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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된 위력 공간을 간과한 안희정 판결의 부당성
왜곡된 위력 공간을 간과한 안희정 판결의 부당성
  • 정대현 이화여대·철학과 명예교수
  • 승인 2018.10.08 10:59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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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폴리스 21. 최성호 경희대 교수의 주장에 대한 반론

안희정 1심 무죄 판결에 대한 찬반 논의가 뜨겁다. 무죄판결을 지지하는 최성호 경희대 교수의 강화 논변(<교수신문> 934호)이 있었고 이현재 교수가 부당하다는 반론을 제기(<교수신문> 936호)했고, 이에 대한 최 교수의 해명(<교수신문> 937호)이 주어졌다. 나는 무죄판결의 부당성을 이 교수와는 다른 입장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판결문과 최 교수의 강화 논변이 보이는 정당성 구조를 살펴본 후 판결문과 강화 논변의 미흡함을 위계공간과 칸트적 오류의 논리를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무죄 판결의 정당성 논리

무죄판결의 정당성이 어떻게 구성됐는지를 주목해 보자. 재판부는 안희정의 김지은에 대한 간음 및 성추행에 대한 피의사실들에 무죄를 판결하면서 놀랍게도 10건 모두에 대해 비슷하거나 동일한 논리를 근거로 했다. 그 무죄 판결의 정당성 논리는 다음과 같이 세 개의 전제로부터 무죄 결론으로 가는 구조로 요약 된다: (P1) 안희정은 김지은에 대한 임명권을 갖는 직속상사로서의 위력을 소유 한다; (P2) 그러나 안희정은 그러한 위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P3)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관한 각종 증언과 기록은 안희정이 김지은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 (C) 고로 안희정은 무죄이다. 이중 첫째 전제 (P1)은 결론을 향한 필요한 조건이 아니라 보조적 조건으로 볼 수 있다. 재판부는 위의 세 전제들에 대한 근거나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재판부의 판결문은 전제 (P1) 즉 안희정의 김지은에 대한 위력의 근거로 안희정은 당시 현직 충청남도 도지사이고 더불어민주당의 강력한 대통령 후보이고 김지은은 대통령 경선 후보의 수행비서이자 계약직 공무원이었다(18쪽)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전제 (P2) 즉 위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안희정이 김지은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거나 위력의 존재감이나 그 지위를 남용했다고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27쪽). 재판부는 안희정이 위력을 행사해 간음에 이르렀다는 공소사실에 대해 김지은의 진술을 수용하기 어렵다(51쪽, 61쪽, 77쪽)고 하고, 위력을 행사해 김지은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했다고 볼 수 없다(66쪽)고 결정한다. 재판부는 셋째 전제인 (P3) 즉 <김지은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지만 그 후의 김지은의 행태가 피해자다웠는가에 대한 정황은 안희정이 김지은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자로서의 일반적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빈번”(77쪽)했다고 해, “피해자로서의 일반적 반응”이라는 행동유형을 일반화하고 논의를 이에 의존시킨다. 안희정이 자기를 흠모하는 김지은의 심리상태에 편승했다 하더라도 이는 상호적인 것으로 볼 여지가 없지 않고, 이를 두고 위력에 의한 간음, 추행에서의 위력을 행사한 것으로 단정 짓기도 어려워 보인다고 판단했다(97쪽).

안희정의 무죄 판결을 위한 재판부의 논리는 세 개의 전제 (P1), (P2), (P3)로 요약되지만, 최 교수는 재판부의 논리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소인 <피해자다움>의 구조를 분석해 재판부 판결의 개념적 구조를 보완하고자 했다. 그는 김지은의 사후 행태가 피해자답지 않다는 재판부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다면, 의지의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개념에 따라, 안희정은 김지은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한 최 교수 논변의 바탕이 되는 의지의 자기 근원성으로서의 자유란 무엇인가?

