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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무죄 판결의 정당성과 두 가지 자유 개념, 그리고 보론과 답변
안희정 무죄 판결의 정당성과 두 가지 자유 개념, 그리고 보론과 답변
  •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 승인 2018.09.17 10:17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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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폴리스 20

목차
Ⅰ.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한 보론
Ⅱ. 이현재 교수의 반박문에 대한 답변

 

지난 번 교수신문 기고문(「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교수신문〉 934호)에서 나는 안희정의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한 가지 이유를 제시했는데, 그게 많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모양이다. 그러나 나의 분석이, 나의 논증이, 나의 해석이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틀렸는지를 지적하는 비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현재 서울시립대 교수(도시인문학연구소)가 교수신문에 나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없는 이유」, 〈교수신문〉 936호)을 보내오셨지만 생산적 논의를 이끌어내기는 힘들 것 같은 예감이다. 안타깝다. 지난 번 기고문에 대한 보론과 함께 이 교수에 대한 답변을 적어본다.  

Ⅰ.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한 보론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김영철은 5.18 광주에서 민간인 살상에 가담한 공수부대원이었다. 광주 학살에 대한 뉴스가 가끔씩 전파를 탈 때마다 가슴 한 켠 죄책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자신은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모두가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인 그 때, 사실상 전시나 다름 없었던 그 때,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어.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이가 나의 위치에 있었어도 내가 했던 것과 똑같이 민간인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이런 김영철의 자기정당화는 민간인 학살에 가담한 자신의 행위가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그래서 자신은 민간인 학살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다. 5.18 당시 상황에서 민간인 학살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거부할 수 없었다는, 그 명령을 따르는 것 이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 근거이다. 김영철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에 의지하여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불의, 부패, 부도덕에 관여했던 이들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에 호소하며 자신을 변호하고 면책 받으려 애쓰는 모습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일제시대 친일 부역자들로부터 지난 박근혜 국정농단의 부역자들까지 모두들 말한다. 자신들은 단지 권력자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권력자의 명령을 감히 거부할 수 없었다고, 다른 어떤 이라도 자신들의 위치에서 자신들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일제에 부역하고 국정농단에 부역하는 것 이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자신들은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달리 행동할 수 없었음”이 그들을 진정 면책하는가? 다시 김영철의 사례로 돌아가보자. 그가 군대의 위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5월 광주에서 민간인 학살에 가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의 면책을 정당화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가 그 학살에 임하며 어떤 심리적 태도를 지녔는지 역시 도덕적 평가에서 중요한 고려사항이기 때문이다. 그가 전남대 학생들을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며 묘한 승리감에 도취되었다면, 도청 앞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총격을 가하며 가학적인 즐거움을 경험했다면, 진월동의 어린이들을 학살하며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를 악마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명령을 거부할 의지조차 가질 수 없는 엄중한 상황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김영철이 면책될 순 없단 말이다. 설사 그가 군대의 위력 때문에 학살의 명령을 따르는 것 이외에 달리 행동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그에겐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에겐 여전히 모종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자기근원성”이라 부른 자유 말이다. 김영철의 학살이 그의 진심에서 말미암은 것이라면 그것은 그의 자유 의사에 따른 행위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군대는, 특히 비상시의 군대는, 절대적 위력의 공간이다. 삶의 가장 세밀한 조각까지 위력에 압도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여 김영철의 사례는 위력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쳐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가 일절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도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친일 부역자나 국정농단 부역자의 “달리 행위할 수 없었음”이 그들에 대한 정당한 면책 사유가 될 수 없는 이유이다.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은 세상의 모든 미래 사건이 과거 사건과 자연법칙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어 있다는 인과적 결정론 하에서도 여전히 자유의지가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 즉,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그래서 그 둘이 서로 양립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소위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에 안성맞춤인 자유개념이다. 내가 진심으로 원해서 어떤 행위를 수행한다고 할 때, 나의 몸과 마음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이 과거 사건과 자연법칙에 의해 이미 다 결정되어 있다 가정하더라도 나의 행위가 여전히 자기근원성의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서양철학사에서 자유의지에 관한 철학적 논쟁은 크게 양립가능론과 그에 반대하는 입장, 즉 결정론과 자유의지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결정론적 세계에서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존재일 수 없다고 보는 양립불가능론(incompatibilism) 사이의 전쟁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0세기 초까지 그 논쟁은 과연 결정론 하에서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관한 양립가능론(Hobbes, Hume, Mill 등)과 양립불가능론(Epicurus, Descartes, Nietzsche등) 사이의 치열한 공방으로 진행되었다면, 최근엔 논쟁의 초점이 자기근원성과 같은 대안적 자유 개념을 정의하는 문제로 옮겨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스탠포트 철학 사전의 자료가 유용하다 https://plato.stanford.edu/entries/freewill/)

