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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고함
‘재미’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고함
  • 김선진
  • 승인 2024.01.15 08: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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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의 재미_『죽도록 즐기기』 닐 포스트먼 지음 | 홍윤선 옮김 | 굿인포메이션 | 272쪽

미디어의 홍수가 만든 정보과잉으로 혼돈
미디어 비판의 핵심은 ‘재미’에 달려 있어

TV·라디오에 이어 인터넷·스마트폰·SNS·유튜브에 이르기까지 미디어가 넘쳐나는 시대임에도 인간의 정보 활용능력과 판단 능력은 반대로 추락하고 있는 아이러니. 미디어가 구성한 현실 세계가 뭔가 탐탁지 않고 불편한데, 그게 구체적으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울 때 닐 포스트먼 전 뉴욕대 교수(1931∼2003)는 마치 내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어찌나 정곡을 찌르는지 절로 무릎을 치게 한다.

20세기 미디어 비평의 대가로 인정받는 포스트먼이 쓴 이 책은 미디어의 홍수가 만든 정보과잉으로 혼돈에 빠진 세계와 현대인들이 직면한 문제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미디어가 만든 허상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이 잠식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고한다.

이 책의 초판본은 1985년에 나왔는데 그의 예언자적 통찰은 텔레비전이 한창 신문물로 인식되던 20세기에 쓰인 책임에도 인터넷·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미디어가 지배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유용하다. 그의 책에서 ‘텔레비전’이라고 쓰인 단어를 모두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SNS’로 교체하더라도 전혀 문맥이나 이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그는 이 책에서 영상 매체로 인해 정치·교육·공적 담론·선거 등 모든 것이 쇼 비즈니스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탄식했는데 39년 전에 했던 우려가 지금은 해소됐을까.

훨씬 더 개인화된 미디어 환경에서 이런 현실은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화되고 있다는 게 사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거대한 흐름은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과연 인간은 이 절망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목도하게 함으로써 실낱같은 희망의 불씨를 지펴주고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격언으로 유명한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과 함께 포스트먼이 같은 미디어 전문가이면서도 극명히 다른 점이 있다. 맥루한은 기술결정론적 입장에서 미디어와 문명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본다. 이에 반해 포스트먼은 미디어가 끼칠 부작용과 폐단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오용이 초래할 악영향을 차단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포스트먼의 통찰이 빛나는 지점은 바로 우리가 우려해야 할 미디어 비판의 핵심이 ‘재미’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다는 것이다. 고개만 돌리면, 손만 뻗으면, 엄지손가락만 움직이면 온갖 즐길 거리가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죽도록 즐기기’에 빠져 한순간도 재미없이는 살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공적 담론이 사라지고 오로지 재미만 추구하는 미디어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먹방’ 같은 유튜브 장르다. 오로지 먹기 위해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끝없이 맛있는 음식을 탐닉하는 모습에 열광하는 세태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모든 미디어를 삼켜버린 블랙홀이 돼버린 디지털 미디어 세계에서 인간은 ‘재미’라는 미로에 갇힌 존재로 전락한다. 반응형 웹, 맞춤형 알고리즘, 무한 스크롤 기술에 의해 이젠 클릭할 필요도 없이 끝없이 콘텐츠가 이어진다. 최소 한시간 이상 인내심을 요구했던 TV 시대와 달리 디지털 미디어 세계에서 영상은 몇 분 단위의 짧은 영상으로 분절화된 릴스, 쇼츠 같은 숏폼 콘텐츠로 무한 증식해 시간의 흐름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인간은 전후 관계와 맥락이 결여된 채 파편화된 세계에 철저하게 길들여져 일관성 있게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모조리 상실해버렸다고 그는 진단한다.

미디어로 규정되는 진실·지식·사실을 너무도 철저하게 받아들이기에 하찮고 쓸모없는 것들을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모순된 것들을 대단히 합리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모든 인간들이 공동체의 문제에 냉담하고 매우 수동적이며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것을 그는 우려하고 있다. 

“대중이 하찮은 일에 정신이 팔릴 때, 끊임없는 오락 활동을 문화적 삶으로 착각할 때, 진지한 공적 대화가 허튼소리로 전락할 때, 한마디로 국민이 관객이 되고 모든 공적 활동이 가벼운 희가극과 같이 변할 때 국가는 위기를 맞는다. 이때 문화의 사멸은 필연적이다.”

 

 

김선진 
‘재미 연구서’ 『재미의 본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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