의지의 자기근원성   

최 교수는 재판부의 <피해자다움의 부재> 논변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를 자신의 자유 논변으로 대치한다. 그는 “재판부가 이 지점에서 새로운 자유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그 빈자리를 채워, 안희정 무죄판결의 논변을 강화한다. 행위에 대한 전통적인 자유 개념은 <달리 행동할 수 있음>이지만, 최 교수가 제시하는 새로운 자유개념은 <행위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행할 수 있음>이라는 자기근원성의 자유이다. 최 교수는 자기근원성의 자유를 다음과 같은 사유실험을 구성해 보이고 있다: “외과 의사인 철수가 고정의자에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때 한 명의 응급 환자가 제때 철수의 수술을 받지 못해 사망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많은 이들이 철수는 응급 환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없고, 그것은 철수에게 신체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제 한 가지를 더 가정해 보자. 평소 수술을 귀찮게 여기던 철수는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철수는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설사 포승줄이 없었다 하더라도 의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최 교수는 <철수 사유실험>을 통해 하나의 선택지를 제시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의사에 따른 것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에 대해 어떤 자유 개념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달리 행동할 수 있음>으로 이해하는 전통적 자유론자는 철수가 고정의자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철수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의사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고 할 것이지만, <행위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행할 수 있음> 이라는 자기근원성의 자유론을 선택하는 경우 “그때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 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철수 사유실험>을 김지은에게 적용한다. 재판부가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것은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원했거나 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성관계는 김지은의 <자유로운 의사>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추리하는 것이 힘을 얻는다. 김지은이 여러 가지 정황에서 “의지 자기근원성”을 유지하면서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원했거나 피하지 않은 심리상태 하에 있었다면, 그렇다면 김지은은 자유의사에 따라 안희정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법적·도덕적 맥락에서 적합한 자유 개념을 채택할 때 김지은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다는 것을 뜻하고 안희정은 김지은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함축한다. 안희정의 성폭행 혐의에 대한 재판부의 무죄 판결이 힘을 얻는 대목이다. 최 교수는 재판부의 <피해자다움의 부재> 논변을 <자기근원성 자유> 논변으로 전환하여 안희정 무죄 판결의 논변을 새롭게 하고 있다.

안희정 무죄 판결의 부당성 논변

안희정의 무죄 판결에 대한 재판부의 정당성 논변들은 성공하고 있는가? 최 교수의 자유논변은 만족스러운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재판부의 <위력행사 부재> 논변과 <피해자다움의 부재> 논변은 그 자체로 설득력이 없다. 그리고 최 교수는 재판부의 두 논변을 모두 수용하지 않으면서도 비판이나 부정적 언급을 삼가면서 재판부의 무죄 결론을 지지할 수 있는 <자기근원성의 자유> 논변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이 논변이라면 매우 옹색한 논변이다. 이들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위력의 공간    

안희정 무죄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안희정은 위력을 가졌지만 위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라는 논리 구조를 그 정당성의 핵심중 하나로 취하고 있다. 재판부는 판결문의 어디에도 <위력과 위력 행사>의 개념을 구분해 규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구분을 자명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 최 교수가 “위력의 존재 자체가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거부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릴 수 있다”고 쓰면서, 이 구분을 <무시> 또는 <부인>하는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위력과 위력 행사의 구분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는 것은 위력의 공간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위력 공간들은 사물적인 인과관계의 공간일 수도 있고 언어적인 의미의 공간일 수도 있다. 흔한 오류는 이러한 두 공간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함으로써 비롯된다. 예를 들어, 건물 공사장 공간, 생명 신체 공간은 사물적 인과관계의 공간이지만, 군대의 위계 공간이나 야구게임에서 팀들의 위계 공간은 언어적 규칙이 지배하는 의미 공간이다. 물론 두 공간의 혼동은 이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화이트헤드가 지적한대로 <공간의 어떤 지점도 그 공간의 다른 지점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공간의 총체성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고, 이 지점에서 모든 공간들을 동일한 구조에서 파악하고자 하는 유혹이 발생한다. 그러나 사물적 공간은 인과관계로 연결되는 총체성을 갖지만, 사건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분리돼 있어야만 인과관계의 법칙 하에 들어가기 때문에 경험적인 종합판단의 대상이 된다. 한편 의미적 공간은 인과관계가 아니라 언어 규칙적인 총체성을 갖기 때문에 선험적인 분석판단의 대상이 된다.           

