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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보론과 답변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보론과 답변
  •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 승인 2018.10.15 10:5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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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폴리스.22 정대현 교수와 이상룡 교수의 반론에 대한 답변

목차
I. 자기근원성이란 무엇인가?
II. 정대현 교수와 이상룡 교수의 반론에 대한 답변: 한국판 정치적 올바름과 그 폐해

지난 두 기고문에서 나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 대한 1심 재판부의 판결을 옹호했는데 그 핵심 요지는 이렇다.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1심 재판부의 판단이 옳다고 가정할 때 김지은이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의사에 따라 성관계를 결정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따라서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결정하면서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안희정에게 법적으로 죄를 묻기 힘들다는 말이다. 위력을 얼마나 폭넓게 해석할지, 비동의 간음에 대한 새로운 입법을 도입할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지만, 그것들은 적어도 안희정 사건과 관련해서는 모두 핵심에서 벗어난 잡음들이다. 핵심은 김지은이 진심으로 원해서 성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한 안희정을 법적으로 처벌할 근거는 없다. 

이러한 나의 주장에 대하여 상당한 반론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개념에 대하여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과연 그 자유 개념이 이론적으로 정합적인 개념이냐 혹은 경험적으로 적합한 개념이냐는 질문이다. 이에 이번 기고문에서는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개념에 대하여 설명해 보려 한다. 

I. 자기근원성이란 무엇인가?

자유의 문제는 유서 깊은 철학의 난제 중 하나이다. 특히 자유의지가 결정론하에서 가능한지 여부는 이름난 철학자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거들던 기나긴 논쟁의 주제이다. 근대 과학의 출현 이전에는 주로 신의 섭리(divine providence)에 따른 신학적 결정론(theological determinism)이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관한 논쟁을 촉발시켰다면 근대 과학의 출현 이후에는 기계론적인 세계관에 입각한 인과적 결정론이 신학적 결정론의 자리를 대신했다. 여기서 인과적 결정론이란 미래의 모든 사건이 과거 사건과 자연 법칙에 의해서 완전히 결정된다는 형이상학적 논제이다.

이런 인과적 결정론이 자유의지와 충돌하는가?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도대체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없는가? 양립가능론(compatiblism)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이 양립한다는, 결정론 하에서도 자유의지가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현실 세계에서 결정론이 성립하는지 혹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갖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서로 개념적으로 충돌하지 않는다는 말만 할 뿐이다. 양립가능론 캠프 내에 다양한 분파가 존재한다. 약한 결정론(soft determinism)과 비결정론적 양립가능론(indeterministic compatibilism)이 대표적인데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양립불가론(incompatibilism)은 양립가능론의 반대이다.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서로 개념적으로 충돌한다는 입장이다. 일단 결정론이 참이라 가정하면 우리는 결코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내부 분파가 존재한다. 자유주의(libertarianism), 강한 결정론(hard determinism), 강한 양립불가론(hard incompatiblism)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한 설명도 생략한다.

양립가능론과 양립불가론 사이의 논쟁은 주로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을 두고 벌어졌다. 나는 어제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했는데, 그때 나의 지하철 이용은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인가? 이에 대해 양립불가론자들은 결정론이 참인 상황에서 나는 그런 자유를 갖지 못한다고 역설한다. 과거 사건들과 결정론적 법칙이 나의 지하철 이용을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하기 때문에 나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것 이외에 달리 행위할 수 없었다는 것이 주요 논거이다.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자유를 이해하며 그런 자유가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미국 노트르담 대학의 반 잉와겐(van Inwagen) 교수는 이러한 아이디어를 다듬어 양립불가론을 옹호하는 하나의 정교한 논증을 구성했는데,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결과 논증(consequence argument)”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양립가능론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위의 논증이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양립불가론을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것이 양립가능론자들의 표준적인 대응이었다. 결정론하에서도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립가능론이 본격적으로 철학자들 사이에서 세를 넓히기 시작한 것은 자유를 반드시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깨달음에서 촉발되었다.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 아닌 다른 자유 개념을 결정론과 양립가능한 방식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다. 이런 양립가능론의 전략을 선구적으로 개척한 이가 바로 『리바이어던(Leviathan)』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이다. 홉스는 인과적 결정론을 참으로 받아들였지만 그럼에도 자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유를 “행위자의 본성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종류의 방해도 없는 상태(the absence of all the impediments to action that are not contained in the nature and intrinsical quality of the agent)”로 정의한다 – 홉스는 이렇게 정의된 자유를 ‘corporal freedom’ 혹은 ‘physical freedom’이라 부른다. 쉽게 말해 외부의 물리적 방해나 제약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라는 말이다. 