성적 자기결정권은 행위자가 자유로운 상태에서 스스로 성생활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정의된다. 이 정의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판단을 위해선 행위자의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립이 선행해야 함을 보여준다. 우리가 어떤 자유 개념을 택하느냐에 따라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도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자유를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할 때의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과 자기근원성으로 이해할 때의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 대한 성폭력 사건 재판에서 주요 쟁점은 위력과 피해자다움, 이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는데, 각 쟁점이 앞에서 소개한 서로 다른 두 자유 개념에 대응한다. 먼저 위력에 대한 논란은 안희정과 김지은의 성관계가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의 의미에서 김지은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인지 여부와 관련된다. 대표적인 것이 스위스 호텔에서 안희정의 담배 심부름으로부터 시작된 간음을 두고 벌어진 논란이다. 안희정은 텔레그램으로 담배를 가져오라고 지시해 김지은을 방으로 부른 뒤 침대로 오라고 요구했고 김지은은 그것을 따랐다. 그런데 이에 대해 재판부는 김지은이 “담배를 방문 앞에 두고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만 했어도 담배를 가져다 주는 업무는 지시대로 수행하되 간음에는 이르지 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지은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좀 더 일반적 수준에서 재판부는 안희정의 위력이 존재하긴 했지만 안희정이 그 위력을 평소 행사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안희정의 위력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김지은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하지는 않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지난 기고문에서 나는 이 부분에서 재판부의 판단에 의문을 제기했다. 안희정의 위력으로 인해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김지은의 자유가 완전히 박탈되었다는 김지은 측 주장에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위력”을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으로 정의했는데, 여기서 “자유의사”는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을 통하여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안희정의 위력에 대한 논란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에 관한 것이라면,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논란은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에 관한 것이다. 김지은의 피해자다움과 관련해선 사건 전후 김지은의 행적이 과연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가졌다는 김지은의 진술과 합치하는지 여부가 핵심이다. 김지은의 심리와 행적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숙고가 필수적인 대목이다. 이에 대해선 매 공판을 빠짐없이 참석하며 각종 증언을 주의 깊게 청취하고 직접 방대한 자료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검사와 변호사 사이의 공방을 가까이서 생생히 목격한 1심 재판부의 판단이 지금으로선 가장 신뢰할 만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재판의 각종 증언과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하기는커녕 매 공판을 모두 참석하였는지도 불분명하고 재판부의 판결문 일부만 읽고 성급하게 재판부를 비난하기에 바쁜 일부 기자들과 여성운동가들, 그리고 그들을 추종하는 정치인들보다는 1심 재판부가 훨씬 믿음직하다. 그래서 지난 기고문에서 나는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1심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1심 재판부의 판단이 절대적 참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에 대하여 2심 재판부가 1심 재판부와 다른 판정을 내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경우 나는 2심 재판부의 판정을 기꺼이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1심 재판부이건 2심 재판부이건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판단은 김지은의 심리와 행적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숙고가 필수적인 만큼 그런 검토와 숙고를 수행하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에 있는 재판부를 믿어보자는 것이다.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결정하는 상황에서 안희정의 위력 때문에 그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김지은측의 주장이 옳다고 가정해 보자. 그때 김지은이 그렇게 안희정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는 근거에서, 안희정의 위력 때문에 안희정과 성관계를 갖는 것 이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는 근거에서 김지은은 그 성관계에 대한 일체의 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앞서 김영철의 사례는 위력이 일상의 모든 부분을 압도하여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가 일절 허용되지 않는 군대에서조차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가 존재할 수 있고 그 자유에 근거하여 광주 학살에 가담한 김영철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의사 하에서 수행했다는 가정하에서 김지은에게 그 성관계에 대하여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앞서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1심 재판부의 판정을 신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1심 재판부는 성관계 이후 김지은의 행적이 피해자답지 않다고, 김지은이 진심으로 원해서 안희정과 성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김지은이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의사에 따라 안희정과 성관계를 가졌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만일 이러한 1심 재판부의 판단이 존중되어야 한다면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김지은은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를 가졌고, 그런 한에서 안희정과 성관계를 가진 김지은의 선택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결과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희정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재판부를 무턱대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고 내가 역설하는 근거이다.  


