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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시인총서’에 꽤 많은 빚을 졌다 
‘오늘의 시인총서’에 꽤 많은 빚을 졌다 
  • 김병희
  • 승인 2024.03.22 10: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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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광고로 보는 시대의 표정36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

 “시 쓰고 있네!” “예술 하냐?” 선배가 신참 카피라이터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야유와 빈정거림에 가깝다. 신참 카피라이터들은 선배에게 이런 말을 종종 들었으리라. 시와 카피는 분명 다른 장르다. 시가 영혼의 울림을 추구한다면 카피는 상품 판매를 추구한다. 하지만 시와 카피는 언어의 경제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수용자의 공감을 얻으려한다는 공통점도 있기에, 틈날 때마다 시를 읽다보면 카피라이팅에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 광고(동아일보, 1981. 1. 21.)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총서’ 광고를 보면 제목인 “오늘의 시인총서(詩人叢書)”를 그대로 헤드라인으로 썼다(동아일보, 1981. 1. 21.). 별다른 보디카피 없이 시집의 제목을 곧바로 세로로 배열했다. 1974년 9월 25일에 총서 1차분 다섯 권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는 권당 500원이었지만 1981년에는 권당 1,200원이었다. 이 총서는 시집이 아닌 시선집(詩選集)이라 태작은 거의 없었고, 주옥같은 시를 가려 뽑은 것이라 엄선한 시들을 감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광고에서는 시인총서 14권을 소개했다. 

김수영의 시를 가려 뽑은 제1권 『거대(巨大)한 뿌리』(김현 해설)를 필두로, 김춘수의 『처용(處容)』(김주연 해설), 정현종의 『고통의 축제(祝祭)』(김우창 해설), 이성부의 『우리들의 양식(糧食)』(김종철 해설), 강은교의 『풀잎』(김병익 해설), 박용래의 『강아지풀』(송재영 해설), 박재삼의 『천년(千年)의 바람』(김주연 해설), 황동규의 『삼남(三南)에 내리는 눈』(김병익 해설), 오규원의 『사랑의 기교(技巧)』(김용직 해설), 김종길의 『하회(河回)에서』(김흥규 해설), 송욱의 『나무는 즐겁다』(김현 해설), 천상병의 『주막(酒幕)에서』(김우창 해설), 김종삼의 『북치는 소년』(황동규 해설), 그리고 김영태의 『북(北) 호텔』(송재영 해설)까지를 광고에서 소개했다. 시선집 제목 양옆에 사각형 틀을 만들어 그 안에 시인의 캐리커처나 사진을 배치한 아이디어도 흥미롭다. 

세로로 길쭉한 국판 30절 판형에 가로쓰기, 중질지, 산뜻한 장정을 시집 제작의 원칙으로 내건 시인총서가 출간된 이후 우리나라 ‘시집 판형’의 전형으로 자리 잡았고 가로쓰기 시집도 보편화됐다. 예상을 깨고 초판이 금방 매진된 시집들은 시집이 팔리는 시대를 열며 시의 독자층을 두텁게 만드는 데도 기여했다. 시인이라면 이 총서 시리즈에 들어가기를 꿈꿨을 만큼 반응이 뜨거웠던 이 총서는 1995년에 표지를 바꾸고 장정을 새로 해서 21년 만에 개정판을 발간했다. 

모든 시집이 매혹적이었지만, 대학 시절의 나는 여럿 중에서도 정현종의 『고통의 축제』와 황동규의 『삼남에 내리는 눈』을 좋아했고, 강은교의 『풀잎』은 특히 더 즐겨 펼쳤다. 나는 강은교의 시선집에서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로 시작하는 표제작 「풀잎」보다 43쪽에 있는 「우리가 물이 되어」를 더 좋아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민음사 『풀잎』 초판의 표지(1974)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중략)…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萬里)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人跡)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어떤 평론가는 “완전한 합일과 생명력이 충만한 세계에 대한 소망”을 드러내는 시라고 평했지만, 그 시절의 나는 정말 웃기는 해석이라 생각했었다. 나는 이 시를 연인이 떠나버린 남겨진 자의 가슴앓이를 노래한 시로 읽었다. 때로는 쓸쓸한 자의 내면에 스며드는 허무의 끝없는 심연을 묘사한 시로 읽기도 했다.

시인총서는 젊은 시인들의 시를 발굴해 1970~1980년대에 시의 전성시대를 여는데 기여했다. 민음사의 또 다른 시리즈인 ‘세계시인선’(1974~)이 동서양 시인들의 서정의 폭과 깊이를 알려주며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상상력의 르네상스를 열어가라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면, ‘오늘의 시인총서’(1974~)에 수록된 시인들은 민요조(民謠調) 서정시(抒情詩)라는 우리 시의 전통을 넘어 다채로운 형식 실험을 감행함으로써 우리말의 비행 거리를 확장시켰다. 그리하여 이 총서는 사람들에게 우리말의 말맛을 되살리고 우리글의 글맛을 찾아내려는 시도가 중요하다는 시대의 표정을 제시했다.

민음사는 2023년에 시인총서 출간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라는 앤솔로지를 발간했다. 7명의 시인(김수영·김춘수·김종삼·이성부·강은교·장정일·허연)이 각각 5편씩 선정한 35편의 시가 수록돼 있는데, 한국적 감수성의 50년 궤적을 확인할 수 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서 직장 생활에서 가장 뜨겁게 보냈던 시절, 나는 종종 ‘오늘의 시인총서’를 펼쳐보았다. 카피를 써야지 “시를 썼냐?”며 선배가 혼을 내던 초보 시절에도, 감수성이 고갈될 즈음에 시를 읽다보면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는 단어들이 떠올랐다. 시를 읽고 나서 좋은 카피 몇 개를 건지기도 했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의 시인총서’에 꽤 많은 빚을 지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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