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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둥지를 만들어준 딱다구리
평생의 둥지를 만들어준 딱다구리
  • 김병희
  • 승인 2024.04.04 09: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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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37 동서문화사의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초등학교 5학년 무렵, 낮에는 온종일 밖에서 놀았다. 붕어나 메뚜기와 놀고 산에 소를 풀어놓고 친구들과 총싸움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서 시골집에 온 형이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10권을 선물로 가져왔다(표준말은 ‘딱따구리’임). 전기도 갓 들어와 방을 환히 밝히는 백열전구 아래서 10권을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누워서 읽다가 스르르 잠든 때도 많았다. 나의 독서를 지켜본 형은 서울로 돌아가 나머지 90권을 시골집으로 보내줬다. 내 독서의 시작은 그때부터였지 싶다. 

동서문화사의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광고 (동아일보, 1976. 12. 24.)

동서문화사의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광고를 보면 지면 중앙에 있는 책 읽는 어린이 모습의 메달이 한눈에 들어온다(동아일보, 1976. 12. 24.). 메달 테두리에는 “어린이 사랑의 딱다구리 CHILDREN’S GREAT BOOKS”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지면에서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메달을 크게 배치했는데, 1970년대의 책 광고에서 보기 드문 파격이다. 좌측 상단에는 딱다구리의 성격을 ‘소년소녀 세계문학사상 100선 전집’으로 소개한 심벌마크를 배치하고 아래에 선자(選者) 10명을 나열했다.

강두식·김동리·김진만·박목월·백 철·안응렬·이가원·천경자·최기철·홍사중 같은 책 선정에 참여한 10명은 소설가·시인·평론가·번역가·화가 등 당대 최고의 문장가들이었다. 책값은 권당 290원이었다. 심벌마크 옆에는 다음과 같은 보디카피를 배치했다. 

“■어머니! 어린이 사랑 나라 사랑의 <딱다구리>를 아십니까? <딱다구리>는 사랑과 희망의 무지개가 있고 하늘과 땅, 자연과 우주가 펼치는 꿈이 있읍니다. ■어머니! 어린이 사랑 나라 사랑의 <딱다구리>를 아십니까? <딱다구리>는 아름다운 음악이 있고 용기와 모험의 이야기가 있고 거친 바람과 메마른 대지에 맞설 수 있는 힘과 슬기의 양식이 있읍니다. ■어머니! 어린이 사랑 나라 사랑의 <딱다구리>를 아십니까? <딱다구리> 동서문화사는 어머니들과 함께 어린이를 뿌리 깊은 나무로 가꾸기 위해 온갖 정성을 기울이고 있읍니다.

■어머니! 크리스머스 캐럴과 저무는 해의 종이 울리는 포근히 깊어가는 겨울밤 마음의 양식을 더할 <딱다구리>를 선물해 주십시오. ■<딱다구리>는 긴 겨울방학 55일을 보낼 어린이의 고향이며 어른들의 추억입니다.■” 놀랍게도 헤드라인을 가장 위에 배치하는 일반적인 레이이웃을 무시하고 헤드라인을 보디카피의 아래 쪽에 배치했다. “겨울방학 55일! 어머니! 텔레비젼을 꺼 주셔요! 만화책을 덮어 주셔요!” 헤드라인은 보디카피보다 약간 큰 고딕체로 썼다.

메달 아래쪽에는 “76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이라는 수상 소식을 강조하고, 그 아래에 100권의 도서 전체를 하나씩 나열했다. 1권 『곶감과 호랑이』(김요섭)와 2권 『플루타르크 영웅전』(플루타르크)을 시작으로 99권 『흰고래 모비딕』(멜빌)과 100권 『마야·잉카제국 탐험기』(스티븐슨, 플로르느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의 명저가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춰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펼쳐졌다. 

지금 다시 보니 이 책들은 동서양의 원작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여느 어린이 도서처럼 원작의 핵심 줄거리를 발췌해서 재구성했다. 예컨대, 『백경(白鯨)』이나 『모비 딕』으로 번역되는 허먼 멜빌의 원작 소설은 700쪽이 넘는데, 딱다구리 100권은 250쪽 내외였다. 이 책들은 개정된 한글 맞춤법이 시행된 1989년 이전에 나왔기에, 문장이 현재의 맞춤법과도 다르다.

그런데 발췌 재구성이면 어떻고 맞춤법 차이면 어떠랴. 동서고금의 명저가 거의 망라돼 어린이의 양식이 되기에 충분했고, 창작이든 번역이든 문장이 뛰어나니 지금 다시 봐도 어린이의 양서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데. 

동서문화사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표지들 (1976)

책 앞뒤 표지의 천연색 삽화도 놀라웠다. 본문에 그려진 일러스트는 여느 만화보다 수준이 높았다. 소설·과학·역사·예술·위인전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담긴 시리즈 100권은 동서양의 지식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 어린이의 독서 열풍을 불러일으키는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리즈의 성공을 지켜본 다른 출판사들도 어린이 도서 시장의 잠재력을 확인했고, 그 후 어린이 도서 시장도 더 풍요로워졌다. 결국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는 어린이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일깨우며 평생의 독서 습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그리하여 100권의 책은 어린 시절에 책 읽는 습관을 길러야 그때 축적한 교양과 감수성이 평생토록 이어진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나는 딱다구리 그레이트북스 100권을 다 읽었다. 13권 『보물섬』(스티븐슨), 16권 『삼총사』(뒤마), 18권 『톰 소오여의 모험』(트웨인), 25권 『빨강머리 앤』(몽고메리), 38권 『기암성』(르블랑), 46권 『하늘을 나는 메어리 포핀즈』(트래버어즈), 51권 『꽃신/꿈을 찍는 사진관』(강소천), 53권 『소공녀』(버어넷), 56권 『알라딘의 마술램프』(버어튼), 65권 『돈키호테』(세르반테스), 82권 『대도둑 호첸플로츠』(프로이슬러), 95권 『피타 팬』(베리) 같은 책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붕어나 메뚜기와 놀다 지치면, 나는 보물섬을 찾으러 가거나 톰 소오여와 함께 모험을 떠나는 장면을 상상하기도 했다. 이미 읽었는데도 다시 보면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100권의 책들은 책과 논문 같은 글쓰기로 밥 먹고 살고 있는 나에게, 쉬지 않고 나무를 쪼아대 둥지를 만드는 딱따구리처럼 평생을 살아갈 내 지성의 둥지를 만들어준 것 같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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