이해를 위하여 고정의자에 포승줄로 꽁꽁 묶인 외과 의사 철수를 다시 상상해 보자. 지난 글에서 설명했듯이 자유를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할 때 철수는 신체의 자유를 일절 갖지 못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홉스는 이 지점에서 철수의 자유를 반드시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철수에겐 의자에서 벗어날 자유는 없다. 포승줄이라는 외부의 제약 때문이다. 그러나 철수는 의자에 계속 앉아 있을 자유는 있다. 그가 일단 의자에 앉아 있기로 마음먹을 땐 포승줄은 더 이상 외부의 제약으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의 물리적 제약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라는 홉스의 견해에서 철수는 의자에 앉아 있을 자유를 갖는다. 철수에겐 의자에서 벗어날 자유는 없지만 의자에 머물 자유는 있다는 말이다. 

홉스의 자유 개념은 양립가능론적 자유 개념이다. 앞서 말했듯이 홉스의 자유 개념에 따르면 철수가 원해서 의자에 앉아 있는 경우 철수의 행위는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다. 설사 의자에 앉아 있기를 원하는 철수의 욕구가 자연 법칙에 의해 이미 완전히 결정된 것이라 가정하더라도, 철수의 자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의 원천은 (그것이 결정론적으로 정해져 있든 그렇지 않든) 철수가 원하는 것을 아무런 제약 없이 실행한다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 홉스 이후 양립가능론의 전통을 계승한 데이빗 흄(David Hume)의 자유 개념 역시 홉스의 자유 개념과 별반 차이가 없다. 

여기까지 읽다 보면 홉스의 자유는 내가 지난 글에서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라 부른 것과 대동소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말 “진심으로”라는 수식어의 유무에서 비롯한다. 나는 지난 글에서 철수가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진심으로 원할 때 의자에 앉아 있는 그의 행위는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라 말했다. 자기근원성이란 행위자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외부의 제약 없이 행위로 옮길 수 있는 상태이다. 한편 홉스의 자유는 “진심으로”라는 조건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위자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외부의 제약 없이 행위로 옮길 수 있는 상태이다. 

혹자는 “진심으로”라는 단어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한 차이를 만들어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X를 욕구한다고 말하는 다양한 맥락을 생각해보면 그 단어의 중요성은 자명하다. 내가 X를 욕구하면서 그 욕구를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무의식적 욕구); 내가 X를 욕구하며 동시에 X가 사라지기를 간절히 욕구할 수도 있고(서로 충돌하는 두 욕구); X를 욕구하며 동시에 X를 욕구하는 내 모습을 몸서리치게 싫어할 수도 있고(이차욕구); X를 욕구하며 동시에 그 욕구에 대하여 나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다(자기기만적 욕구) – 이 모든 가능성을 구현하는 인간이란 참으로 기묘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이 다양한 맥락에서 “진심으로”라는 단어는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낸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홉스의 자유 개념에 대한 비판에서 자주 거론되는 정신질환자(e.g., 중독, 강박장애, 공포증, 조현병, 인격장애, 감정조절장애 등)의 사례를 고려해 보자. 게임 중독자인 영수는 자신이 게임에 중독되었다는 사실에 몸서리치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그의 게임 중독은 이미 그가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 있다. 게임을 중단하겠다 맹세에 맹세를 하지만 게임을 하고픈 강렬한 충동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다. 그 충동을 못 이겨 영수가 결국 게임을 했다고 가정할 때, 영수의 행위는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인가? 분명 외부의 물리적 방해나 제약은 없다. 영수는 자신의 욕구에 따라 게임을 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은 영수의 행위가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법률적으로 이런 경우는 심신미약상태로 분류되어 법적 책임이 경감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영수의 행위가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나의 답변은 이렇다. 영수는 아무런 외부의 제약 없이 자신의 욕구에 따라 게임을 했지만 그 욕구는 그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고, 바로 그런 이유에서 그의 행위는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다. 영수의 게임 욕구는 분명 영수의 정신 세계에서 발생한 욕구라는 점에서 영수에게 귀속되는 욕구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영수의 충동적 게임 욕구는 (마치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처럼) 영수에겐 어떤 통제되지 않은 외부적인 힘으로 느껴지고, 그것의 작용에서 영수 자신은 철저히 소외된다. 그 욕구 속엔 영수의 사람 됨됨이, 즉 영수가 어떤 인간이고자 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영수 자신의 자기 이해(self-understanding)가 투영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영수는 단지 게임 욕구가 작동하는 심리적 무대 혹은 배경을 제공할 뿐 그 욕구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라는, 영수의 게임 욕구는 영수의 진심이 아니라는, 그래서 영수의 진심이 게임을 하는 영수의 행위에 대한 근원이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수의 행위는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의사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중독 사례는 「누가 노회찬을 부패 정치인이라 말하는가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2424」에서도 상세히 논의된다. 