의미적 위력 공간에서 위력과 위력 행사의 구분은 불필요하거나 유해하다. 왜 그러한가를 분석해 보자. 의미적 위력 공간은 언제나 특정한 인간 조직이나 공동체를 전제한다. 군대나 학교 같은 공적 공간만이 아니라 사랑이나 미움의 관계가 있는 사적 공간도 위력 공간이 된다. 사람들 간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의미적 위력 공간들이 같은 방식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많은 인간 조직이 그 조직의 고유한 업무에만 관심을 갖고 접근될 때에는 조직 기능의 질서를 유지하는 위력, 즉 순기능적 위력을 갖는다. 그러나 어떤 인간 조직에서도 경우에 따라 또는 어떤 계기에는 조직의 업무적 기능이외의 요인들이 들어 올 수 있다. 조직의 어떤 구성원은 업무 외적 관심 때문에 역기능 또는 반기능적 위력을 도입 한다. 비밀 누설적 첩보, 재산탐욕, 승진 욕심, 다른 목적을 위한 환심, 성적 관심 같은 업무 외적 태도가 그러하다. 위력 공간에 조직의 업무 외적 요소가 개입될 때 위력 공간은 왜곡될 뿐만 아니라 공간 자체가 왜곡 공간이 되고 만다. 

왜곡적 위력 공간의 경우를 음욕 개념으로 예시할 수 있을 것이다. 국어사전은 “음욕”을 <음란하고 방탕한 욕심>으로 풀이하고 있다. 음욕은 성욕과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들 간에 서로에 대해 성욕을 가질 수 있지만 음욕을 가질 수는 없다. 음욕은 마땅하지 않은, 서로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이 일방적인 성욕을 품는 것이다. 방탕한 성욕이다.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음욕이 비위력 공간과 위력 공간 중 어디에서 발생하는가에 따라 음욕의 행태가 달라진다는 점이다. 비위력 공간에서의 음욕은 그 심리적 상태와 그 상태의 발현 행위가 구분된다. 모든 음욕이 상대방을 대상화하고 사물화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않지만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경우, 음욕의 소유만으로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그러나 위력 공간에서의 음욕은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사정이 다르다. 첫째, 대개의 경우 선임자가 후임자를 향하여 음욕을 품는 것은 그 조직의 순기능을 왜곡시키는 반기능적 동기를 도입하는 것이다. 이것은 조직을 훼손하는 것이다. 둘째, 위력의 공간 안에서 선임자가 후임자를 향하여 음욕을 품는 것은 위력의 공간 구조 때문에 음욕 자체만으로 위력 행사가 된다. 최 교수의 “위력의 존재 자체가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거부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릴 수 있다”라는 통찰은 정당한 것이다. 비위력 공간에서의 음욕은 심리적 상태와 그 상태의 발현 행위가 구분되지만, 위력 공간에서의 음욕은 그러한 구분이 위력의 개입으로 무화되는 것이다. 선임자가 후임자를 향하여 아직 신체적 행위에 돌입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렇게 접근하고자 하는 마음의 선임자는 억압하는 주체이고, 이때의 후임자는 그러한 접근의 마음을 몰랐다 할지라도 억압받는 객체가 된다.

안희정 무죄 판결의 재판부는 위력과 위력행사의 구분에 그 판결의 정당성을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논의한 바를 따르자면, 그 구분은 물리적 위력 공간에서는 유지될 수 있지만 의미적 위력 공간에서는 허용되기 어렵다. 또한 의미적 위력 공간에서도 조직의 순기능적 행사나 반기능적 행사의 경우들은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취적 기능과 왜곡적 기능의 차이가 명시되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음욕 같은 반기능적 행사가 개입되는 경우 제도가 훼손될 뿐 아니라 음욕 자체가 음욕 행사가 되는 것이다. 안희정은 러시아 호텔에서 김지은에게 “자신의 방으로 맥주를 가져오도록 지시”(32쪽)하였다. 이러한 지시는 일반적으로 도지사와 수행비서 간에 순기능적인 업무의 부분일 수 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이 특별한 지시는 맥주를 가져온 김지은을 “갑자기 껴안았”(32쪽)다는 사실에 의해 순기능적인 업무가 아니라 반기능적 업무 행사이다. 안희정은 그 지시를 했을 때 음욕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안희정이 음욕을 품고 그 지시를 한 후 간음까지의 모든 하위 사건들의 연쇄는 왜곡된 위력 공간의 여러 사항들을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단일 사건의 그림을 나타낸다. 

