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안희정 무죄 판결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한 가지 이유
  • 최성호 경희대 철학과
  • 승인 2018.08.27 09:45
  • 댓글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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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폴리스 18. 안희정 무죄 판결에 대한 변론

자신의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1심 판결을 두고 말들이 많다. 일각에선 시대에 뒤떨어진 판결이라는 성토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문제의 핵심은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결정함에 있어 그 둘 사이의 권력적 상하관계에서 오는 위계나 위력이 작용했는지 여부이다. 과연 김지은이 안희정과 자유로운 의사 하에서 관계를 가졌냐는 말이다. 자유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중요해지는 대목이다. 

재판부는 안희정이 김지은에 대한 임면권을 갖는 직속상사로서의 위력을 갖는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위력의 존재는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안희정이 그러한 위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고 봤다. 안희정이 평소 업무 관계에서 권위적이지 않았다는 증언이 다수 나왔고, 또 성관계 이전에 안희정이 김지은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위력을 행사했다고 볼 정황도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일부 매체에서 위력의 존재와 위력의 행사가 구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이번 판결을 비판하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비판이다. 위력(power)은 언제나 어떤 X를 실현할 위력(power to do X)이다. 그런 점에서 위력의 존재 자체와 그 위력을 실제로 행사함으로써 X를 실현하는 것 사이에는 명백한 개념적 간극이 존재한다).

위력의 존재와 자유의사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재판부의 판단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설혹 안희정이 평소 권위적이지 않았다는 재판부의 판단이 옳다 하더라도 그로부터 김지은이 자유로운 의사 하에서 안희정과 관계를 가졌다는 결론이 바로 따라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를 상술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자유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서 지배적인 입지를 다져온 자유에 대한 통제(control) 이론을 살펴보자. 나는 어제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했는데, 그때 나의 지하철 이용은 자유의사에 따른 것인가? 그에 대해 통제이론가들은 나의 지하철 이용이 나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질 때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은 무엇인가? 여전히 논란이 많지만 다수의 통제이론가들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the ability to do otherwise)’을 키워드로 제시한다. 즉 나의 지하철 이용이 나의 통제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건 지하철 이용 시점에 내가 지하철 이용이 아닌 다른 것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어제 지하철을 이용해 출근할 때 나는 택시를 이용할 수도 있었고, 버스를 이용할 수도 있었고, 그도 아니면 아예 회사에 출근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처럼 내가 지하철 이용이 아닌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실제론 지하철을 이용하였는데, 여러 가능한 선택지들 중에서 지하철 이용을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과정에서 나의 통제가 작동했다고 통제이론가들은 말한다. 자유의 핵심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이라는 것이다.

이런 통제이론 하에서 재판부의 판정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반론이 가능하다. 안희정이 도지사로서의 혹은 대선주자로서의 위력을 갖는다는 사실 자체가, 위력의 존재 자체가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거부할 가능성을 차단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관계를 거부하려 마음먹으려 할 때 “이 사람이 나를 해고할 위력을 가지고 있는데”라는 생각이 그녀에게 번뜩 들 수 있다. 그에 따라 안희정과 김지은의 수직적 위력 관계의 존재 자체가 (설사 안희정이 그 위력을 평소 행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지은의 거부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이로부터 김지은은 안희정과 성관계를 갖는 것 이외에는 달리 행동할 수 없었고, 따라서 김지은은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안희정과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이 반론은 각종 매체에서 중구난방으로 쏟아지는 이번 판결에 대한 비판 중 가장 매서운 비판이 될 듯싶다. 그런데 재판부 입장에서도 할 말이 없진 않다.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자유의 개념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재판에서 재판부가 특히 주목한 것은 성관계 이후 김지은의 ‘피해자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성관계 이후 몇 시간 뒤 김지은은 안희정이 좋아하는 순두부 식당을 찾으려 애썼고 성관계 당일 안희정과 와인바에 갔다. 또한 굳이 가식의 태도를 취할 필요가 없는 지인과의 대화에서도 지속적으로 안희정을 지지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물론 일각에서는 ‘피해자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애매하고 그래서 악용될 수 있다고 우려하지만 고소인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유무죄를 판단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성폭력 사건에서 재판부가 피해자다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재판부 입장에선 사건 전후로 고소인이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고소인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판부가 피해자다움에 대해 좀 더 세심하고 사려 깊게 판단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이하에서는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관한 각종 증언을 직접 청취하고 기록을 직접 확인한 재판부의 판단을 일단 존중하기로 하자.