영수의 사례를 프로게이머 임요환의 사례와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임요환에겐 일분 일초가 아깝다 싶을 정도로 게임에 몰두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그 시절 임요환의 모습은 겉만 보면 게임 중독자인 영수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둘은 의지적 구조에 있어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 「정신의학의 과학성에 대한 의심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42122」에서 나는 게임중독자와 프로게이머 사이의 차이가 갖는 정신의학적 함의에 대해 논의하였다. 임요환의 게임 욕구는 유명 프로게이머가 되겠다는 일념 하에서 그가 주체적으로 생성하고 긍정하고 실천한 욕구였고, 그렇기에 그 욕구에는 임요환의 사람 됨됨이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다. 임요환은 그 욕구의 진정한 주인이었단 말이다. 임요환의 게임 욕구는 그의 진심에서 비롯하였다고 볼 수 있는 이유이다. 그 욕구가 임요환의 진심에서 비롯된 만큼 게임에 임하는 임요환은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를 행사했다 볼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임요환과 게임중독자 영수가 함께 피시방을 향하는 상황을 가정할 때 임요환은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의사에 따라 행동하는 반면 영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홉스의 자유 개념과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개념 사이의 차이는 명백하다. 홉스는 임요환과 영수 모두 외부의 물리적 제약 없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실행했고, 따라서 둘 모두 자유 의사에 따라 행동했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홉스의 자유 개념과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동물이 자유 의사를 가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다시 한번 확연히 갈린다. 홉스는 동물들도 외부의 제약 없이 자신들의 욕구를 실행하는 경우 자유를 행사한다고 말한다. 허기진 강아지가 자신의 식욕에 따라 음식을 먹는 경우 그 강아지는 자유 의사에 따라 움직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개념은 다른 판단을 내린다. 왜냐하면 강아지와 같은 동물들은 진심으로 무엇을 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의 욕구와 충동에 대한 반성적인 자기 평가 능력을 갖는 인격체에게만 가능한 현상이다. 욕구와 충동에 무반성적으로 반응하기만 하는 동물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고, 그런 점에서 동물들은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를 가질 수 없다. 강아지가 자신의 식욕에 따라 음식을 먹는 경우 그것이 자유 의사에 따른 것인지 아닌지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강아지는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원할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유를 자기근원성으로 이해할 때 자유는 인간에게만 고유하게 부여된 특권이자 형벌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 프랑스의 철학자 샤르트르(J. P. Satre)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선고 받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까지 홉스의 자유와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사이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했는데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 개념이 홉스의 자유 개념보다 우리의 상식에 더 부합한다는 것은 다음의 사례에서 한층 분명하다. 위력에 의한 간음이 발생하는 전형적인 경우를 상상해 보자.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은 회사원 영희에게 포악스러운 회사 사장이 자신과 성관계를 갖지 않으면 회사에서 해고하겠다고 넌지시 암시한다. 영희는 생계를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생각에 마지못해 사장과 성관계를 갖는다. 이때 영희는 자유 의사에 따라 사장과 성관계를 가졌는가? 홉스는 그렇다고 말할 듯하다. 

