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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와 공정성에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라는 자신감
권위와 공정성에 문제가 있는지 물어보라는 자신감
  • 김병희
  • 승인 2023.11.10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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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 30 문학사상사의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우리나라의 여러 문학상 가운데 이상문학상(李箱文學賞)은 동인문학상과 현대문학상과 함께 권위 있는 3대 문학상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문학사상사가 요절한 천재 작가 이상(李箱)이 남긴 문학적 업적을 기리자는 뜻에서 1977년에 제정한 이래 가장 탁월한 작품을 발표한 작가에게 해마다 수여하고 있다.

전년도의 1월부터 12월까지 국내의 문예지에 발표된 중·단편소설이 심사 대상이고, 작품성이 뛰어난 소설을 예심을 거쳐 본심에 회부한 뒤 수상작을 선정한다. 1월에 발매하는 작품집의 제목은 <OOOO년 제OO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의 형식을 계속 유지하고 있고, 최종 심사에 오른 수상 후보작까지 함께 수록된다. 

작품집의 제목 형식은 1977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다. 문학사상사의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광고를 보면 본상 수상작 1편과 수상 후보작 7편을 소개했다. 디자인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쓴 흔적은 없고 소설가의 이름과 소설 제목을 소개하는데 그쳤다.

문학사상사의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광고(조선일보, 1977. 11. 3.)

광고 유형으로 말하자면 정보 제공 광고를 했을 뿐이다(조선일보, 1977. 11. 3.). 책 제목 그대로를 한자 헤드라인으로 썼으니 특별히 색다를 바는 없지만, 광고의 맨 위쪽에 배치한 오버 헤드라인은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이 상의 권위와 공정성을 독자에게 묻는다.” 이 얼마나 자신만만한 표현인가? 비록 처음 제정했지만 문학상의 권위와 공정성에 대해서는 결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것이라며, 독자들이 이의를 제기할 테면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해보라는 자신감 넘치는 카피였다.  

광고에서는 제1회 본상 수상작인 김승옥의 「서울의 달빛 0장」을 비롯해, 최인호의 「두레박을 올려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한수산의 「침묵」, 이병주의 「정학준」, 이청준의 「지배와 해방」, 박원서의 「조그만 체험기」, 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까지 모두 8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고 소개했다.

그런데 조세희와 윤흥길의 소설은 제목을 끝까지 소개하지 않고 말줄임표(..)로 생략했다. 디자이너가 서체의 크기를 통일하려고 기본 정보인 소설의 긴 제목을 생략해버렸으니 카피의 기본 문법에서 벗어났다. 서체의 크기를 줄여서라도 전체 제목을 알렸어야만 했다. 문학을 업으로 삼는 작가나 문학평론가들은 생략해도 소설의 제목을 알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소설의 실제 제목을 「난장이가 쏘아올린..」이나 「아홉 켤레의 구두로..」로 오해할 수도 있었다.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초판 표지(문학사상사, 1977)

하물며 그런 실수는 『제1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의 초판(1977. 10. 15.)의 표지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니, 광고 디자이너의 실수라기보다 표지 디자이너의 실수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광고 디자이너는 두 소설의 실제 제목에 말줄임표가 붙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광고 디자인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광고 카피에서는 이상문학상의 성격을 “각계에서 뽑은 77년도 최우수작을 한자리에서 조감(鳥瞰)하는 문학사의 도표”라고 설명했다. 독자의 추천, 신문사 문화부 기자의 추천, 학계의 추천, 비평계의 추천을 받아 뽑았다는 수상작품집은 신국판 380쪽에 책값은 1,200원이었다. 도표(道標)란 길의 뻗어 나간 방향이나 이정 따위를 나타내어 길가에 세운 표지물이다.

다시 말해서, 한국문학사의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문학의 이정표라는 뜻이었다. 카피에서 천명했듯이 이상문학상 1회 수상작과 수상 후보작을 쓴 작가들은 그 후 한국문학의 토양을 비옥하게 일궈낸 일급 작가들이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제2회 수상작인 이청준의 「잔인한 도시」(1978)를 비롯해 제46회 수상작인 최진영의 「홈 스위트 홈」(2023)에 이르기까지 이상문학상은 권위와 공정성을 인정받으며 우리나라 작가들이 받고 싶어 하는 문학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 책에는 글감을 섬섬옥수로 뜨개질해서 멋진 이야기로 엮어낸 감동적인 소설로 그득했다. 그리하여, 누구나 한번쯤은 멋진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글로 쓰는 이데아(영원한 이상향)를 꿈꾸라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2018년의 이상문학상은 우수상을 받을 예정이던 작가들이 불공정 계약을 이유로 상을 거부하면서 수상자를 확정 발표하지 못해 파문이 일었지만, 문학사상사는 불공정 계약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계약 조건을 모두 수정함으로써,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출판사의 영업 전략 때문에 빚어진 일들은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지듯 이상문학상의 권위와 공정성을 더 빛나게 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나는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부터 즐겨 읽었다. 이 책은 수상작품집 발행의 붐을 일으켰지만, 이상하게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손이 먼저 갔다. 그 이유는 “이 상의 권위와 공정성을 독자에게 묻는다”라는 카피가 끌어당기는 도도한 자신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수록된 작품들도 소설의 나아갈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 소설집을 읽으며 나도 언젠가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으며 그 꿈을 따라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했다. 경제학과나 경영학과에 진학하라는 아버지와 형님의 뜻에 반기를 든 최초의 독자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재능이 부족한 탓에 나는 소설가가 되지는 못했다. 어쨌거나 해마다 어김없이 발행돼온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이야기의 구성보다 중요한 것이 글쓴이의 문체(文體, style)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주었다. 문체는 글쓴이의 얼굴이라는 경구를 나중에 대학에서 배웠지만, 그 전에 막연하게나마 문체의 중요성을 이 책에서 느껴버렸다.

그리고 재미있거나(dulce) 유익한(utile) 글을 쓰지 않을 바에는, 다시 말해서 이도 저도 아닌 글을 쓸 바에는 차라리 글을 안 쓰는 게 낫다는 글쓰기 자세도 체험적으로 배웠다. 소설의 시대가 끝났다지만 아직도 소설가의 꿈을 꾸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이상문학상은 ‘박제된 천재’ 이상처럼 오래오래 그 성좌를 지킬 것이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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