적인 비판을 제기할지는 정세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다; 한편, 이런 비판은 문재인표 패러다임을 수용하지 않는 이들에 의해 제기되는 비판, 가령 보수야당과 보수언론이 제기하는 종류의 비판(법인세 인상 비판, 댓글 공작 검찰 수사 비판 등)과는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 문재인에 대한 전략적 지지자가 그러한 비판에 동조할 하등의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전략적 지지자들은 문재인표 패러다임이 그것이 추구하는 가치를 성공적으로 실현할 희망이 남아 있는 한 그것의 부분적 실패를 이유로 곧장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다. 문재인 정부가 무오류·무결점의 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전폭적 지지를 보내는 것, 그것이 (맹목적 지지와 구분되는) 전략적 지지의 골자라는 말이다. 하지만 문재인표 패러다임의 핵심이라 여겨지는 부분에서 현정부의 실패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문재인에 대한 전략적 지지자들은 문재인 정부 하에서 공정, 법치, 정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를 실현할 희망을 잃게 되고, 문재인표 패러다임은 발전적 프로그램에서 퇴행적 프로그램으로 전이하게 된다. 그때 그들은 문재인 정부로부터 자신들의 지지를 철회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실제 나는 그 경우, 가령, 현정부가 박근혜 정부와 비슷한 행태를 보일 경우 가장 먼저 문재인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이들은 다름 아닌 지금 ‘문빠’라 불리는 이들일 것이라 추측한다.

이 대목에서 문빠와 박사모의 차이는 자명해진다. 나는 박사모를 박근혜에 대한 맹목적 무조건적 지지자로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 번 양보 해서 박사모를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박근혜표 패러다임”에 대한 전략적 지지자로 간주해 보기로 하자. 그럼 “박근혜표 패러다임”란 도대체 무엇인가? 2013년 출범 당시 박근혜 정부는 “경제 민주화”, “창조 경제” 등을 주요 공약의 키워드로 제시했다. 따라서 그런 가치들을 박근혜표 패러다임의 핵심 요소라 볼 수 있겠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블랙리스트 사건 등 박근혜 정부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부정부패와 국기문란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 박근혜 혹은 그로 대표되는 정치세력이 박근혜표 패러다임이 추구하는 가치를 성공적으로 실현할 것이란 희망을 여전히 가져야 할까? 가당치 않다. 박근혜표 패러다임은 그 핵심적인 부분에서 사망선고를 받았고, 이는 그것이 지극히 퇴행적 프로그램이 됐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박사모가 박근혜표 패러다임을 계속해서 지지한다면 그건 불합리한 무지와 몽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연인의 반복되는 배신, 부정, 폭행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감정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한 이의 무지와 몽매에 다름 아니다.

나는 지난 글에서 민주주의를 위하여 우리가 진정 필요로 하는 합리성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관점에서 민주주의적 가치를 돌보고 보살피는 이의 합리성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합리성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한층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지만 지면 관계상 그러한 합리성 개념이 쿤과 라카토스의 철학을 통해서 가장 잘 포착된다는 점만을 지적하자(그런 합리성 개념의 필요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원하는 독자를 위해 글 말미에 참고문헌을 덧붙였다). 따라서 문빠를 문재인 정부에 대한 전략적 지지자로 규정할 수 있는 한 그들은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합리성의 기준에서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비록 그들이 삼인칭적, 객관적, 관찰자적 합리성의 기준, 즉 인지심리학 연구에서 측정되는 종류의 합리성 기준에서 합리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상의 논의에 비춰, 민주 시민을 호빗, 벌컨, 훌리건으로 분류한 제이슨 브래넌의 이론은 명백한 오류이다. 벌컨은 존재하지도 않고 훌리건은 합리적인 전략적 지지자, 비합리적인 전략적 지지자, 맹목적이고 무조건적 지지자 등으로 더 세분될 필요가 있다. 이에 브래넌의 분류법은 폐기되어야 한다. 나는 민주 시민을 호빗, 비이성적 훌리건, 캐어러(carer)로 분류할 것을 제안한다. 새롭게 도입된 케어러(Carer), 우리말로 돌보미는 합리적인 전략적 지지자에 대응하는 반면 비이성적 훌리건은 그들을 제외한 비합리적인 전략적 지지자, 맹목적 지지자, 광신도적 지지자 등에 대응한다. 돌보미와 비이성적 훌리건은 모두 어떤 정치인에 대하여 일인칭적, 주관적, 행위자적 관점을 취한다는 공통점을 지니지만 전자는 합리적인데 반해 후자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다. 이때 나의 주장은 민주적 가치에 대한 돌보미가 진정 우리가 추구해야 할 민주적 시민상이고, 현실 정치에서 문빠가 그에 가장 근접한다는 것이다. 비이성적 훌리건인 박사모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이는 왜 문빠와 박사모를 삼인칭적, 객관적, 관찰자적 합리성을 공히 지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브래넌이 정의한 바의 훌리건이라는 범주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동급으로 취급하고 동급으로 폄하하는 것이 옳지 않는지를 잘 보여준다.

일인칭적, 주관적, 실천가적 합리성에 대한 참고 문헌: C. Herfeld & K. Schaubroeck. 2014, 『The Importance of Commitment for Morality: How Harry Frankfurt’s Concept of Care Contributes to Rational Choice Theory』, in B. Musschenga and A. van Harskamp (eds.), What Makes Us Moral?: On the Capacities and Conditions for Being Moral. Dordrecht: Springer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최성호 교수는 서울대에서 과학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과학문화연구센터 수도권 전임 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과 전임강사, 호주 시드니대 시간연구소 연구원, 캐나다 퀸스대 철학과 조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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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8-10-15 17:15:28
문빠와 박사모의 차이는 박사모는 못 배우고 더 개고생한 끝에 베이비붐 일으킨 천벌을 받는 반면, 문빠는 느그 조팔육한테 세뇌되어 늙은이 수준의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지.

김민성 2018-01-24 11:10:11
박근혜 만세~!
근래에 박근혜님을 구속하려는 일당이 많습니다.
혜택에 홀린 어린양들.... 좆불들을 홀린
개새끼들을 하루빨리 족쳐야 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야하지만
끼리끼리 논다더니 우리같은 지성인을 배제하는군요.

구혜리 2018-01-15 22:23:55
좋은 글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