두말할 필요 없이 영희는 사장과 성관계를 거부하고픈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영희는 어떠한 물리적 제약도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의 숙고 끝에 사장과의 성관계를 결정했다 – 실제로 현대의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은 전략적 의사 결정 상황에서 영희가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선택을 했다는, 영희의 선택이 파레토 최적(Pareto optimal)이라는 분석을 내놓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희에겐 사장과의 성관계를 받아들이고픈 욕구 역시 있었다. 물론 그 욕구는 회사 사장의 위협에 의해 유도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영희가 그런 욕구를 가졌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진 못한다. 이렇게 볼 때 영희는 두 가지의 충돌하는 욕구, 즉 사장과의 성관계를 거부하고픈 본래적 욕구와 그럼에도 생계 걱정에 그와의 성관계를 받아들이고픈 욕구를 동시에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홉스의 자유 개념에 따르면 영희는 자유 의사에 따라 사장과의 성관계를 받아들였다. 외부의 물리적 제약이 없는 상황에서 자신이 욕구하는 바를 실행했기 때문이다. 영희는 사장과의 성관계를 받아들이고픈 욕구를 가졌고, 아무런 물리적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 그 욕구에 따라 행위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영희의 성관계는 그녀의 자유로운 행위라는 것이 홉스의 자유 개념에서 따라 나온다. 그러나 이는 상당히 비상식적이다. 영희의 성관계는 (비록 폭력도 협박도 없었지만) 억압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그런 한에서 영희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의 상식은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나는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영희는 사장과의 성관계를 받아들이길 원했지만 진심으로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희는 두 가지의 충돌하는 욕구, 즉 사장과의 성관계를 거부하고픈 욕구와 그것을 받아들이고픈 욕구를 동시에 경험했다. 이때 성관계를 거부하고픈 욕구는 영희의 진심인 반면에 성관계를 받아들이고픈 욕구는 영희의 진심이 아니었고, 그에 따라 영희의 성관계는 자기근원성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영희는 사장과의 성관계를 결정하며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영희의 첫 번째 욕구는 그녀의 진심인 반면에 두 번째 욕구는 그녀의 진심이 아닌가? 영희의 의지적 구조 안에서 두 욕구가 어떤 차이를 갖느냐는 것이다. 아주 어려운 질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사색이 요구되는 대목이다. 

II. 정대현 교수와 이상룡 교수의 반론에 대한 답변: 한국판 정치적 올바름과 그 폐해

1.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한 이번 논쟁이 내게 준 가장 큰 교훈은 정치적 올바름의 망령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성, 비정규직,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어느 경우에서건 무조건 피해자라는 선입견이 그것이다. (서구에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데, 이 글에서는 이런 선입견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할 것이다. 이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가장 잘 포착하기 때문이다.) 개별 사건의 디테일은 중요하지 않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안희정과 김지은이라는 두 인간 사이에 남자 도지사와 여자 수행비서라는 권력 관계가 존재하는 순간, 안희정은 가해자이어야만 하고 김지은은 피해자이어야만 한다. 그렇게 결론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고, 우리가 할 일은 그 결론을 가장 보기 좋게 정당화하는 것뿐이다. 그 결론이 틀렸을 수도 있지 않냐고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면 그는 당장 가해자 편드는 악마쯤으로 낙인 찍힌다. “안희정에게 무죄 판결 내린 사법부가 유죄다”는 구호는 이런 정치적 올바름의 광풍을 타고 울려 퍼졌다. 

정치적 올바름의 신봉자들은 곧잘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선다는 도덕적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적 올바름이 선사하는 우월감은 값싼 우월감이다. 치열한 지적 탐구나 성찰이 없는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편견과 선입견을 마음껏 탐닉하며 획득된 안락한 올바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회의 약자들과 함께 한다는 도덕감 앞에서 개별 사안에 대한 면밀한 숙고와 탐구는 거추장스러운 요식 행위로 전락한다.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나 역시 우리 사회가 사회적 약자를 좀 더 세심하게 보살피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일인이다. 그리고 정치적 올바름에 공감을 표하는 많은 이들의 선의지 역시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한국 사회는 얼마 전까지 힘있고 권력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사회적 약자들을 약탈하고 억압한 부패정권과 그 하수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노력은 결코 경시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대의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옹호가 또 다른 불의를 양산한다면 그것은 막아야 한다. 그런 불의가 점증할 때 사회적 약자의 권익 옹호라는 대의 자체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미국 대선에서 도날드 트럼프의 공화당이 힐러리 클리턴의 민주당을 상대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는 리버럴 계열 정치세력들의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반발도 한몫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https://jspp.psychopen.eu/article/view/732).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한 일부 여성계와 언론사들의 사려 깊지 못한 대응은 한국 여성 운동에 오랫동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투 운동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권익 옹호가 우리 사회에서 지속성을 갖는 흐름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선 좀 더 깊이 생각하고 좀 더 깊이 성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내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라는 대의에는 공감하면서도 정치적 올바름의 교조에 대해선 우려를 표하는 이유이다. 