칸트적 오류   

무죄 판결의 재판부는 '위력'과 '위력의 행사'의 구분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와 달리 힘들여 구성한 논변은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의 결여> 논변이다. 재판부는 이 논변으로 김지은의 진술이 신빙성이 없다고 판결한 것이다. 최 교수는 재판부가 <피해자다움>에 대해 “사려 깊게 판단”하기를 기대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개념적 명료화를 시도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그는 <피해자다움의 결여> 논변을 대치할 수 있는 “새로운 자유 개념”을 제안해 안희정 무죄 판결의 구조화를 증진시킨다. 

최 교수는 앞에서 본 <철수 사유실험>을 통해 “새로운 자유 개념”을 개진했다. 그의 자유개념 도출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철수의 국면들을 구분하기로 하자. 철수1은 고정의자에 포승줄로 꽁꽁 묶인 상황의 철수이고, 철수2는 철수1에 고정의자에 앉아 있는 걸 좋아하고 묶여 있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는 속성이 추가된 철수이고, 철수3은 철수2에 포승줄이 없었다 하더라도 의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 철수이다. <철수 사유 실험>은 그 자체로 정합적이다. 데카르트의 코기토 사유실험이 논리적 진리도 의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의심도 수용할 수 있는 해석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철수 사유실험의 배경적 장치가 반직관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사유실험의 정합성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전통적 자유론이 “달리 행동할 수 있음”에 기초하는 것이어서 사유실험의 철수는 자유가 없었다고 해야 하지만, 최 교수는 사유실험의 철수가 “비록 포승줄에 묶여 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행위, 즉 의자에 앉아 있는 행위를 수행하였다”고 해 철수의 행위는 철수 자신에 의해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자유롭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김지은에게서도 이러한 철수 사유실험과 같은 “동일한 상황이 성립”한다고 믿고, 이 논리를 김지은에게 적용해, 김지은도 자기 의사에 의해 안희정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최 교수가 사유실험을 통해 도입하는 자유의 자기근원성은 자유의 정당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 조건은 자유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여기에서의 혼동을 ‘칸트적 오류’라 할 수 있다. 칸트가 <나의 도덕적 의지>, <내적 강요로서의 자율>을 자유의 조건으로 제안했을 때, 칸트적 자기근원성의 자유 조건을 만족할 수 있는 계급은 <상층부의 백인 남자>에 제한된다는 비판의 정당성은 여기에 근거한다. 그 계급의 사람들은 대부분 넓은 외적 상태에 의해 억제를 받지 않는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들은 대부분 넓은 외적 상태로부터 억제를 받기 때문에 <나의 도덕적 의지>를 행사할 수도 없고 따라서 칸트적 자유를 누릴 수 없다. <하층부의 유색인 여자>는 그 주변에 간섭하거나 방해하는 사람이 없어야 칸트적 도덕성 의지를 발동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여자가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 섬 또는 가능세계에 들어간다면 그의 도덕 세계는 공허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칸트의 도덕적 의지나 최 교수의 의지 자기 근원성은 선험적 자아 또는 홀로 주체성에 기초했다는 구조에서 자칫 공허한 윤리가 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의지의 자기 근원성은 자유의 필요조건이지만 이를 충분조건인 것처럼 간주하는데서 비약의 오류가 가능해 지는 것이다.