Ⅱ. 이현재 교수의 반박문에 대한 답변

1. 이 교수의 반론은 다음과 같이 호기롭게 시작한다: “최성호 교수의 글은…말 그대로 역설적이다. 그 글은 안희정 무죄판결을 정당화하기보다 그 부당성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글은 자충수였다. 자살골이었다.” 그런데 이 선전포고와 같은 문장들이 마음에 걸린다. 이 교수는 “역설적이다” “자충수였다” “자살골이었다”와 같은 표현들로 무엇을 뜻했을까? 자살골은 축구에서 어느 팀의 선수가 자신이 속한 팀의 골에 공을 넣어 결과적으로 자신의 팀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는 행위이다. 내 글이 그런 자살골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주장이다. 그럼 나는 어느 팀에 속하는가? 아마 이 교수는 내가 친안희정팀, 반김지은팀, 친1심재판부팀, 반여성주의팀 등에 속한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니까 나는 안희정의 무죄를 옹호하는 팀에 속해 있고, 지난 번 나의 교수신문 기고문은 그러한 팀을 위한 나의 활동이었지만, 나의 의도와 달리 그것은 안희정 무죄판결을 정당화하기보다 그 부당성을 폭로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그래서 나는 내가 속한 팀에 막대한 손해를 입혔기에 나의 기고문은 자살골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이 교수가 뜻한 바라면 – 그것이 이 교수의 문장들에 대한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일 듯한데 – 나는 이 교수의 학자다움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금할 길 없다. 인신공격하자는 것이 아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묻고 있는 것이다. 이 교수 말이 옳다면 나는 친안희정팀 혹은 반김지은팀에 속해 있기에 지난 교수신문 기고문의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어야 했다. 안희정 무죄 판결이 옳다는 결론 말이다. 나의 작업은 그 결론을 가장 효과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결론을 미리 정해 놓고 그 결론을 옹호하기 위하여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는 것, 이것이 올바른 학자의 자세인가? 절대 아니다.

나는 그것이 책이건 논문이건 아니면 교수신문 기고문이건 결론 미리 정해 놓고 그에 대한 정당화에 몰두하는 식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 나의 결론은 언제나 나의 합리적 이성, 상식, 경험이 나를 인도하는 곳 끝에서 나를 기다렸다. 글을 시작할 땐 나의 사유가 나를 어디로 이끌지 나도 모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가끔 그 결론에 대한 윤곽이 어느 정도 잡힐 때도 있지만 오직 흐릿하게만 느껴지고, 글을 쓰다 보면 애초에 생각했던 결론이 수정되거나 폐기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안희정 무죄 판결의 정당성을 주장한 지난 번 기고문 역시 그러한 사색의 결과로 만들어진 산물이다. 만약 나의 사유가 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안희정이 유죄이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나를 이끌었다면, 나는 그런 결론의 기고문을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발표했을 것이다. 이렇게 미리 답을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합리적 이성이, 자신의 경험이, 자신의 증거가 인도하는 길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결론을 기꺼이 긍정하는 자세(설혹 그 결론을 옹호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고단하게 만든다 하더라도), 나는 이 자세가 진정한 학자다움이라 믿는다. 

자신은 여성주의팀 혹은 친김지은팀에 속해 있다고 믿으면서 안희정은 유죄라는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그 결론을 어떻게 정당화할지 골몰하는 것은 학자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데마고그(demagogue)의 모습이다. 만일 학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누군가가 그런 활동을 한다면 학문을 구부려 세상에 아부하는 것 다름 아니다. 4대 강을 옹호했던 많은 학자들이 왜 곡학아세의 표본으로 비난 받는가? 바로 4대강 사업이 옳다는 결론 미리 정해놓고 그 정당화에만 골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론 미리 정해놓고 정당화에만 골몰하다 보니 억지스런 말을 하게 되고, 심지어 국민을 기만하는 거짓말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무오류의 존재가 아닌 이상 지난 기고문의 결론이 틀렸을 수도 있다. 이 교수 말대로 그 기고문이 안희정 무죄판결의 정당성이 아닌 부당성을 드러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자충수나 자살골이라 말하면 곤란하다. 나는 김지은편도 안희정편도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편을 따지자면 나는 안희정 사건에 대하여 공정하고 사실에 부합하는 시각을 갖고 싶어하는 필부필부들의 편이다. 그리고 지난 기고문이, 설혹 많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런 공정하고 사실에 부합하는 시각에 다가서는 데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    

2. 이 교수는 글의 초반부에서 나의 이전 기고문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최 교수는 이 논리를 안희정 사건에 적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성관계 이후 김지은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김지은은 어쩔 수 없음이라는 피해자다움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힘들다. 따라서 재판부는 이 사건을 김지은 스스로가 진심으로 원해서 결정한 성관계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지난 번 나의 기고문에 대한 이 교수의 명백한 오독이다. 나는 “성관계 이후 김지은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고 말한 적이 없다. 내가 말한 것은 성관계를 결정하면서 김지은은 안희정의 위력 때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안희정의 위력은 철수의 포승줄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건 어디까지는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결정하는 상황에 관한 것이다. 성관계 이후에 김지은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의사에 따라 행위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재판의 쟁점도 아니고, 또 지난 글에서 내가 논의한 바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성관계 이후 김지은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를 가졌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주장도 내놓지 않았다. 