나는 정대현 교수나 이상룡 교수 역시 정치적 올바름의 망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말을 해서 두 분께 유감이지만, 정 교수의 의미적 위력 공간 개념이나 이 교수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타자와의 관계에 상대적이다”는 입론은 안희정 사건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급조된 수사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권력을 가진 상관이 권력 관계를 매개로 부하직원과 성관계를 갖는 상황에서 언제나 상관은 가해자이고 부하직원은 피해자인가? 그렇지 않다. 개별 사건마다 디테일을 살펴야 한다. 분명 상관이 가해자인 경우가 많다. 자신과 성관계를 갖지 않으면 해고하겠다는 상관의 협박(conditional threat) 앞에서 생지옥 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권력 관계를 매개로 이루어진 성관계가 반드시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상관이 부하직원에게 “네가 나와 성관계를 갖는다면 내가 너를 승진시켜 줄께”와 같은 제안(conditional offer)을 할 수도 있다. 혹은 부하직원이 먼저 상관에게 다가가 성관계와 승진을 두고 흥정을 시도할 수도 있다. “나를 승진시켜주면 당신과 성관계를 갖겠다”고 말하면서. 이 경우들은 모두 권력 관계를 매개로 한 성관계를 포함하고 있지만, 부하직원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는지 여부는 각 경우의 디테일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정 교수나 이 교수가 위력이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가다듬는 과정에서 이러한 다양성을 고려했는지 의문이다. 그들의 견해가 권력 관계를 매개로 한 성관계에서 상관은 무조건 가해자이고 부하직원은 무조건 피해자라는 정치적 올바름의 교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나의 비판이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그들의 선의지 마저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2. 정대현 교수는 반론에서 필자의 논변을 “매우 옹색한 논변”이라 비판하는데, 그 비판의 핵심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철수의 사례에서] 자유의사는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함>이 아니라 <앉아 있는 것을 선택함>이다. 그리고 이 <선택>에는 어떠한 넓은 외적 상태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아야 한다.” 정 교수의 주장은 설사 철수가 앉아 있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가정하더라도 철수가 앉아 있는 행위는 그의 자유 의사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포승줄에 묶여 있기 때문에 철수는 <선택>을 갖지 못한다는 것이 정 교수의 근거이다. 정 교수가 말하는 <선택>이란 무엇인가? 적어도 정 교수의 반론문만 읽어 봤을 땐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지난 글에서 나는 법적·도덕적 맥락에서 중요한 자유 개념은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 아니라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라고 이미 논증하였다. 정 교수는 그 논증을 비판하든지 아니면 정 교수의 <선택>이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야 할 것이다. 

3. 이상룡 교수는 성관계 전후 김지은의 행적이 피해자답지 않다는 1심 재판부의 판단이 이번 재판의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그것을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하는 나의 분석은 “상당히 무책임한 분석”이라고 비판한다. 성관계 전후 김지은의 행적이 피해자답지 않다는 재판부의 판단이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는 이 교수의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나의 논의가 “피해자다움”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책임하다고 비난하면 곤란하다. 

안희정 성폭행 사건은 자유 의사, 성적 자기결정권, 도덕적 책임, 위력, 피해자다움과 같은 다양한 개념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이고, 그러다 보니 쟁점이 한 둘이 아니다. 나는 앞의 두 기고문에서 두 가지 자유 개념을 명확히 구분하고 그 둘이 어떤 철학사적 맥락에서 제안되었는지 설명하면서 법적·도덕적 맥락에서 어느 개념이 더 중요한지를 밝혔다. 그러면서 위력에 대한 논란이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에 대응하고 피해자다움에 대한 논란이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에 대응한다고 논증하였다. 쟁점이 되는 핵심 이슈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명확히 밝히는 작업이었다. 나는 이런 작업이 피해자다움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책임한 분석이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 교수 본인이 피해자다움에 대한 분석을 제시하고 그 분석에 근거해서 나의 논의가 오류라는 것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면 내 분석이 무책임하다는 이 교수의 비난이 일말의 호소력을 지닐 듯하다. 혹시 이 교수가 교수신문에 다음 기고문을 발표한다면 그런 내용이 포함되기를 기대한다. 

