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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혹은 ‘덮어버린’ 한국 현대사에 주목하다
‘잃어버린’ 혹은 ‘덮어버린’ 한국 현대사에 주목하다
  • 김병희
  • 승인 2022.08.10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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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④ 『해방전후사의 인식』

1980년대에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치고 ‘해전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책 제목이 엄연히 있었지만, 학생들은 무슨 암호인양 ‘해전사’라고 불렀다. 그래야 좀 더 운동권 같았다거나, 시대의 모순에 좀 더 분노한 듯 보였다거나, 아니면 좀 더 의식 있는 사람이라 여겼던 건 아니었을까. 이 책을 접하지 않고 1980년대를 건너온 젊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79. 10. 15. 출간)은 그처럼 당시 대학생들의 가치관과 역사관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책으로 평가받는다. 

이 책을 읽은 신입생들은 반공 투사로 알려진 사람들이 천황에 충성한 황군(皇軍)이었고, 저명한 문인이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먹었다. 한국 현대사는 내재적 모순 덩어리라는 것이 책의 주요 요지였다. 그리하여 대학생들은 친일파를 청산한 북한에 민족적 정통성이 있고, 남한은 미국을 새 상전으로 모신 친일파의 나라라고 인식했다. 간단히 단정하기 어렵지만, 한국을 반식민반자본주의사회로 규정한 1980년대의 운동권에서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NLPDR) 운동을 전개하며 “미 제국주의 타도”나 “조국해방” 같은 구호를 외친 것도 남한에 민족적 정통성이 없다는 실망감이 반영된 결과였다.

첫 권 이후 10년 만에 『해방전후사(解放前後史)의 인식(認識)』 6권의 출간을 알린 한길사의 광고를 보자(한겨레, 1989. 11. 15.). 광고에서는 책 제목을 헤드라인으로 쓰고, 바로 아래에 “60명 동원 10년 만에 완간, 80년대 사회과학 출판의 최대 성과”라는 카피를 덧붙여 출간의 성과를 알렸다. 이어서 해전사가 “남북한 민족사를 주체적·총체적으로 규명하면서 우리의 잠들어있는 역사의식을 흔들어 깨워놓은 이 시대의 고전”이라고 강조했다.    

한길사의 『해방전후사의 인식』 광고 (한겨레, 1989. 11. 15.)

광고에서는 6권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1~3권에서는 해방 3년사를 다뤘는데, 1권은 미군정과 민족 분단 그리고 친일 반민족 세력의 실상과 해방 직후의 경제 구조를, 2권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 구조의 실증적 연구를, 3권은 정치·사회운동의 혁명적 전개와 사상적 노선에 대해 기술했다. 6·25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해방 8년사를 다룬 4권에서는 민중항쟁과 무장투쟁 및 문화예술운동과 한국전쟁에 대한 해명을, 5권에서는 북한의 혁명 전통과 인민정권의 수립 및 반제반봉건민주주의 혁명 과정을, 6권에서는 남북한 해방전후사 연구의 쟁점과 과제를 종합적으로 안내했다.

『해방전후사의 인식』 초판표지(1979년)

광고에 소개된 저자들의 면면은 화려하다. 1권만 보더라도 송건호의 ‘8·15의 민족사적 인식’, 진덕규의 ‘미군정의 정치사적 인식’, 김학준의 ‘분단의 배경과 고정화 과정’, 오익환의 ‘반민특위의 활동과 와해’, 임종국의 ‘일제말 친일군상의 실태’, 백기완의 ‘김구의 사상과 행동의 재조명’, 김도현의 ‘이승만 노선의 재검토’, 이동화의 ‘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활동’, 유인호의 ‘해방 후 농지개혁의 전개과정과 성격’, 이종훈의 ‘미군정 경제의 역사적 성격’, 임헌영의 ‘해방 후 한국문학의 양상’, 염무웅의 ‘소설을 통해 본 해방직후의 사회상’ 같은 12편의 글이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장막을 열어젖히기에 충분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집권으로 암울한 대학시절을 보내던 대학생들에게 1979년에 출간된 해전사 1권은 필독서나 마찬가지였다. 2권 이후부터는 강만길(근대사), 최장집(정치), 박현채(민족경제사), 김윤식(문학사)을 비롯해, 당시 대학원생이던 이종석, 김명섭, 이완범, 박명림은 물론 6권의 마지막에 ‘해방 직후 문학 논의의 쟁점’을 쓴 신형기에 이르기까지 60명의 필자가 참여했다. 시간이 흐른 다음에 필자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비판적 지성으로 자리매김했다.

출간 11일 만에 1979년의 10·26 사건으로 판금됐다가 1980년에 서울의 봄이 열리며 해금되자, 해전사의 초판은 들불 번지듯 팔려나갔다. 하지만 신군부가 정권을 다시 장악하자 여러 저자들이 구속되거나 해직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한길사의 김언호 대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펴낸 책 중에서 단 한권만 고르라고 한다면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해전사’를 꼽겠다고 했다(경향신문, 1990. 4. 14.). 이 책은 한길사의 편집 방향인 진보적 민족사관에 기초할 뿐더러 50만 여권이 팔려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해방전후사의 인식』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꺼리는 사학계의 풍토를 깨뜨리며 현대사 연구의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결국 이 책은 ‘잃어버린’ 혹은 ‘덮어버린’ 한국 현대사에 주목하라는 시대의 표정을 한국 지성계에 제시했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정치계와 언론계에서 밝혀내지 못했거나 애써 밝히려 하지 않았던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려진 장막을 열어젖힌 비판적 정신에 있었다. 그것은 곧 지성의 용맹스러움이었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서울대를 졸업하고 한양대 광고홍보학과에서 광고학 박사를 했다. 한국광고학회 제24대 회장과 한국PR학회 제15대 회장을 지냈다. 주요 저서와 논문으로 『디지털 시대의 광고 마케팅 기상도』(학지사, 2021),「광고의 새로운 정의와 범위: 혼합연구방법의 적용」(2013) 등이 있다. 한국갤럽학술상 대상(2011), 제1회 제일기획학술상 저술 부문 대상(2012), 교육부·한국연구재단의 우수 연구자 50인(2017) 등을 수상했고, 정부의 정책 소통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표창(2019)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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