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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한 열아홉 순정
우리를 슬프게 한 열아홉 순정
  • 김병희
  • 승인 2023.07.20 0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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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26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문예출판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광고(동아일보, 1974. 12. 4.)

울고 있는 아이, 정원에 누워있는 작은 새의 시체,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를 우연히 발견했을 때, 우리에 갇혀 서성이는 동물의 초조한 모습을 볼 때, 출세한 옛 친구를 만났는데 그가 형식적으로 손을 내밀 때, 사랑하는 이가 오랫동안 소식을 전해오지 않을 때, 어린 시절의 고향 마을을 오랜 만에 다시 찾았을 때, 자동차 지붕 위로 빗소리가 떨어질 때, 휴가의 마지막 날, 앙상한 나뭇가지에 쌓인 하얀 눈송이를 볼 때.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때는 잠시 숙연해질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할 수 있다. 독일의 시인 안톤 슈낙(1892~1973)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1953년판 고등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에 처음으로 실린 이후 1982년의 제4차 교과서 개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젊은 날의 전설』(1941)에 처음 실렸던 이 수필은 그의 산문 중에서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그의 수필은 의미를 부여하려고 일부러 애쓰지 않고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묘사한다.

문예출판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광고를 보자(동아일보, 1974. 12. 4.). 책 제목이 헤드라인으로 쓰였고, “여러분이 애타게 기다리던 안톤 슈낙의 산문집!”이란 오버라인을 덧붙여 책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다.

이어지는 보디카피는 이렇다. “지난날의 추억, 고향에 대한 향수, 숲 이야기를 시적 문장과 화려한 문체로 엮어 간 안톤 슈낙의 산문집! 인생을 바라다보는 작가의 달관(達觀)된 시선은 읽는 이에게 큰 공감을 준다.” 카피를 마무리하며 “꼭 권하고 싶은 양서!”라고 강조했는데, 출판사가 권유한다는 것인지 어떤 전문가가 권유한다는 것인지 주체가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책값은 700원이었다.

문예출판사에서 출간한 차경아 교수의 번역본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젊은 날의 전설’과 ‘밤의 해후’를 묶은 것으로 1974년 11월 30일에 초판이 나왔다. 번역이 워낙 유려해 이 책은 지금도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차경아에 앞서 이 수필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한 분은 수필가 김진섭 선생이다.

김진섭 선생은 이 글을 1936년에 번역했는데, 해방이 되고 나서 자신의 두 번째 수필집인 『생활인의 철학』(선문사, 1948)에 실었다. 시나 소설은 쓰지 않고 수필에만 매진한 김진섭 선생의 독일어 실력과 우리말 솜씨가 만나 우리의 마음을 울린 훌륭한 번역문이 탄생한 것이다.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의 박진영 교수는 슈낙이 히틀러에 충성했다는 이유를 들어, 시대적 배경을 외면한 채 국정교과서로 이 수필을 가르치고 배워온 우리 교육이 부끄럽다며 “이 모든 것이 또한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고 비판했다(‘히틀러 충성한 독(獨) 문인 가르쳤던 부끄러운 국정교과서’ 서울경제, 2020. 6. 4.).

하지만 나는 이 비판에 동의하지 않는다. 작가가 히틀러에 충성했다 하더라도, 누구나 느끼는 슬픔의 조각과 허무감에서 피어나는 우수(憂愁)를 서정적으로 묘사한 이 수필을 고등학생에게 읽게 한 것이 그토록 잘못됐다는 말인가. 

이런 논리라면 친일 행위를 했던 춘원 이광수의 『무정』이나 전두환 장군에게 일해(日海)라는 호를 지어 바친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도 한국인이 읽으면 안 되는 블랙리스트에 올려야 한다. 국어 교과서의 영향 탓인지 고은 시인과 최인호 작가를 비롯한 여러 문인이 이 수필을 패러디해 글을 썼다.

가수 신형원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1992)이라는 앨범도 내놓았다. 원로 언론인인 김성우 기자는 교과서에서 이 수필을 추방한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며, 명문의 퇴장을 안타까워했다. 

김진섭의 『생활인의 철학』 표지(선문사, 1948)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산문이지만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이 돋보인다. 향기와 음향은 물론 촉감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해 낭만적 서정성을 담아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이 수필이 사람들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옆에 펼쳐놓고 참고했던 글쓰기의 전범이었다고 평가하더라도 과도하지 않을 것이다.

이 수필은 한국인에게 주변의 다양한 사물과 소박한 풍경을 감각의 촉수로 돌아보게 함으로써, 일상의 부스러기를 놓치지 말고 섬세하게 관찰하면서 서정적인 삶을 살아가라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차경아 교수가 역자 후기에서 썼듯이 “매연이 가득 찬, 물이 오염된 도시, 숲이 없는 이 도시에서, 슈낙의 글은 문득 고향을 대하듯 반갑고 시원한 바람이 될 것”이다. 수필의 전문을 거의 암송했던 고등학생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이 수필을 외우며 리듬감 있는 시적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배웠고, 화려체 문장의 수준을 어떻게 조절해야 하는지도 터득했다. 아름다운 문체를 쓸 수 있는 저력이 섬세한 관찰력에서 나온다는 사실도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미자 선생은 「열아홉 순정」이란 데뷔곡에서 첫사랑을 보기만 해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댄다고 노래했다. 나는 이 수필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나도 열아홉 순정을 앓았던 것일까?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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