4. 나는 인신공격(ad hominen attack)이 항상 나쁜 논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인신공격이 정당하게 제기될 수 있는 맥락이 있단 말이다. 그럼에도 인신공격은 주장 혹은 견해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제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신공격은 타인의 인격에 상처를 줄 수 있고, 그렇게 건전한 토론을 저질의 말싸움으로 전락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인신공격은 주장 혹은 견해에 대한 공격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정당성을 요구한다고 믿고 있다. 

이상룡 교수는 기고문에서 나에게 인신공격을 가했는데, 그 근거가 부실하기 짝이 없다. 이 교수는 말한다. “이에 대해서 최성호 교수는 피해자다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옳다고 가정하고 논증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재판부의 판결을 참이라고 받아들이고 그 판결을 정당화하기 위해 “두 자유 개념의 충돌”을 동원한 것으로 간주될 소지가 크다. 즉, 재판부의 판결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재판부가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을 사용한 것으로 해석해 줌으로써 재판부의 판결을 정당화해 주려고 한 것이다.” 

내가 재판부의 판결을 정당화할 목적으로 나의 지식을 동원했다는 이 교수의 주장이다. 재판부의 판결이 옳다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것을 정당화할 요량으로 지난 기고문을 썼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학자다움에 대한 심한 모독이 아닐 수 없는데, 놀랍게도 그 근거로 제시된 것이 내가 피해자다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이 옳다고 가정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피해자다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을 가정했기에 나의 논증이 충분히 견고하지 못하다는 비판은 얼마든지 수긍할 수 있는 비판이고, 그 비판에 대해서는 위의 (3)번에서 상세히 답변하였다. 그러나 이 교수는 지금 내가 피해자다움에 대한 재판부의 판단을 가정했다는 사실로부터 내가 재판부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교수신문 기고문을 작성했다고 인신공격을 가하고 있다. 누군가의 판단을 가정하면 항상 그를 정당화할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내가 내일 날씨가 맑을 것이라는 기상청의 판단을 가정하고 여행 계획을 짜면 나는 기상청을 정당화할 목적을 가진 것인가? 이 교수는 글을 쓰면서 논의를 위해 누군가의 판단을 가정해 본 적이 없는가? 그때 언제나 그를 정당화했는가? 이 교수의 인신공격이 억지라는 것은 이 교수 본인이 더 잘 알 것이다.

기고문의 말미에서 이 교수가 제기한 인신공격은 이보다 정도가 더 심하다. 나를 곡학아세라고 비난하는데 그 근거가 나의 핵심 주장 중 하나가 조건문(가언명제)이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억지 인신공격에 대해서는 답변을 내놓는 것조차도 사치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답변하겠다. “물체 A가 다른 물체 B에 힘을 가하면, 물체 B는 물체 A에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힘을 동시에 가한다.” 뉴튼의 운동 법칙 중 하나이다. 조건문이다. 그럼 뉴튼도 곡학아세인가? 이 지점에서 이 교수는 조선일보의 ‘라면 논법’이 왜 나쁜 논법이지 궁금할 것이다. ‘라면 논법’과 나의 논법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할 것이다. 그에 대해서 답을 드리자니 글이 산만해지면서 너무 길어질 듯하다. 내게 개인적으로 연락 주시면 논증 이론(argumentation theory)에 입각하여 확실하게 설명해 드리겠다. 

나의 지난 기고문에 대하여 이 교수의 심기가 불편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그래서 내게 인신공격성 비판을 제기한 듯하다. 그런데 이 교수가 한 가지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어떤 주장에 대한 비판은 그 주장에 대하여 심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주장에 대한 비판은 그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보일 수 있는 확실한 논점이 있을 때, 확고한 근거가 있을 때 제기하는 것이다. 그 주장이 오류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득력 있게 논증할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비판에 나서라는 말이다. 그런 논점이나 근거가 없으면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며 왜 자신이 그 주장에 대하여 심기가 불편한지에 대해 숙고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이다.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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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 2018-10-18 13:06:35
인신공격은 본인이 하고 계시네요!

가나다 2018-10-16 22:13:35
과연 논의는 이어질 것인가!!!!!!!!

Frankfurt 2018-10-16 14:35:32
정치적 올바름과, 그것을 뒤어 업은 "나는 옳은 쪽에 있기에 너는 틀리다" 라는 식의 "감정선"이 제외된 논의를 보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주장 뒤에 함축된 마땅히 지성인이 가져야 하는 논리적 자세에 대해 동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