다음으로 “성관계 이후 김지은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김지은은 어쩔 수 없음이라는 피해자다움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힘들다”라고 이 교수가 썼는데, 이 역시 이해하기 힘든 문장이다. 내 기고문의 결론을 요약한다고 이 교수가 쓴 문장인데 내가 이해가 불가하니 참으로 난감하다. 

마지막으로 “이런 점에서 김지은은 어쩔 수 없음이라는 피해자다움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힘들다. 따라서 재판부는 이 사건을 김지은 스스로가 진심으로 원해서 결정한 성관계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이 교수는 말한다. 이 교수는 이것을 내 글의 결론에 대한 요약으로 제시하는데, 과연 내 글을 제대로 읽고 요약한 건지 의심스럽다. 나는 “재판부는 이 사건을 김지은 스스로가 진심으로 원해서 결정한 성관계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라고 결론 내린 적 없다. 나는 단지 성관계 이후 김지은의 행적이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했고, 그렇게 존중할 때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진심으로 원했다는 안희정 측의 주장이 지지를 받는다고 말했을 뿐이다. 혹시 이 교수에게 도움이 될까 해서 지난 기고문에서 내가 결론을 요약한 부분을 발췌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김지은에게서 안희정의 위력은 철수에게서 포승줄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둘 모두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행위자의 자유를 박탈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자가 어떤 종류의 자유도 갖지 않았다는 결론이 곧장 따라 나오진 않는다. 실제로 철수가 의자에 앉아 있는 행위는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의사에 따라 수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1심 재판부의 판단이 옳다고 가정할 때 김지은이 안희정과 성관계를 가진 것 역시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의사에 따라 수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행위자의 행위를 법적·윤리적으로 평가하는 맥락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기에 김지은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글의 주요 논지이다. 안희정의 위력을 아무리 폭넓게 해석한다 하더라도 김지은이 진심으로 원해서 성관계를 가졌다면 안희정은 무죄라는 말이다.」

3. 이 교수는 “사실 자기근원성으로서의 자유는 근대국가가 시민에게 권리를 부여하려 했을 때나 통용될 수 있었던 구닥다리 개념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이 교수의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개념이 구닥다리 개념이라는 말은 자유에 관한 철학을 조금이라도 학습한 이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스탠포드 철학 사전은 이 주제에 대한 유용한 입문서이다. 자유의지 항목(https://plato.stanford.edu/entries/freewill/)과 양립가능론 항목(https://plato.stanford.edu/entries/compatibilism/)만이라도 정독하고 이 주제에 대해서 글을 쓰시기 바란다. 아무리 전문 학술지가 아니라 신문에 기고하는 글이라 해도 학문하기의 기본은 지켜야 할 것 아닌가? (한국어 “자기근원성”은 대략 두 항목의 저자들이 “Source model”이나 “Sourcehood account”라는 표현으로 뜻한 바에 대응한다고 보면 된다.)

4. 이 교수는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개념이 구닥다리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이 전통적 자유 개념은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알고 있으며, 그 상황에서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행동한다는 것을 또한 전제로 한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이나 언어철학은 자유로운 주체가 허구라고 비판한다. 인간은 무의식적인 차원에 의해 추동되기도 하며, 주어진 언어의 구조는 개인의 일탈을 힘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 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투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왜 자신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왜 인간이 무의식적 차원에 의해 추동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하는가? 나는 알 길이 없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욕구 혹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진 않겠다. 그러나 그러한 욕구나 욕망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곧장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개념이 무익하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은 무의식적 욕구나 욕망이 작용하는 경우에 있어서도 자유에 대하여 올바른 판단을 내린다. 어느 여성이 약물에 취해 무의식 상태에서 성관계를 가졌다면 그건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성관계인가? 명백히 아니다. 설사 그녀가 무의식 상태에서 성관계를 “욕구해다” 하더라도 그 욕구는 약물에 의해 인도된, 그녀의 진심이 반영되지 않은 욕구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녀의 성관계가 자기근원성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행위가 아니었고, 따라서 그녀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성폭력이란 말이다. 이러한 추론에 어떤 문제가 있는가? 나는 알지 못한다. 