김지은의 행동이 피해자답지 못하다는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할 때 그로부터 추론되는 것은 김지은이 원하지 않는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김지은이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진심으로 원했다는 안희정 측 주장을 지지한다. 그런데 재판부가 이 지점에서 새로운 자유 개념을 제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자유란 행위자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수행하는 것 다름 아니고, 김지은은 안희정과의 성관계를 진심으로 원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성관계는 김지은의 ‘자유로운 의사’ 하에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외과 의사인 철수가 고정의자에 포승줄로 꽁꽁 묶여 있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그때 한 명의 응급 환자가 제때 철수의 수술을 받지 못해 사망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많은 이들이 철수는 응급 환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없고, 그것은 철수에게 신체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제 한 가지를 더 가정해 보자. 평소 수술을 귀찮게 여기던 철수는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고. 철수는 의자에 묶여 있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래서 설사 포승줄이 없었다 하더라도 의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이다. 이렇게 가정할 때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의사에 따른 것인가 아닌가? 이 지점에서 학자들의 의견은 둘로 갈린다.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자유를 이해하는 통제이론가들은 철수가 고정의자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철수는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유가 없었다고 말한다.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의사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철수가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실행했다는 점에서 철수의 행위가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 역시 상당한 호소력을 갖는다. 철수는 비록 포승줄에 묶여 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행위, 즉 의자에 앉아 있는 행위를 수행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다른 누구도 아닌 철수에게서 말미암았다. 그 행위의 근원이 철수 자신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자기근원성을 통해 자유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수 있는데, 그때 의자에 앉아 있는 철수의 행위는 자유로운 의사에 따른 것이 된다.

두 자유 개념의 충돌

결국 자유를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할 때 철수의 행위는 자유롭지 않지만 ‘자기근원성’으로 이해할 때 그것은 자유로운 것이 된다. 이처럼 철수의 사례는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과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 서로 충돌할 수 있다는 것을 예증한다.

김지은에게서도 동일한 상황이 성립한다. 앞서 자유를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할 때 김지은과 안희정 사이의 성관계는 김지은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안희정의 위력 때문이다. 그런데 관계 이후 김지은의 모습은 김지은이 그 관계를 진심으로 원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적어도 재판부는 그렇게 추론했다). 그것은 자유를 ‘자기근원성’으로 이해할 때 둘 사이의 성관계가 김지은의 자유의사에 따른 것이라는 것을 뜻한다. 철수의 사례에서처럼 두 자유 개념 사이의 충돌이 발생한다. 나는 안희정 1심 재판을 두고 최근 벌어지는 논란은 일정 부분 이 두 개념에 대한 혼동과 오해에서 말미암았다고 생각한다.

쟁점은 안희정과 김지은의 행위를 법적·윤리적으로 평가하는 현재의 맥락에서 두 자유 개념 중에서 무엇이 더 적합하냐는 것이다. 여기서 철수의 사례는 다시 한 번 유용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철수가 의자에서 벗어나지 않음으로 인해 응급 환자는 사망에 이르렀다. 그럼 그 응급 환자의 사망에 대하여 철수는 책임이 있는가? 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비록 포승줄로 묶여 있어 의자에 앉아 있는 것 이외에 달리 행동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철수는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을 좋아했고, 그런 이유로 설사 포승줄로 묶여 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응급 환자에 대한 수술을 집도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철수의 행위를 법적·윤리적으로 평가하는 맥락에서 그 행위는 철수의 자유의사에 따라 실행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법적· 윤리적 책임을 묻는 맥락에서 더 적합한 자유 개념은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 아니라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자기근원성’으로 자유 개념을 이해할 때 김지은은 자유의사에 따라 안희정과 성관계를 가졌다. 이는 법적·도덕적 맥락에서 적합한 자유 개념을 채택할 때 김지은이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했다는 것을 뜻한다. 안희정의 성폭행 혐의에 대한 재판부의 무죄 판결이 힘을 얻는 대목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김지은에게서 안희정의 위력은 철수에게서 포승줄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둘 모두 ‘달리 행위할 수 있었음’으로 이해된 행위자의 자유를 박탈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자가 어떤 종류의 자유도 갖지 않았다는 결론이 곧장 따라 나오진 않는다. 실제로 철수가 의자에 앉아 있는 행위는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의사에 따라 수행된 것으로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지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1심 재판부의 판단이 옳다고 가정할 때 김지은이 안희정과 성관계를 가진 것 역시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의사에 따라 수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행위자의 행위를 법적·윤리적으로 평가하는 맥락에서 더 중요한 것은 자기근원성으로 이해된 자유 개념이기에 김지은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글의 주요 논지이다. 안희정의 위력을 아무리 폭넓게 해석한다 하더라도 김지은이 진심으로 원해서 성관계를 가졌다면 안희정은 무죄라는 말이다.

