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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가치, 투입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노동의 가치, 투입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 김선진
  • 승인 2024.04.05 1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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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의 재미_『가짜 노동: 스스로 만드는 번아웃의 세계』 데니스 뇌르마르크·아네르스 포그 옌센 지음 | 이수영 옮김 | 자음과모음 | 412쪽

코로나19 팬데믹·인공지능이 바꾼 노동의 성격
보여주기 식·바빠 보이기 위한 일 모두 무의미

‘가짜 노동(pseudo work)’. 노동에도 진짜, 가짜가 있단 얘긴가.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자극적이다. 노동의 신성함을 부정하는 것 같아서다. 제목만 보면 또 왠지 자본가의 논리를 옹호하는 책처럼 보인다. 시쳇말로 ‘월급 루팡’을 지칭하는 용어 같기도 하다. 

도발적 제목에서 풍기는 선입견과는 달리 이 책이 담고 있는 문제의식은 정반대로 깊고 진지하다. 인간에게 노동의 의미와 본질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OECD 국가 중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겐 제목만 들어도 괜히 약점을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 

사실 인류는 최근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을 겪으면서 노동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코로나19 팬데믹과 인공지능의 등장이다. 첫째, 코로나19는 인간 삶의 라이프 스타일을 전면적으로 바꿔놓았다. 특히 원격 근무나 비대면 협업을 경험하면서 하루치 업무량을 단 두세 시간 만에 완수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고 이는 노동의 가치를 시간 단위로 환산하는 기존의 노동관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우리는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그 생산물의 가치가 낮아진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저자는 생산물의 가치는 거기에 투입된 시간에 의해 정의된다고 애덤 스미스가 우리에게 가르쳤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이런 연유로 생산물의 가치가 아니라 시간만큼 임금을 받는다는 관념은 우리 안에 깊이 박혀있다. 이런 고정관념이 코로나19로 근본적인 도전을 받게 된 것이다.

둘째, 인공지능. 특히 단순 자동화 시스템 수준이 아니라 인간을 뛰어넘는 고도의 인지능력을 발휘하는 생성형 AI의 등장은 인간 노동의 대부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면서 노동이 단순히 생계수단에 그치지 않고 인간 존재의 본질을 구성하는 요소여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 것이다. 공장 자동화로 육체노동을 대체하는 건 물론, 의사·변호사·회계사 같은 고도의 정신노동, 미술가·작곡가 같은 감성노동에 이르기까지 노동의 상당 부분을 인공지능이 대체하게 된다면 과연 인간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설사 인공지능과 인간이 같은 성격의 일을 하게 되더라도 인간이 수행하는 일의 의미와 본질은 마땅히 달라져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저자들은 이와 같은 환경 변화를 민감하게 관찰하면서 노동 현실이 내포하고 있는 근원적인 문제들이 무엇인지 깊게 파고들어 그 뿌리가 바로 ‘가짜 노동’이었다는 진실을 간파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할까?’ 이 질문에 해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의 저자들은 우리가 일이라고 믿고 있는 것에 얼마나 많은 부조리가 존재하는지 직접 조사하고 밝혀냈다. 성과와 상관없는 일, 보여주기 식의 일,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위한 일, 단지 바빠 보이기 위한 무의미한 일들이 모두 가짜 노동이라고 정의한다. 가짜 노동은 의미가 없고 가치 있는 결실을 맺지 못하며 실제 결과에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일들로서 마땅히 제거돼야 할 대상이다.

노동의 불편한 진실은 시간 투입 대비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진=픽사베이

저자가 인용한 ‘파킨슨의 법칙’은 이미 서로 알고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노동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낸다. 이는 1957년 영국 해군에 근무하던 시릴 파킨슨(1909∼1993) 전 말레이시아 말라야대 역사학 교수가 함정과 장병 수는 줄어드는데, 해군 행정인력은 오히려 증가하는 사실을 확인한 후 업무를 마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할당된 마감 시간만큼 늘어난다고 설명한 이론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일은 공무원과 같은 관료 조직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부 조직과 기업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무 직종의 일은 업무량과는 직접적인 관계없이 소위 ‘관리’를 위한 업무, ‘보고’를 위한 업무들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 이런 종류의 ‘가짜 노동’은 직접적으로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질적으로 스스로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인간의 노동 의욕과 자존감을 손상시킨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노동은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와 불가분으로 연결돼 있어서 본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세계와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서의 유일한 핵심은 본질적으로 살고 있는가 비본질적으로 살고 있는가의 문제다. 왜냐하면 노동은 인간 존재의 근본을 이루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인용한 저자들의 설명에서 보듯이 노동이 우리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만약 세계 곳곳에 숨은 가짜 노동을 제거할 수 있다면 인류는 잉여의 시간들을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에 사용함으로써 각자의 삶을 최적화하고 결과적으로 전체 인류 공영에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이 책을 통해 노동의 본질에 대한 각성의 시간을 가져볼 것을 적극 추천한다.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노동 해방’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김선진 
‘재미 연구서’ 『재미의 본질』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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