5. 이 교수는 글의 말미에서 “나는 여기서 악셀 호네트(Axel Honneth)가 제안한 탈-중심적 자율성의 개념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욕구에 투명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욕구를 두려움 없이 찾아가는 능력이 있다.”라고 말한다. 나는 악셀 호네트의 자율성 개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의 자율성 개념이 안희정 무죄 판결과 무슨 관련을 갖는지도 알지 못하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욕구를 두려움 없이 찾아가는 능력”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이 교수의 글 마지막 세 문단은 몇 번을 읽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무지 이해 불가하다. 나의 무지를 탓해야 할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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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도 2019-07-11 22:10:49
문빠를 옹호하면서 최성호 선생님께서 전개하신 주장에 따르면 정치뿐 아니라 학문에서도, 인간은 냉정한 관찰자로서의 관점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당대 가장 뛰어난 화학자조차도 소위 '플로지스톤 빠' 인 이상 산소연소 이론을 결코 받아들이지 못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선생님은 노무현 정신에 대해서 그것을 근원적 인간다움의 표상이라고 찬양하는 글을 쓰셨을만큼 충성스러운 노무현 팬이시고, 안희정은 노무현의 정치적 상속자들 중 하나이죠.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합리성이 이끄는대로 자신도 모르는 결론으로 따라갔다는 것은 믿기 어렵습니다. 선생님이 소위 노빠가 아니셨다면 이런 글을 교수신문에 기고하셨을리가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철학도 2019-07-11 22:03:27
최성호 선생님의 안희정 무죄 판결 옹호 논증에는 동의하지만, 이현재 교수의 반박에 대한 선생님의 비판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선생님은 스스로 친-안희정 팀에 속한다는 걸 부정하시고, 안희정 무죄판결이 옳다는 결론을 정해놓고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글을 작성해내신게 아니라 합리성이 이끄는 결론으로 따라갔을뿐이며 그 결론이 어디인지 선생님 자신도 몰랐다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이 감정적으로 애착을 가지고 있는 결론을 옹호하기 위해 논리를 짜내는 것은 '학자다움'에 크게 위배된다고도 하셨죠. 하지만 그런 주장은 문빠를 옹호하면서 전개한 선생님의 주장과 전면으로 배치됩니다.

안녕 2018-10-09 21:14:15
나는 '자기 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을 잘 모른다. 그래서 그 개념을 가지고 최성호 교수님이 펼치는 논증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 더불어 나는 이현재 교수님이 조심스럽게(왜 조심스러운지 잘 모르겠지만) 제안한 악셀 호네트의 자율성 개념도 잘 모른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평가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이현재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이른바 '구닥다리 론'이다. 이것이야 말로 이현재 교수님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인 것 같다. 왜 논의를 스스로 차단해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철학과폐지하라 2018-09-30 22:51:59
덧붙여, 재판부에서 판단한 김씨의 '피해자다움'은 재판부에서 가해자 지인 증언만 신뢰하고 팩트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상황에서 도출됐습니다. 이들 역시 외부로 비춰진 '정황'을 주관적으로 해석해 피해자 김씨의 내면을 추측했을 뿐 그녀의 '자기 본원적 내면'을 알 수 있던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개인의 '자기본원적 내면'은 본인만 알 수 있으며 타인은 알 수 없습니다. 역으로 그렇기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이 중요해 지는 것입니다. 그녀의 내밀한 고백이기 때문이죠.

당신의 논리대로라면 그녀의 피해자다움과 같은 정황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철학과폐과해라 2018-09-30 22:46:37
이해력이 이렇게 부족하신데 어떻게 철학을 전공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혹시 철학과 출신인 안 전지사와의 친분으로 그를 옹호하는 글을 써주신 건 아닌지요.

판사들은 애초에 본인만 내밀하게 알 수 있는 '자기근원성에 의한 자유'를 알 수 없기에 그의 주장과 다른 정황을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첫 성관계에서 김씨를 안씨 숙소로 불러들인 것은 안씨입니다. 그리고 그에겐 그녀를 불러들일만한 갑을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신의 논리가 맞다면, 역으로 안희정은 비서 김씨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성폭행을 했으나 현재 발뺌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 역시 기혼자이고 설령 김씨가 유혹했더라도 거절할 수 있었으나 그는 매번 그녀를 먼저 불러들여 성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는 아마 진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내면에서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