글을 끝내기 전에 안희정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와 관련하여 한마디 하자. 요즘 드루킹이나 한나라당에 의한 인터넷 여론 조작이 많이 언급되는데, 여론 조작에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지금 주요 언론 매체들이 안희정 사건을 보도하는 모습을 보면 사실상의 여론 조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희정이 무죄라는 1심 재판이 있었음에도 그걸 보도하는 기사들은 여전히 김지은을 ‘고소인’이 아니라 ‘피해자’로 안희정을 ‘피고(소)인’이 아니라 ‘가해자’로 규정한다. 그러면서 김지은의 2차 피해를 걱정한다. 뚜렷한 물증 없이 고소인과 피고인의 주장이 서로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기자들이 재판을 통하여 비로소 확정되어야 할 사실 관계를 미리 전제하고 예단하는 것이다. 안희정이 성폭력의 가해자일 수 있지만 무고의 피해자일 수도 있고 김지은이 성폭력의 피해자일 수 있지만 무고의 가해자일 수도 있다. 그에 대해선 아직 사실 관계가 확정되지 않았고 추후 상급심을 통해서 확정되어야 할 사안이다. 기자들이 그런 사안을 자신의 입맛에 따라 미리 확정하고 예단하여 보도한다면 그건 여론 조작 다름 아니다.

 

 

 

최성호 경희대·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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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남 2018-09-02 10:52:39
일본 최고 부자인 야나이 다다시 회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밋밋한 옷만 파는데, 기가 막히게 옷을 잘팝니다.

유니클로 창업자입니다.

상식과 철학 2018-08-31 17:36:15
<4>
의자에 묶인 철수가 정말 수술하기 싫었는지 아닌지를 (본인을 제외한) 누가 진실로 알 수 있습니까? 철수가 잘못했다고 말하는 주변사람들의 증언으로요? 합리적 이성과 상식에 기반해서 평상시 행위를 판단해서? 누구에게 합리적이고, 누구에게 상식인 건지를, 철학자라면 의심해야 하지 않는가요?
보편적인 상식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상태에서 철학적 개념을 논한다는 게 우습습니다. 인간과, 인간관계와, 그안에서 인간의 행위, 판단, 심리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인간사회에 대한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공허할 뿐더러 실존하는 존재에게 오히려 큰 피해와 상처만을 안길 따름입니다.

상식과 철학 2018-08-31 17:35:05
<3>
‘피해자다움’이란 개념 자체가 과연 “객관적”일 수 있는가도 의문이지만, 성폭력이 발생한 전후상황에 대한 이해와 공감과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피해자다운 모습을 논하다는게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또한 무지함을 갖고서 객관적일수 없는 기준을 판단의 ‘전제’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럼에도 진짜 성폭력 피해자다운 모습을 굳이 얘기한다면, 그건 바로 김지은씨가 보여준 그간행위들입니다. 김지은씨 문제에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는 것은, 많은 이들이 유사한 일을 겪고 유사하게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논리대로면, 김지은씨는 가장 피해자다웠고 이에따라 자유의사를 가질 수 없었음이 자명합니다.

상식과 철학 2018-08-31 17:33:50
<2> 내적으론 모욕감과 불쾌감, 가해자에 대한 원망과 함께 이문제만 빼면 가해자는 좋은 사람일것이며 이문제만 없으면 소속집단의 공동가치를 실현키위한 사회적 활동을 유지할수 있을거란 판단과 심리적 혼란을 겪기도 합니다. 또한 혼란을 겪을 동안에도 평소 사회관계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해야할 일을 평상시와 다를바없이 수행하고, 마치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사회적 관계를 잘 유지하고 업무를 잘 수행해낸 여성일수록 더 그러합니다. 하지만 문제해결은커녕 성폭력은 반복되고, 내적혼란은 자기자신을 잠식해 생존자체가 극한에 다다랐을 때, 혹은 나와같은 또다른 존재(피해자)가 생기거나 가해자가 너무 뻔뻔하다고 여겨질때, 결국 숨겨왔던 문제를 드러내게 됩니다. 살기 위해서요. 모든걸 걸고.

상식과 철학 2018-08-31 17:32:37
(분량제한으로 나눠 올립니다)
<1>
법적윤리적 판단에선, 자기근원성으로서 자유개념을 이해해야하며, 이에따라 김지은씨는 자유의사가 있었기에 성적자기결정권을 행사한거라 판단할수있다고, 위글은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단의 전제인, ‘자유의사’가 김지은씨에게 있었을까요? 본인은 없었다고 저토록 말하는데, 누가 무슨 근거로, 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요? 이글에선 그 근거로 ‘피해자다움’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많은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했을때(특히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가깝고 친했던 지인에게 피해를 당했을때, 더구나 그 지인을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을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