철수 사유실험 자체는 정합적이지만 그러나 이 실험으로부터 그 함축을 끌어내는 과정에서의 칸트적 오류는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최 교수는 “이러한 자기근원성을 통해 자유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데,  그때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 된다”고 적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비약을 할 수 있는가? 철수3은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을 함의하지 않는다. 철수3은 계속 철수1에 의해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다. 철수3인 경우에도 자유의사는 단순히 철수의 좁은 내적 상태(앉아 있는 것을 좋아함)만이 아니라 그 좁은 내적 상태가 넓은 외적 상태(포승줄로 묶여 있음)에 의해 억제되지 않을 조건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사는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함>이 아니라 <앉아 있는 것을 선택함>이다. 그리고 이 <선택> 에는 어떠한 넓은 외적 상태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재판부와 최 교수는 김지은의 좁은 의식에 주목함으로 칸트적 오류에 이른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접근 때문에 안희정의 잘못을 찾는 것과 김지은의 잘못을 찾는 것 사이에 비대칭성이 발생한다. 이것은 강간범의 잘못을 찾는 것과 강간 피해자의 잘못을 찾는 것 사이의 비대칭성과 유사해 보인다. 오래 전 시골에서 혼자 상경한 어린 여공이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는 신문보도가 있었다. “강간을 당하고 몸이 더렵혀져 어머니와 남자친구를 볼 면목이 없어 먼저 갑니다”라는 유서였다. 여공은 강간을 당했을 뿐인데 어떻게 몸이 더렵혀졌다는 것인가? 물음에 대한 한 가지 설명 구조는 성관계 개념을 전반단계와 후반단계로 나누어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전반단계에서 남자와 여자는 합의해 남자 성기의 삽입과 여자 성기의 흡입을 수행한다. 여공은 전반단계에서 범인의 일방적 의도만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그 성관계에서 “강간”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성관계의 후반단계는 남자의 절정감은 필요하지만 여자의 절정감은 필요하지 않다. 합법적 부부관계의 성관계의 후반단계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성관계 검험이 그러한 것이다. 여공은 초반단계에서 강간을 당하였지만 후반단계에서는 부부관계의 성관계의 후반단계와 질적으로 다르지 않는 과정을 겪은 것이다. 여공은 성관계를 한 것이 된다. 여공은 “처녀가 성관계를 하여 몸이 더렵혀졌다”라는 사회적 인식을 자기 인식으로 수용한 것이다. 
    
김지은의 좁은 의식에 주목하는 방식은 강간 피해자가 겪는 사건들을 개체적 또는 독립적으로 인식하는 류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재판부는 맥주, 포옹, 외롭다 등의 언행을 독립적인 사건들로 파악하여 이들을 “포옹한 행위 뿐”, “언어적으로는 외롭다고 안아달라고 말한 것 뿐” (35쪽) 등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음욕을 품지 않고는 맥주, 포옹, 외롭다 등의 행동을 통해 “침대로 데려가 옷을 벗긴 후 간음” (34쪽)에 이르기까지의 안희정의 언행들을 엮기가 어렵고, 이를 전제하면 이 언행들은 총체적으로 긴밀한 한 편의 사건이 된다. 안희정은 의미의 위력적 공간에서 음욕을 품어 조직을 왜곡하여 김지은을 성적으로 폭행한 것이고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의 결여>는 김지은의 개별적 사건들의 공간이 아니라 선대본부의 총체적으로 의미적인 위력 공간에서 인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안희정 1심 무죄 판결을 부당하다고 해야 한다.

정대현 이화여대·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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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근 2018-10-19 10:16:25
자유는 독립된 주체성으로서 평등한 관계가 아닐 경우에는 자기 의사에 반해 자유가 억압될 수 있으므로 적극적인 자기방어기제가 작동할 수 없는 상황이 인정되며 위력에 의한 구속력이 부정될 수 없다.

지나가던사람 2018-10-10 22:59:27
밑에 분 왜 당신이 아저씨인지 알겠네요. 죄형법주의가 뭐 어쩌라는 건지; 법적 판단이 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건가.

지나가던아저씨 2018-10-10 14:03:42
철학과 출신이 취업시장에서 왜 외면받는지 알게 되는 글이었네요.
정말 알맹이는 하나도 없고 현학적 수사만 가득한 글 쓰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헌법에 있는 죄형법정주의 이거 하나만 아셔도 이런 글 못쓸텐데....

독자 2018-10-09 23:01:48
굉장이 길고 어려운 글이지만, 나름 짚이는 핵심이라면 "음욕을 품었으므로 위력행사가 맞다. 그러므로 유죄다" 이 말인 것 같다. 안희정이 품었던 심리를 음욕으로 규정하는 것은 어떤 근거인가? 이 글에는 안희정의 심리가 음욕이었음에 대한 증명이 없다. 또한, 그건 음욕이었다는 증명되지 못한 선험적 정의를 전제로 삼는 오류를 둘째 치고라도, 설령 그것이 음욕이었던 것이 맞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대상자인 김지은의 성적 자기결정권의 말살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이 자기자신을 향해 비정상적이고 부도덕한 음욕을 품는 것을 스스로 반기는 사람도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희정이 품은 마음이 음욕이었다 해서, 김지은 역시도 음욕을 품었을 가능성이 부정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