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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완전 연소하는 삶을 꼭 살아야 할까
자기를 완전 연소하는 삶을 꼭 살아야 할까
  • 김병희
  • 승인 2023.09.07 0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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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28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에게 이 말을』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가 74세에 타계하자 지인들은 그가 생전에 써둔 이 글을 묘비명으로 남겼다.

그리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1943)로 문학적 명성을 얻었다. 전집 30권이 간행될 정도로(열린책들, 2008),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지명도가 높다. 하지만 난해한 작품도 있고, 재미없는 글도 있어서, 독자에 따라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 

나는 그의 작품 중에서 ‘영혼의 자서전’이란 부제를 단 『희랍인에게 이 말을』(1979)을 가장 감동적으로 읽었다. 자서전 성격의 이 책은 작가가 세상을 뜨기 2년 전에 탈고한 원고 그대로 출간됐다. 고려원의 『희랍인에게 이 말을』 광고를 보자(경향신문, 1979. 10. 16.).

고려원의 『희랍인에게 이 말을』 광고(경향신문, 1979. 10. 16.)

책 표지와 제목을 중앙에 크게 배치했다. 헤드라인으로 사용된 책 제목을 설명하는 오버헤드가 인상적이다. “피와 땀과 눈물에 얼룩진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궤적을 보여주는 깊고, 뜨겁고, 감동적인 책.”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안정효 선생의 유려한 번역으로도 유명한 이 책은 크라운판으로 상하 두 권으로 출간됐다. 각각 250여 쪽에 책값은 권당 1,700원이었다. 이어지는 보디카피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마음이 기록한, 짓눌리고 아직 살아있어 맥박 치는 증언이다. 이것은 또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자서전들 중에 하나이며, 지금까지 쓰여진 가장 아름답고 마음을 뒤흔드는 저서들 가운데 하나임을 문외한이라도 알 수가 있다. 이 책은 카잔차키스가 죽음을 눈앞에 두고 단 1초의 생명의 연장을 신께 간구하며, 죽음의 처절한 유서를 쓰고 토해낸 자신의 불타는 추구에 대한 감격적인 이야기이다. 한 위대한 인간이 그가 살던 시대를 얼마나 섭렵할 수 있으며,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의 완성을 위하여 살 수 있는가, 그 피와 땀과 눈물이 얼룩진 카잔차키스의 영혼의 궤적을 보여주는 깊고, 뜨겁고, 감동적인 책이다!”

광고 카피에서 강조했듯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영혼의 궤적을 기록한 자서전이다. 인간의 위대성에 주목하며 자기 나름의 정신적 영토를 구축하기를 평생토록 꿈꾼 그는 독자들이 이 책에서 인간의 정열과 사상을 찾아다닌 자신의 자취를 느끼기를 기대했다.

그는 자신의 한 평생을 시적인 문체로 이렇게 표현했다. “시각, 후각, 촉각, 미각, 청각, 지성- 나는 내 연장들을 거둔다. 밤이 되었고, 하루의 일은 끝났다. (……)  빛은 항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구원이 없음을 안다. 빛은 항복하지 않겠지만, 숨을 거두어야 하리라.”

그는 방랑자처럼 여러 나라를 떠돌며 평생동안 방황한 흔적을 이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는 유럽의 수도원 순례를 비롯해 러시아혁명의 현장에 있었다. 스페인·영국· 러시아·이집트·이스라엘·중국·일본 등지를 두루 여행했고, 여러 나라에서 느낀 깨달음을 책에 오롯이 남겼다.

사람은 어두운 곳(womb, 자궁)에서 나와 어두운 곳(tomb, 무덤)으로 돌아가는데, 움과 툼, 다시 말해 자궁과 무덤 사이에서 잠깐 반짝여 잠시 눈이 부신 것이 인생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즉, 반짝이는 것은 잠깐이고 나머지 인생은 힘들다는 뜻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에게 이 말을』 표지(고려원, 1979) 

이 책에는 자신이 발견한 사명에 집중하고 몰입해 삶을 완전 연소할 만큼 열심히 살아온 한 인간의 피와 땀과 눈물이 얼룩져있다. 사람은 뭔가를 하며 살아가지만 삶의 분명한 목적과 사명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삶이나 죽음보다 더 강렬한 그것은 차라리 영혼이라고 불러야 하리라.” “인생이란 냉수 한 그릇과 같더구나.” 삶의 치열한 흔적에서 솟아난 이처럼 주옥같은 명문을 읽으며 나는 벅차오르는 감동에 몸서리쳤다. 영혼의 궤적을 통해 예술혼의 경지를 보여준 이 책은 자신의 관심사에 몰입해 자기를 완전 연소하는 삶이야말로 그 무엇에 비할 바 없이 가치 있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고려원 발행의 첫 번역판에서는 ‘영혼의 자서전’이 부제로 쓰이고 『희랍인에게 이 말을』이 책 제목이었다. 하지만 출판사가 열린책들로 바뀐 다음부터는 아예 『영혼의 자서전』을 책 제목으로 쓰고 ‘희랍인에게 이 말을(Report to Greco)’은 삭제해버렸다.

출판사의 영업 전략 때문에 한국 독자에게 무의미한 희랍인을 삭제하는 선택을 했겠지만, 희랍인(그리스인)에게 죽기 전에 이 말만은 꼭 남겨주고 싶다는 저자의 소망마저도 삭제해버린 셈이다. 이래서 원제목을 함부로 바꾸면 안 된다. 

일흔이 넘도록 자기 내면과 투쟁하며 피 흘린 정신을 우리는 모방해야 할까, 탈피해야 할까? 자기를 완전 연소하는 그의 내면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이 담보하는 독보적인 매력이다. 20대 후반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의 피 흘린 정신을 모방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탈피하고 싶다.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던 그는 ‘오름(상승)’의 꿈을 추구하며 평생토록 방황하며 참으로 고단한 인생을 살았었지 싶다.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끝까지 신과 대결했던 카잔차키스의 인생보다 신 앞에서 나약한 존재가 한결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자기를 완전 연소하는 삶이 아니더라도 인생은 충분히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러하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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